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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이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났다. 여자는 귀를 막았고 입을 닫았고 주먹을 쥐었다. 여자의 감각과 기억은 자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식도와 위와 소장에 이르는 길을 점검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손등이나 무릎에 귀를 붙이고 몸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땀을 흘렸다.
처음에는 희미한 소리만 들렸다. 그러다가 농도 높은 소리가 모공 밖으로 빠져 나갔다. 바람 부는 날이면 여자는 밖에 나가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몸 안에 축적된 음악의 총량이 있다면 바람의 리듬을 타고 어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개업한 점포 앞의 플라잉 가이처럼 팔다리를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면, 사람들은 꽁꽁 닫은 창문 너머로 기이한 춤을 추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여자는 늘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서른둘의 나이보다 더 오래 산 것처럼 보였다. 피부가 새하얗다 못해 약간의 회색빛을 띠고 있는데다, 미간 사이에 동그란 갈색 점이 있어 석조비로자나불의 얼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여자가 그 갈색 점을 새삼스럽게 만져 본 이유는 혹시 그것이 스위치가 아닌가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몸에서 음악이 쾅쾅 흘러나오는 바람에 여자는 재빨리 물을 틀고 믹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 소음을 만들어낸 자신을 벌주기 위해 벽에 몸을 붙이고 삼십 분간 서 있었다.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여자가 친구 A를 집에 초대한 날 밤부터였다. 여자는 A를 초대하기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벽에 붙은 화이트보드에 날짜별로 동선을 그려가며 되새겼다.
A를 만났던 날 오전 10시, 여자는 고급 쇼핑몰 6층의 한 여성 구두 매장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었다. 아니, 고르는 척했다. 여자는 미스터리 쇼퍼였다.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고객을 가장하여 매장을 평가하고 그 목록과 지표를 본사에 보내는 일을 했다. 여자는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지 2개월 차였고 이번 매장을 끝으로 그만둘 생각이었다.
여자는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그곳을 방문했다. 여자의 월급으로는 단 두 켤레의 구두만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대가 높은 곳이었다. 팀장의 지시에 따라 가진 것 중 가장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갔다. 그랬는데도 매장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은 여자를 한번 훑어본 뒤 일절 말을 걸지 않았다. 깔끔한 슈트 차림에 흠집 하나 없는 검정 구두를 신은 남자였다. 맑은 피부를 가졌고 머리카락 한 올조차 튀어나오지 않은 마네킹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등을 곧게 펴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매장 안을 걸었다. 가죽 냄새가 이질적일 뿐, 커피나 담배 냄새는 나지 않았고 진열장에는 먼지나 얼룩이 없었다.
여자는 매장 안에 설치된 긴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벨벳 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직원은 마지못한 듯 다가왔다. 여자는 남자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다른 미스터리 쇼퍼들도 곧 이곳을 다녀가 아르바이트 과제를 수행하겠지만, 여자가 어떻게 평가하느냐 역시 점수의 평균에 영향을 줄 것이다. 여자는 그 생각을 하면 온몸이 굳는 것만 같았다.
“로퍼와 힐을 하나씩 추천해 주세요.”
여자는 녹음기를 의식하며 최대한 도도한 목소리로 주문했다. 수십 번 연습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고 목소리가 떨린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여자는 비언어적 표현을 최대한 활용해서 이 모든 것이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직원이 낯선 여자를 믿어줄 리가 없었다.
직원은 검정색 가죽 힐과 회색 로퍼를 한 쌍씩 가져와 여자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여자는 그것들을 들어 올린 뒤 공들여 살펴보는 척했다. 여자는 여러 개의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야 했다.
“이 신발들은 어떤 재질로 되어 있나요?”
“재질이요? 아, 뭐 이건 카프스킨이고 이건 헤어쉬프죠.”
직원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침을 삼킨 뒤 준비한 다음 질문을 했다.
“헤어쉬프 원산지는요?”
직원은 미간을 잠깐 찌푸리더니, 에티오피아 산입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여자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직원은 여자가 벗은 구두의 밑창에 찍혀 있는 로고를 재빨리 훑었고 여자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직원이 한쪽 무릎을 꿇고 힐을 신겨 주었다. 여자는 평생 그런 구두를 신어본 적이 없었다. 싸구려 구두는 신자마자 뒤꿈치의 살을 대팻밥처럼 밀어내고 스타킹에 핏물이 배게 했다. 그런데 이곳의 구두는 마치 라텍스 베개에 발을 올린 것처럼 부드럽게 뒤꿈치를 끌어안았고 볼을 조이지도 않았다. 여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다시 본래의 역할로 돌아왔다.
“왼쪽 구두가 5밀리 정도 더 큰 거 같은데요.”
여자는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매뉴얼대로라면 직원은 일단 죄송하다고 해야 했다. 그 뒤 브랜드의 장점을 부각하는 답이 이어져야 마땅했다. 저희 회사는 천연 가죽만을 쓰기 때문에 인위적인 공정의 맛으로는 느낄 수 없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얘기하는 게 무난한 범위의 대답이었다.
“한쪽 발만 좀 부으신 게 아닐까요.”
직원의 입에서 양치액 냄새가 났다.
대부분의 본사들은 친절과 배려가 이윤과 직결되는 스킬이라고 생각했고 고객 관리의 필수적 요소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딤섬 가게에서도, 백화점의 시계 매장에서도, 사람들은 자꾸 그걸 잊었다. 여자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까다로운 요구를 해야 했고 직원들은 그걸 다 받아들여야 했다. 깨끗하게 닦지 않은 단 하나의 숟가락이나 얼룩을 지우지 않은 화장실 세면대, 현재 시각에 바늘을 맞춰놓지 않은 시계를 지적하는 손님에게 표정관리를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평판이 달라진다는 걸 여자는 믿을 수 없었다. 이토록 사소한 배려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회가 되었는데도 여자는 여전히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게 더 놀라웠다.
여자는 사회복지재단에서 계약직으로 사무보조를 보다가 몇 달 전 해고당했다. 재단의 이사가 저지른 뇌물수수 때문에 지방 신문의 한 기자가 취재를 왔을 때 그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밀린 월세가 급하지만 않았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구두 매장의 남자는 말끔하게 입었지만 밀린 월세나 차 할부금이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무 까다로운 고객들만 상대한 탓에 지쳤을 수도 있고, 얼마 전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거나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아 잠을 제대로 못 잤을 수도 있었다. 여자는 타인의 사정을 이토록 세세하게 배려할 줄 아는 자신에게 다소 감격했다. 무엇보다, 여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직원의 퉁명한 응대가 왠지 자신이 감내해야 할 정당한 시련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의 이마에 한 줄기 빛이 닿는 것만 같아 잠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도 몸에서는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여자는 고급 구두가 든 쇼핑백을 어깨에 멘 채 팀장에게 영수증과 녹음 파일을 첨부한 메시지를 보내며 점검이 끝났다고 보고했다. 팀장은 그것을 확인한 뒤, 내일 구두를 환불해야 하니 흠집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했다.
오전 11시, 여자는 승강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는 길에 그 안에 붙은 광고를 보았다. <올해의 북 페어 : 작가와의 만남, 책들의 축제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 건물 지하 1층에서 열리고 있는 행사였다. 여자는 문득 책을 한 권 사고 싶어졌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고요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독서인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곳이 붐비고 있었다면 여자는 사람들이 많이 사가는 아무 책이나 한 권 사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이곳저곳에 붙은 홍보 전단지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은 휑하기만 했다. 광장처럼 생긴 동그란 터에는 책으로 만든 트리가 계절에 앞서 외롭게 반짝였다. 수십 곳이 넘는 출판사 부스마다 테이블 위에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창백한 표정을 한 출판사 직원들이 스툴에 앉아 불안한 눈빛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그들이 호객 행위를 할까봐 염려스러웠다. 여자는 호객을 버티지 못하는 편이었다. 보고 가요, 먹고 가요 이런 말들에 언제나 걸려들었다. 시식 코너에서 뭔가를 먹으라고 권하면 차마 무시하지 못했고 그걸 먹게 되면 반드시 그 식품을 사주어야 마음이 편했다. 미용실에서 권하는 대로 에센스나 두피 마사지를 추가한 뒤 회원카드까지 만들고 온 적도 여러 번이었다. 여자는 언제나 지나치게 남을 신경 쓴다는 충고를 듣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은 구두를 사셨네요.”
아동 문학 부스를 지날 때 그곳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말을 걸었다. 그 말이 들려온 이상,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다. 쇼핑백을 가리키며 사람 좋게 웃는 그녀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관심 있는 척, 동화책들을 훑어보았다.
“자녀분이 본격적인 학령기에 접어들기 전에 과학에 호기심을 갖게 해 주는 책이에요. 국내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을 그렸어요. 시리즈로 있는데, 한번 보고 가세요.”
'해님이 궁금해요!'라고 적힌 동화책 표지에 눈길을 주자마자 직원이 말을 시작해서 여자는 한참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여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확고하게 전제로 깔고 말했다. 아니라고 할 타이밍마저 놓쳤기 때문에 여자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21권짜리 세트를 모두 펼쳐 보여줄 기세였다.
“저 그럼, 일단 한 권만…….”
여자는 어쩔 수 없이 만이천 원을 주고 그림동화 한 권을 샀다. 어쩌면 아침마다, 방긋 웃는 해와 알록달록한 꽃들을 그린 표지를 보면서 마음이 밝아질지도 몰랐다. 직원은 “사모님 형편 정도 되시면 시리즈로 구매들 하셔요.”하고 부추기며 여자의 주머니에 명함을 밀어 넣었다.
여자는 딱딱한 표지 모퉁이가 구두에 흠집을 낼까 봐 쇼핑백에 책을 같이 넣지 못하고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다른 부스의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걸었더니 사고 싶은 책이 뭔지도 알 수 없어졌다. 모두 똑같은 사각형의 부스들뿐이어서 미로를 헤매는 것 같았다. 그때, '작가와의 만남: 스도만이 말하는 인문학의 경계'라 적힌 입간판을 보았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의 외국 작가가 흑백 사진으로 찍힌 것이었다. 그 너머로 반투명한 부스 안에 스무 개 남짓의 회색 플라스틱 의자가 있는 게 보였다. 무대랄 것도 없이 객석과 같은 높이의 바닥에 갈색의 작은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마이크만 하나 둔 게 전부였다. 입간판과 똑같이 인쇄된 포스터들이 벽에 걸렸고 바닥에는 작가의 것으로 보이는 양장본의 책이 백 권 가까이 쌓여 있었다. 여자는 포스터에 적힌 글귀를 자세히 보았다. 스위스에서 온 작가였고, 여자는 잘 알지 못하는 몇몇 상들을 받았으며 한국에 처음 오는 만큼 한국인 독자와의 만남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여자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40분이었다. 20분 뒤면 행사가 시작될 터였다. 여자는 주최 측의 배려 없는 일 처리 몇 가지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우선, 외국에서 초빙한 작가를 고작 스무 개 남짓의 의자가 놓인 공간에 부른다는 것이 부적절한 대우로 보였다. 인적이 뜸한 평일인데다 점심시간에 스케줄을 잡았다는 것 역시 매우 무례한 일 같았다. 어쩌면 스위스 작가는 한국에 대단히 실망한 뒤 다시는 이 나라에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여자의 가슴 속에서 무한한 부끄러움과 책임감이 솟아올랐다.
여자는 빈자리를 채워주기로 다짐했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스위스 작가가 겪을 비참함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다짐을 굳히자 이번에는 들고 있는 동화책이 신경 쓰였다.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하면서 다른 책을 들고 오는 것 역시 배려 없는 행동이었다. 여자는 스태프에게 말해 바닥에 쌓여 있던 그의 책을 한 권 사서 자리에 앉았다. 임시로 만든 벽면이나 조도가 지나치게 밝은 조명이 신경 쓰였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2시가 되자, 여자까지 합해 일곱 명의 독자가 왔다. 작가의 말투는 느리고 무심했는데 통역을 맡은 남자의 말투는 어조가 높고 속도가 빨라서 그들의 말은 기이한 돌림노래처럼 들렸다. 여자는 통역된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니 뭐니 하는 말들을 다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앉아 있었다. 한 시간의 강연이 끝나자 사회자가 청중과의 대담 시간을 갖겠다며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했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사회자는 어색하게 숨을 고른 뒤, 작가의 책을 가슴팍에 안고 있던 여자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여자는 결국 비자발적으로 손을 들었다. 열혈독자가 아니라는 게 티 나지 않는 적당한 질문을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내내 실패했던 모든 발표의 순간들이 스쳐갔지만 이곳은 낯선 자리이고 낯선 이들과 함께이므로 오히려 괜찮을지도 몰랐다.
“저는, 우리의 스위스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궁금합니다.”
'우리의'는 빼는 게 좋았을 텐데, 하고 여자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자책했다. 작가는 긴 답변을 내놓았다. 여자의 뒤에 앉은 사람이 작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작가는 내내 여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기 때문에 여자는 땀을 흘리며 결박된 듯이 앉아 있었다.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는 일까지 모두 끝났다. 작가는 여자에게 유독 정성 들여 사인을 해주는 것 같았고 사진을 찍을 때에는 여자가 들고 있는 자신의 책에 살짝 손을 올리고 톡톡 두드리기까지 했다. 여자는 그 제스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지만 행사가 끝나자마자 작가는 스태프들과 함께 껄껄 웃으며 사라졌다. 여자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이제 집으로 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타인에게 쏟아부었지만 그저 공허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누군가를 위해 배려를 한 자신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여자는 동화 전집을 파는 부스를 피해 출입구를 찾아 걸었다. 그때였다.
“혹시, 윤이정?”
예술 관련 출판사 부스를 지날 때 누군가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여고 동창이었던 A였다. 여자는 A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다. A는 언제나 반장을 맡았기 때문에 여자의 이름을 가장 자주 불러준 사람이기도 했다.
“긴가민가했는데 점 보니까 기억나. 언제나 창백하던 그 표정도 그대로네.”
A가 여자의 이마를 물끄러미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여자의 학창시절 별명은 윤미간, 윤점 둘 중에 하나였다. 여자는 학기 초마다 친구들이 다가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지던 것을 기억했다. 착한데 부담스럽다고 했다. 친구들은 A도 착하다는 이유로 좋아하고 따랐는데, 여자는 그 차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아, 그래?”
여자는 자비로운 미소를 부자연스럽게 띠었다가 문득 몸을 움츠렸다.
A는 미간에서 시선을 천천히 옮겨 여자가 들고 있는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고급 구두와 동화책과 인문학 책 세 가지만으로 여자의 삶을 압축적으로 직관한 뒤 인사치레로 말했다.
“애도 있고, 교양도 있고, 돈도 있나 보다. 하긴, 너 공부는 꽤 잘했지. 모의고사 성적 보고 엄청 놀랐던 게 기억나거든.”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여자는 A에게 여기는 어쩐 일이냐고 묻는 게 우선일 것 같았는데 이미 그런 말을 할 맥락은 닫힌 뒤였다. 여자는 A가 유명한 미대에 진학했다는 것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그 얘기를 꺼내려고 했다. 대학생활은 재미있었냐는 둥의 평범한 안부 인사를 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한참 지났다는 게 뒤이어 떠올랐다. 평일 오후에 편안한 차림으로 북 페어에 온 걸 보면 달리 직업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여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한꺼번에 기억났고, 이런 대인관계의 매뉴얼을 숙지해 본 적도 없었다.
A는 여자가 입술을 달싹거리는 걸 지켜보다가 답답한 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가끔 궁금하긴 하더라. 어디서 잘 살고는 있나 하고. 애들 모이면 가끔 네 얘기 했었어.”
“그랬어?”
“별 의미는 없고. 근데 넌 나 별로 안 반가운가 봐?”
여자는 동창들과 연락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졸업하면 모두 각지로 흩어져 바쁘게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고 시절, 여자는 모둠 과제나 봉사, 청소 등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앞장섰고, 동아리를 고를 때나 수학여행에서 방을 선점할 때처럼 선택이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양보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윤점은 반장도 아닌데 학급 일에 너무 나선다', '윤미간, 착한 척해서 부담스럽다'라는 말을 듣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느꼈어? 미안해, 진짜. 내가 너무 놀라서.”
“얘는, 농담이야. 그럼, 너 볼일 보고 다음에 또 보든지 하자. 난 여기 자주 와. 이 근처 살거든. 또 마주치는 날이 있겠지, 뭐.”
A가 몸을 반쯤 돌렸다. 약간 일그러진 표정과 엉거주춤하게 흔드는 손짓을 보자 여자는 자신이 반갑게 대하지 않은 게 더욱 마음에 걸렸다. 이런 순간을 그냥 지나치면 두고두고 괴로울 것이 뻔했다.
“잠깐만.”
여자는 A의 팔꿈치를 잡았다. A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그 탓에 여자는 걸음이 꼬여 휘청거렸다. 하지만 여자는 이내 진정하고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연락처를 알아야지, 서로.”
“뭐?”
“내가 폰을 바꾼 지 좀 오래 돼서 애들 연락처가 하나도 없거든.”
그 말에 A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가 내민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천천히 찍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여자는 자신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어주던 A가 기억나 용기가 생겼다. 혼자 급식을 먹던 여자에게 A가 다가와 말없이 함께 밥을 먹던 어느 저녁 풍경도 떠올랐다.
“밥 같이 먹을까?”
“뭐……. 그래, 그러자. 언제 한번 밥 같이 먹자. 그럼.”
A는 웃는 여자를 보며 손을 흔든 뒤 방금 구매한 작품집을 방어하듯 끌어안고 멀어졌다. 여자는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따 시간 언제 돼?'하고 문자를 남겼다. 여자는 밥 한번 먹자고 말하고 약속을 잡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무례하고 무책임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풀이하는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A가 여자에게 보여준 환한 표정과 반가워하던 말투를 곱씹으며 여자는 답장을 기다렸다.
A에게서 답장이 온 것은 여자가 집에 도착하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저녁 8시였다. A는 '너 많이 바쁘지 않아?' 하고 답장을 보냈다. 여자는 부담 갖지 말라는 말로 A가 자신을 배려하는 마음을 다시 배려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바쁘지 않은지에 대해 설명하느라 밤늦은 시각까지 문자를 주고받았고, A를 다음날 6시에 집에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다. A는 '시간이 되면 갈게'라고 한 뒤에도 갑작스러운 방문이 여자의 일상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걱정스럽게 말했고 진심이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여자는 A야말로 자신 다음으로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A가 집에 오면, 고등학교 때 있었던 비누 사건에 대해 꼭 해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들떴다. 일기장에 그 사건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던 데다 틈날 때마다 복기했기 때문에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여자가 다니던 여고의 3층 화장실에서 양변기 세 개가 일주일 내내 막힌 적이 있었다. 야간 자율 학습이 의무였던 때여서 모두 밤 열 시까지 학교 안에 머물렀고 교사용 화장실은 일층에 따로 있었으므로 범인은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였다. 막힌 변기를 뚫으면 항상 연두색의 오이비누가 하나씩 나왔다. 세 개의 세면대에 각각 놓인 공용비누였는데 거의 쓴 흔적도 없는 상태로 변기에서 발견되었다. 같은 사건이 반복되자 짜증이 난 학생들 사이에 범인 찾기 놀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여자가 교실을 나갔다 돌아오자마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화장실에 다녀온 뒤 여자를 힐끔거렸다. 여자는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계단에서 코를 풀고 왔을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범인이 아니라는 의미로 피식 웃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자는 일부러 십 분마다 복도로 나가 큰 소리로 코를 푸는 척했다. 나중에는 코피가 나올 정도였다. “누가 범인인지 진짜 궁금하네.” 하고 짝에게 여러 번 말했지만 방백을 할 때의 상대 배우처럼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여자는 모두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다음 날 여자는 가방에서 반만 은박지로 싼 살구비누를 꺼냈다. 그걸로 자주 손을 씻었고 보란 듯이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 두었다. 작문 시간에는 '비누'를 주제로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자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했지만, 친구들은 점점 노골적으로 여자를 의심했다. 결국 여자는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한 번도 화장실에 가지 않는 방법을 택했고, 소태에 걸렸다.
다음 날 오전 10시, 여자가 구두 매장에 들르자 직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환불 처리를 했고 황급하게 돌아서는 여자의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순간 여자는 돌아서서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처 휴대폰을 숨기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미안해요.”
여자는 속삭이듯이 뱉었다. 울먹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직원은 굳은 표정으로 여자를 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건물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팀장에게서 캡처된 사진 한 장과 함께 '이것도 같이 본사에 보낼 건데 사진에 나온 사람이 이정 씨 맞는지 확인해 줘' 하고 문자가 왔다. 누군가 SNS에 올린 사진과 글이었다. '갑질 손놈 다녀감. 진상으로 하루 시작'이라는 글과 함께 여자가 쇼핑백을 메고 나서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교묘한 각도로 찍어 로고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손님 대신 손놈으로 불린 여자는 자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자가 집에 도착한 시각은 1시였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많은 것들을 고려하느라 숨도 제대로 뱉기 힘들 만큼 지쳐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그때까지 몸에서는 어떤 울림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여자는 A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좁고 경사진 골목을 올라오기 힘들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달쟁이길'과 '다랭이길'이 헷갈리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편집했다. 지도를 다운 받아 성범죄자가 사는 집과 사냥개를 키우는 집에 동그라미를 쳤다. 여자는 그 모든 것을 8쪽짜리 디지털 가이드북으로 만든 뒤 '오래된 우정의 초대장'이라는 제목을 붙여 A의 SNS로 보냈다. A가 '오래된'이나 '우정'이라는 표현에 신경 쓸까 봐 장문의 톡을 보내 사전적 의미 이상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사전적 의미'나 '그 이상은 아니다'라는 표현이 냉정해 보여 다시 긴 주석을 달았다. 그때마다 A는 똑같은 이모티콘으로 답장을 보냈다. 퀭한 눈의 판다가 대나무를 우적우적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호스트는 게스트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당연한 도리였다. 여자는 복지재단에서 일할 때 동료네 집에 집들이를 간 적이 있었다. 아무도 자신의 외투를 받아 걸어주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그 동료가 욕을 먹을까봐 대신 나섰다. 손님들이 새로 올 때마다 여자가 그들의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주었고, 혹시나 주머니에 든 물건이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내용물을 미리 확인받았다. 음식이 부족할까봐 자신은 적게 먹었고 술에 취한 동료들이 화장실을 쓰고 나올 때마다 가서 뒷정리를 했다. 그 후로 상사들은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자를 초대했다. 하지만 동료들은 아무도 여자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여자는 A를 초대한 오후 6시의 애매함도 놓치지 않았다. A가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에 따라 각각 다른 메뉴로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대접을 해야 할 것이었다. 점심에 돈가스를 먹었다면 오후 여섯 시에 피자나 치킨이 먹고 싶을 리가 없었다. 김치찌개를 먹었다면 초콜릿이나 비스킷, 셔벗도 괜찮을 것이었다. A가 비건일 경우를 고려해 아몬드 우유에 케일과 사과의 비율을 맞춰 가며 음료를 만들어 보았다. 냉장고 안의 냄새가 사과에 얼마나 배여 있는지도 확인했다. A가 큰 소리로 웃을지도 몰라 이웃들에게 미리 시끄러울 수도 있다고 문자를 넣어 알렸다. 이웃들은 여자가 평소에 그 어떤 소리도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만으로도 놀라워했다.
여자는 A의 발소리를 상상하며 슬리퍼를 샀다. 여자는 언제나 발꿈치를 들고 걷기 때문에 슬리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여자는 새벽에 결코 변기 물을 내리지 않는 타입의 교양인이었다. 영의정의 화선지 위에 문진을 내려놓듯이 현관문을 닫았기 때문에 아무도 여자가 언제 집에 오는지 몰랐다. 여자는 그런 삶을 당연한 듯이 살았다.
여자는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아무리 피곤해도 눈을 감지 않는 사람이었다. 행여나 노인이나 임산부가 앞에 서 있는데도 보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일부러 자는 척하는 무심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었다. 어쩌다 잠이 들면 여자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양보한 뒤 “제가 자는 척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피곤해서 눈을 감고 있었던 겁니다.” 하고 정중하게 설명했다. 상대가 고개를 갸웃하면, '몸이 피곤해서'를 이해시키느라 애를 썼다. 그랬는데도 상대가 입을 꾹 다물고 짜증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지 곱씹고 또 곱씹느라 내릴 곳을 놓치곤 했다.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여자는 동네 만두 가게의 유일한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여자의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 있는 그 가게에는 언제나 손님이 없었다. 만두피가 너무 질기고 만두소에서 누린내가 났다. 여자는 비쩍 마르고 손톱이 새까만 일흔의 노인에게 차마 만두가 맛없다고 말하지 못했다. 노인은 정말 성실하게 만두를 만들었다. 새벽 4시부터 고기를 다지고 부추를 씻고 양파 껍질을 벗겼고 밀가루를 직접 반죽해 피를 빚었다. 그리고 그 고생을 여자에게 모두 하소연했다. 여자는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다고 하며 포장도 해달라고 말했다. 노인은 여자의 손을 감싸 쥐고 “고맙네, 고마워.”하고 훌쩍거렸다. 오후에는 가게 앞에서 내내 기운 빠진 얼굴로 서 있다가 퇴근하는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구부정한 다리를 휘청거리며 달려가 덥석 손을 잡곤 했다. “오늘도 개시를 못 했네.”하고 눈물을 글썽이면 여자는 씩씩하게 웃으며 “제가 해드릴게요.” 하고 가게에 들어가 만두를 주문했다. 노인은 맞은편에 앉아 여자가 먹는 모습을 내내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테이블은 미끈거렸고 다진 고기에 배인 기름은 잇몸을 흠뻑 적셨다. 여자는 물컹거리는 단무지에 식초를 많이 뿌려 먹었다. 노인이 자신을 보며 행복해 하는 걸 볼 때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그것은 맛없는 만두를 먹는 일을 상쇄할 만큼 괜찮은 것이었다.
여자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삼겹살을 먹은 날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전에 한 시간을 배회하며 옷에 배인 냄새를 빼는 것까지 포함해 세상에는 배려하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미시적인 세계에는 한번 발을 디디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여자는 갈수록 더 세밀한 것들을 보았고 그래서 더 촘촘하게 상처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무심해지는 것 같았다.
3시부터 5시까지, 여자는 욕실과 베란다와 수도꼭지를 꼼꼼히 물청소 했고 침구의 먼지를 털었다. 건조대에 걸린 아직 덜 마른 속옷들을 치우고 신발장에 탈취제를 뿌렸다. 냉장고에 붙여 놓은 배달음식 쿠폰들을 떼어내고 거실에 아로마 향초를 피웠다. 해야 할 일에 비해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으므로 여자는 더욱 분주히 움직였다. 지나치게 깨끗이 청소한 것에 A가 어색해할까 봐 다시 적당하게 물건을 흩트려 놓았다. 땀이 나서 샤워를 한 뒤, 목욕재계한 것에 A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머리를 오래 말렸고 환기를 시킨 뒤 욕실의 수증기를 닦아냈다. 케일의 숨이 죽지 않도록 이제야 다듬었다. 오이비누에 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졸업 앨범과 일기장을 펼쳐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정한 것으로 보이지 않게 그 옆에 스위스 작가의 책도 갖다 놓았다. 두 장도 정독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내용이었는데, A가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면 스위스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길게 설명해 줄 자신은 있었다. 어쨌든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변기에 비누 따위를 넣을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걸 꼭 알려주고 싶었다. 그 여고를 졸업한 누군가가 아직도 '그때 그 오이비누 사건이……' 하며 자신을 떠올릴 거라 생각하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배려하며 살아온 선한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A가 오기로 한 시각까지 30분이 남았을 때 여자는 집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있었고 공기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으며 습도도 온도도 적당했다. 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식탁 의자에 앉아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다. 태양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는 꽃들이 화사한 색감으로 그려져 있었다. 해바라기, 채송화, 백합, 민들레…….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여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꽃들이 알록달록한 점이 되어 어둠 속을 고요하게 떠다녔다.
눈을 뜨자, 밤 8시가 넘어 있었다.
여자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으며 벌떡 일어났다. 심장에 구멍이 난 것만 같은 감각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그 구멍으로 차디찬 바람이 지나갔다. 여자는 몸을 움츠린 채 부들부들 떨다가 몇 번이고 구토를 했다.
그날 밤부터였다. 여자의 뼛속에서 윙윙 하는 울림이 시작되었다. 여자는 진도 2의 지진이 난 줄 알았다. 소리는 점점 혈관으로 번지더니 몸 밖으로 빠져 나가, 벽을 쿵쿵 두드리는 정도의 진동으로 커졌다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쾅! 하며 소리가 피부 밖으로 뛰쳐나왔다. 여자는 이 모든 현상을 인지하지 못하는 척하며 그 밤을 견뎠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여자의 몸에서 소리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몸에서 나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소리는 난데없이 뚝, 멎어 여자를 안심하게 만들었다가 놀리듯이 몇 배로 볼륨을 키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여자는 알지 못한 채로, 발만 동동 굴렀다. 이웃들이 현관문을 세게 닫는 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그것이 자신에게 보내는 항의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음악의 진앙이 되어 속수무책으로 온통 흔들리기만 했다. 소리가 불현듯 더 커진 밤이면 뒤꿈치를 든 채 밖으로 달려 나가 노래방 간판 아래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온몸에 머드팩을 바르거나 두꺼운 옷을 입어도 소용없었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오래 전에 여자는 온갖 종류의 상담 치료들을 경험해 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최면술사, 점성술사, 임상심리전문가와 무당 앞에서조차 그들이 자신의 직업적 소명을 의심하지 않도록 애를 써주었다. 전생에 한 많은 하인으로 살았던 척했고 물고기자리의 예민한 성정 탓이라는 해석에 동의해주었다. 죽고 싶을 때가 있느냐는 질문에 종종 그러하다고 체크했고 불타 죽은 조상이 여럿 있다고 대답했다.
A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자는 음성 메시지를 일곱 개째 남기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믿어주지 않을 것이었다. 오래 전의 그 오이비누가 먼 길을 걸어 여자를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자는 어둠 속에서 어둠이 된 척 오랫동안 서 있었다. 뼛속 깊은 곳에서 여자의 울음이 음악처럼 흘러 나와 까만 방을 채웠다.
도대체 이 도시의 타인들은 어떻게 서로를 세심히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으며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여자는 언제나 그것이 궁금했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음악은 대체 무엇일까”
심사평 - 단편소설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먼저 든 생각은 소재는 각기 다르지만 다들 코로나 시대를 힘겹게 건너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네'는 단아한 문장과 잔잔한 서술이 인상적이었는데 왠지 소품에서 멈췄다는 느낌이다. '임플란트'는 이야기에 힘이 있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여덟 개의 치아가 새롭게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통증'은 모든 것을 통계적으로 사고하는 주인공이 돋보였다. 묘한 것은 수치로 사고하는 세계에도 허점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심으로 가득한 사람이 있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미스터리 쇼퍼다. 그녀의 몸에선 언젠가부터 정체 모를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음악은 대체 무엇일까? '오후 여섯 시를 위한 배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전상국·김도연 소설가 가라앉는 중이었던 나를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감사” 당선소감 - 단편소설 “가라앉는 중이었던 나를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감사” 당선소감 - 단편소설 2021-1-4 (월) 29면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는 짐을 경매에 부치는 나라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누구도 손을 들지 않는 가방이 되어 가라앉는 중이었다. 아무도 건져주지 않는 돌의 그늘처럼, 아무도 울고 가지 않는 무연고의 묘비처럼. 입장을 거절당하는 꿈만 꿨다. 어둠도 빤히 바라보면 눈이 먼다. 언어를 건져야 할 때는 코끼리를 생각했다. 태종13년에, 자신에게 침을 뱉은 공조판서를 밟은 죄로 유배를 떠난 코끼리를. 코끼리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는 막막한 섬에서, 풀을 삼키고 볕에 기대었을 그 고독을 생각하면, 말이 고였고 흘러 나왔다. 흐르는 것을 썼을 뿐인데 등뼈가 하얗게 바랜 것만 같다. 이제, 이름이 불리었으니 꽃이 되어야겠다. 손을 들어 가져가는 가방이 되어야겠다.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 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지은(39) △경북 안동시(경북 청송군 生) △독서지도 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