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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1542년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과 안동김씨 김광수의 딸인 김소강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류성룡의 호인 서애는 고향이 하회마을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곳을 사랑했던 이유로 서애라는 호를 자호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 류중영은 예조참의를 지냈던 문신 관료 출신이어서 류성룡은 이미 집안에서부터 뛰어난 학풍을 물려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에 있었다.
또 류성룡은 4살 때 글을 깨우쳤다고 하니까 상당히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안동에서 지내다가 당시 조선의 최고 학자인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시며 공부하였다.
류설룡은 책을 한 번 읽으면 한 글자도 빼먹지 않고 전부 외워버렸다.
퇴계 이황 역시 류성룡을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라며 높이 평가했다.
또 류성룡은 어릴 적 한양으로 올라와 지냈는데, 이 때 충무공 이순신이랑 세 살 많은 동네 형이자 인생의 지도자로 서로 친밀하게 지냈다.
류성룡이 한양에서 살 무렵에는 충무로라는 곳에서 살았다.
지금도 충무로에 가면 ‘서애길’이라는 길이 있고, 그곳에 류성룡의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류성룡은 23살이 되던 해 생원 진사시 시험에 합격해서 명성을 알렸고, 25살이 될 때에는 문과를 급제해서 벼슬길에 올랐고, 28살에 공조좌랑이라는 자리에 올라서 파격 승진을 하였다.
류성룡이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선조의 즉위와 함께 갓 집권한 사림파가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는 시기였고, 류성룡도 당쟁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는 상대적으로 이황과 조식의 제자가 많았던 동인에 속했다.
정여립의 난과 관련된 기축옥사와 관련한 당파싸움 속에 있었는데, 류성룡은 원만한 처신과 선조의 비호로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의 영수 정철이 세력을 잃고 관직에서 물러나자 이후 서인에 대한 처우로 동인이 이산해, 정인홍이 이끄는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하게 된다.
이때 류성룡은 남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이 무렵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이 되었다.
그러다 류성룡 인생에 극적인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 분열되어 있던 일본의 땅을 하나도 통일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국정을 총괄하는 관백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일본 최고 계급인 쇼군은 될 수 없었다.
미천한 출신이라 절대로 쇼군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12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쇼군이 일본을 통치하는 막부시대였다.
이 당시 천왕은 상징적 존재일 뿐 실질적인 최고 권력은 쇼군에게 있었다.
그래서 도요토미가 쇼군이 되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뒤 개선장군이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정세도 파악할 겸 일본에 조선 통신사 두 명을 보냈는데, 도요토미를 만나고 돌아온 통신사는 서로 ‘도요토미의 눈에 광기가 가득하여 분명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다.’ ‘일본이 허세에 찌들어 있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정반대의 의견은 갖고 왔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친다는 헛소문을 조선에 퍼뜨렸다.
이런 말에 왕과 신하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200년간 조선에는 전쟁이 없어서 국방력은 최 하위수준으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10만 군대를 훈련 시키자는 10만 양병설도 있지만 그 돈으로 백성들 세금 부담을 줄이자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때문에 조선은 일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류성룡에게 해답을 얻고자 했다.
일본을 심상치 않게 본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재빠르게 군대를 양성하고 정읍현감으로 있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임명하게 된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언제나 대장 역할을 할 만큼 기개와 지략이 뛰어났다.
류성룡은 이를 알아보았기 때문에 이순신을 추천한 것이다.
이순신은 성을 버리고 적을 쫓아서 파직을 당했지만, 류성룡은 집요하고 용맹하다. 라고 생각하며 무인의 재능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호조 정랑이었던 권율을 추천해 5품계를 건너뛰어 의주 목사가 되어 의주를 지키게 했다.
그러다 1592년 7년간 이어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이 터진 후 20일 만에 한양까지 함락당했지만, 선조는 급히 류성룡을 영의정이자 도채찰사로 임명한다. 그리고 의주로 도망을 가고, 이순신 덕분에 일본에서 조선으로 가는 일본의 지원이 끊어지게 된다.
류성룡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조선은 진작 망했을지도 모른다.
또 백성들을 동원해 군량미를 확보하고, 의병들의 활동을 지원하여 조선이 전쟁을 극복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류성룡은 명나라 파병을 요청할 외교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명은 일본이 너무나 빠르게 조선을 치고 올라와 조선과 일본이 손을 잡은 것이 아니냐. 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명의 의심을 풀기 위해 류성룡은 일본군의 동향이 한눈에 보이는 평양성으로 명나라 관리를 부른다.
왜군의 진지를 직접 본 명의 관리는 의심을 풀고 조선에 군사를 지원하였다.
류성룡은 평양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평양성이 일본에게 함락당했을 때 평양성의 공략 지점을 공격하여 평양성을 되찾는다.
그리고 한양을 되찾으러 가는데 겨울이라 얼어 있어야 할 임진강이 녹아 있었다.
단시간에 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류성룡은 통나무, 배도 없는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칡 덩굴로 질긴 다리를 단 하루 만에 다리를 만든다.
하지만 일본은 한양만큼은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군대를 많이 배치하고 있었다.
또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빨리 공을 세우고 싶다는 욕심이 만나 아직 군대가 모두 도착하지 않은 상태로 움직여 한양 외곽 벽제관 전투는 대패하고 만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다시 조선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지만, 행주산성을 지키고 있던 권율 장군이 행주 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군을 한양에서 철수하게 만든다.
한양을 되찾은 류성룡은 거리엔 시체가 가득하고, 왕실의 근간인 종묘마저 불타버려 명군에게 일본을 추격해 달라고 지원을 한다.
하지만 명의 제독 이여송은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를 해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몰래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는 대신 명군이 일본이 남쪽으로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게 돕겠다는 강화를 맺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류성룡은 충격으로 병져 눕게 된다.
이런 류성룡을 선조가 훈련도감의 총책임자로 임명하게 된다.
이곳에서 최신무기 조총을 사용할 줄 아는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류성룡은 훈련도감의 여러 문제들을 극복하고 강력한 조총부대를 이루게 한다.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연달아 이순신의 동료 장수인 원균의 질투 때문에 이순신을 모함하기도 하고, 또 일본군이 가짜 정보 만들어 조선에 소문을 낸다.
하지만 이순신은 거짓 정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속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일본군과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연행되었다.
이순신이 연행되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류성룡은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순신을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순신이 벌을 받고, 감옥에서 나올 때 류
성룡이 달려가 밤세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원균이 일본군에게 대패를 하여 300척이 넘던 배가 12척으로 줄어버린다.
그래서 이순신은 겨우 하나 더 구한 13척의 배로 물살을 이용해 133척인 일본 배를 이긴다.
오랜 전쟁으로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고, 다른 대신들도 충분히 해낼 것이라고 본 것이다.
평소 류성룡을 아니꼽게 본 대신들은 이때다 싶어 이기적인 영의정은 탄핵을 시켜야 한다, 조선을 위기로 내몬 것은 류성룡이다. 라는 말들을 사소문에 적어 3개월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올렸다.
결국 계속되는 신하들의 압박에 류성룡을 그렇게 아끼던 선조는 류성룡을 파직시킨다.
게다가 파직되던 날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었다. 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류성룡은 이순신의 죽음에 애통하며 이순신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애이통제라는 시를 썼다.
류성룡이 낙향 5년째 되던 해 선조는 류성룡을 부원군으로 복직시켰지만, 곧바로 사직했다.
다음 해 선조는 류성룡을 호성공신 2등에 책봉했지만, 류성룡은 이 역시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내리는 문서인 공신녹권에서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공신들의 초상화가 필요해서 류성룡에게 화공을 보냈지만, 류성룡은 이 또한 거절한다.
류성룡은 그렇게 은퇴한 뒤 징비록과 침경요결을 집필했다.
징비록은 징계할 징, 삼갈 비자를 써서 지난 잘못을 경계하고 반성한다. 라는 뜻이다.
그 징비록에는 임진왜란의 고통을 겪게 된 것은 자신과 같은 조정 대신들의 잘못이다. 라며 속죄하는 마음으로 징비록을 썼다.
평화에 젖어 지난날을 잊지 않도록 참혹했던 전쟁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 징비록이다.
후세들은 이런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징비록을 적었다.
침경요결은 침과 뜸을 놓는 법을 알려주는 의학책인데 선생 자신의 건강에 대한 염려도 있었고, 전쟁이 끝나고 힘든 백성들이 쉽게 고통과 아픔을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침경요결을 집필했다.
서애 선생이 집필할 당시는 침구요결이라고 불렸지만, 목판으로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침경요결로 불리게 되었다.
내용은 침과 뜸을 이용해 그 당시 만연했던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병명과 질환에 따라 침과 뜸의 사용법을 알려준다.
침은 비용이 적어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한자를 몰라 의학 지식이 없는 백성들도 알기 쉽게 집필했다.
서애 선생은 어려운 의학 인문을 간소화해서 백성들의 이해를 도왔다.
그리고 쉬운 한글로 번역하려고 했었다.
고향 사람들 가운데 침을 아는 자의 도움을 받아 침경요결을 저술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던 선생이었던지라 의학서를 가까이했지만, 훗날에는 이 같은 지식을 이용해 질병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선조 40년 류성룡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66세 나이로 타계했다.
병산서원 옆에 낙동강 물이 흐르는데 그 강물과 서원 사이 산이 있다.
그 산이 서원을 잘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병풍 병자를 써서 병산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하회마을이 등재가 될 때 병산서원도 같이 등재가 되었지만, 2019년 대한민국에 9개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때 또다시 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어 총 2번 문화유산에 등재가 되었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서원이 성리학의 가치에 부합하는 지식인을 양성했다는 점이다.
병산서원은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온 풍산류씨 가문의 서당인 풍악 서당이었지만, 1575년 서애 류성룡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에 의해 서당은 불태워졌다.
병산서원은 1607년 서애 류성룡 선생이 타계하자 류성룡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614년 류성룡 선생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 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뜻을 모아 사당인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하면서 병산서당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러다 1863년에 임금이 이름을 지은 사액이 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20년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현) 호계서원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9년 뒤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서 모셨으며, 류성룡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한 병산서원은 고종5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려 전국에 600개가 넘던 서원이 47채로 줄었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강당은 1921년, 사당은 1937년에 각각 다시 지어졌다.
서원의 구조는 단순하다.
공부를 하는 곳인 강학공간, 선현을 모시는 제향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에서는 항상 그 뜻을 기리는 학자가 있기 마련이고, 그 학자에게 제사를 지낸다. 아름다움을 끼고 있으면서 위에는 류성룡의 뜻을 기리는 유서 깊은 곳이다.
또 병산서원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교육기관으로써의 명맥을 이어 나가는 곳이다.
후학들이 돈을 모아 안동시 풍산읍에 풍산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공식적인 후신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 입구는 복례문이라고 적혀있다.
예를 회복하다 라는 뜻이 있으며 예를 회복하다 라는 뜻으로 일일극기복례라는 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극기복례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한다. 라는 뜻이다.
그래서 복례문은 예의 중요성을 문에다가 새겼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문의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광영지는 복례문과 만대루 사이에 있는 부속 정원이다.
이름은 주자의 관서유감 시의 ‘천광운영공배회’에서 따서 지었다.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라는 뜻이다.
마음을 닦고 학문에 정진하도록 배려한 정원이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두근 섬이 있는데 이를 천원지방이라고 한다.
그런 전통적인 천원지방 형태의 연못으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옆에 심어져 있다.
복례문을 열고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만대루라는 커다란 누각이 나온다.
한반도 건축의 특징은 자연의 부재들을 가공없이 그대로 활용하여 최대한 손을 덜 대서 만든다.
그래서 만대루를 받치고 있는 36개의 나무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이 가해진 맛을 최대한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그중 18개의 나무는 휘어진 상태 그대로 두고 만들었다.
만대루의 이름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인 ‘백제성루’에 나오는 구절 ‘취병의만대’에서 따왔다고 한다.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늦은 오후까지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다.
자연미와 인공미가 갈라진 그 사이에 만대루가 위치하고 있다.
만대루의 역할은 행사를 한다거나 유생들의 모임, 또는 휴식 공간이자 학교의 강당 역할을 했다.
병산서원은 마주보고 있는 강산을 건축적으로 끌어안아서 자연공간을 건축공간으로 전환 시켰는데,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건물이 만대루이다.
밖에 있는 아름다움을 안으로 끌어들여 그 풍경을 빌려 오는 것이 ‘차경’이라고 한다.
이것이 한국 미술이 기본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예술적 특징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바깥의 아름다움을 자기가 살고 있는 내부 공간에 풍경을 재현하여 그것을 하나의 묘사풍으로 만들어 즐긴다.
심신 단련을 위해 경관을 중요하게 여겼던 서원인데, 만대루는 그런 경관과의 연결을 더욱 운활하게 만들어 준다.
2020년 만대루는 대한민국의 보물 제2104호로 지정되었다.
만대루를 지나면 병산서원이라는 현판이 나오며 앞마당인 정료대가 나온다.
이 정료대 좌우로 기숙사가 두 개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기숙사는 동재(동직재), 서쪽에 있는 기숙사는 서재(정허재)라고 한다.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두 건물은 똑같이 작은 방 2개와 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쪽에 작은 방은 학생회장격인 유사(有司)
의 독방이거나 서적을 보관하는 장서실이었다.
병산서원의 강의실은 입교당이다. 설 립에 가르칠 교자를 써서 가르침을 세운다는 뜻으로 지었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입교당은 마루에 해당하는 강학당과 양쪽 온돌방 협실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아 협실은 교사들이 지내는 곳으로 각각 왼쪽엔 명성재와 오른쪽엔 경의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명성제는 원장실, 경의재는 부원장실에 해당한다.
사당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내삼문은 정면 3칸 규모의 솟을 형태의 문이다.
내삼문 중앙 두 기둥에 주역의 8괘를 그려 놓았는데, 병산서원 측에선 이를 ‘서애 선생의 일상과 그 시기에 시대적인 분위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였다.
내삼문의 붉은 색칠은 신성한 사당에 부정한 것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입교당을 지나 내삼문을 거쳐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시는 사당인 존덕사가 있다.
본래 서당이었던 이곳을 서원까지 끌어올린 역할을 한 건물로,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므로 추가로 담장을 둘렀다.
덕을 존중하는 사당이라고 하여 제사를 지내며 그만큼 결속력을 높이는 것이다.
존덕사는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가 보관되었던 사당이다.
하지만 존덕사에는 류성룡 선생의 영정이 없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때 일등 공신에 책봉이 되면 나라에서 화원들의 보내어 공식 공신 화상을 그려오게 한다.
하지만 류성룡 선생은 이를 거부한다.
나라가 힘든 상황에 나 혼자 빛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뜻을 이어받아 존덕사에는 영정 없이 위패만 보관을 하고 있다.
존덕사 왼쪽에 위치한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다.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는 판문을 세웠으며, 화마를 피하기 위해 다른 건물들과 거리를 두었다.
존덕사 오른쪽에 있는 전사청은 존덕사에서의 제사에 사용하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던 건물이다.
보통 사당과 진사청은 같은 구역에 위치하지만, 병산서원은 존덕사와 전사청이 개별적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는 고직사와 중심을 맞추어 지휘를 쉽게 하기 위한 곳이라고 한다.
전사청 앞에 있는 곳이 고직사이다.
서원 관리인들이 거주하던 네모난 건물이다.
묘지기, 장무. 정지지기등이 거주하였으며, 향사제 기간 동안 참가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부엌과 침실 등이 위치한 생활형 건물이며, 출입문인 일각문과 고직사와 연결되는 쪽문 하나가 있다.
달팽이 뒷간은 고직사 밖에 위치한 화장실이다.
이름을 뒷간의 모양새에 따라서 지었다.
짆흙 돌담이 시작 부분이 끝부분을 가리도록 감아 쌓았는데, 이는 출입문을 달지 않아도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이 사용하던 공간은 아니었고, 고직사에 거주하던 일꾼들이 사용한 곳이다.
유생들의 화장실은 서원 밖에 2칸짜리 화장실이 있다.
이 화장실은 일어서면 옆에 사람이랑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앉으면 서로 보이지 않는 구조이다.
이 공부를 하며 배운 점은 류성룡 선생을 공부할 때 내가 류성룡같은 사람이면 정말 재밌겠다 싶었다. 난 왜 이것밖에 안될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말 중에 형들과 대화를 하며 정리된 것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던간에 그것을 내 마음껏 사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