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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에 여행을 가게 될 안동의 여행지 중 도산서원을 맡아 발표를 하게 되었다.
주로 도산서원이라는 공간 보다는, 그 공간에 얽힌 퇴계 이황과 이황의 사상인 성리학을 중점으로 공부하여 발표를 준비하였다.
먼저 도산서원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말년에 조정에서 물러나며 직접 설계하고, 하나하나 만들어낸 도산서당에서 시작되었다.
도산서당은 우측 상단에 보이는 사진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그리고 그 앞에 전각 하나까지가 이황이 만든 부분이다.
도산서당은 이학이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조성한 공간으로, 조선의 가장 기본적인 건축 구조인 세 칸 짜리의 작은 건물이다. 물론 왼쪽으로 반칸짜리 주방 공간과, 오른쪽으로 공부 하는 마루 공간을 넓혀놓았으나, 이는 본체에 연결되어 있는 임시적 공간일 뿐 세 칸 짜리 전각이라는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도산서당 내부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은 뻥 뚤려 있는 듯한 모습을 자아낸다.
다른 건축에서는 대문을 지을 때 꽉 막힌 듯한 문을 사용한다면, 도산서당에서는 유정문이라는 이름의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조촐한 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진흙 속에서 자라지면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군자의 삶을 의미하는 정우라는 이름의 작은 호수 뒤로는 아예 담벼락이 끊겨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도산서당은 지붕이 낮은 대신, 처마가 짧게 뻗어 있는 건축적 특징 또한 띠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본다면, 도산서당을 직접 설계한 이황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황은 가능한 자연이 지니고 있는 풍경을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건축 구조를 사용했다. 또한 정우와 유정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직접 이름을 지어주며 자연 속에 학자의 공간을 조성하였다. 정말 '자연 친화적이다.'라는 표현에 너무나 어울리는 전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도산서당을 표현하는 말로는, 세 칸 짜리 가장 단순한 전각에 삼라만상을 담았다는 말이 있다.
농운정사는 위에서 봤을 때 공부 할 때 '공'자의 모양으로 지어진 건물로, 이황의 제자들이 주거하고 학문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시로서는 특이한 건축 양식을 띠는 만큼, 이황의 자연과 합일하는 건축 정신에 따라 많은 창문이 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황이 죽고 4년 후인 1574년, 그의 제자들과 유림(유학을 하는 학자)이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당 터 뒤로 사당과 서원 채들을 새롭게 세웠다. 그중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전교당과 상덕사가 있다.
싱덕사는 현재의 강당과 같은 공간으로, 학생들이 모여 토론하고 공부하던 곳이다. 보통 학교에서는 높은 사람이 주거하는 건물일 수록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도산서원에서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전교당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역시 이들의 가치관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상덕사는 전교당의 우측 뒤편에 위치한 사당으로, 도산서원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각이다. 그리고 이곳은 이황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이에 대한 제자들의 존중이 나타나는 건물이기도 하다.
전교당은 네 칸 짜리 전각이라는 이상한 양식의 건축물이다. 조선에서는 주로 전각을 지을 때 홀 수 칸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현판을 가운데 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교당은 네 칸으로 지어졌는데, 그 이유는 우측의 상덕사에 정문을 막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죽은 스승을 기리는 제자들의 마음이 이런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575년에 선조가 도산서원에 사액한 한석봉 글씨의 현판에 에피소드는 당시 도산서원의 위명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선조가 도산서원에 현판을 사액하기 위해 한석봉을 불렀으나, 그가 부담을 가질 것을 염려해 현판의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은 채로 원, 서, 산 자를 순서대로 쓰게 시킨 뒤, 마지막에 도 자를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석봉은 마지막 도 자를 듣는 순간 이 현판이 도산서원임을 알고 깜짝 놀라 손을 벌벌 떨며 마지막 도 자를 썼다고 한다.
2019년, 도산서원은 한국의 8개의 서원들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시사단은 도산서원의 앞에 위치한 섬이다. 현재는 육지와 연결되었으나, 한때는 댐의 건설로 인해 도산서원과 함께 잠길 뻔 했었던 일도 있었다.
이제부터 퇴계 이황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 한국 나이 70세에 사망하였다.
직업은 조정의 반복되는 불음으로 인해 여러 관직을 맡았었으나, 사실상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하다.
호는 본인이 관직을 내려놓고 고양으로 돌아와 고향의 이름인 토계에서 토를 퇴로 바꾸어 직접 지은 것이다.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501년 어머니가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 오는 태몽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
같은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집안 살림이 어렵지는 않아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이황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이황이 형과 같이 놀다가 형이 상처를 입었는데, 이때 형은 울지 않음에도 이황이 펑펑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에 어머니가 이유를 묻자, 이황은 "형님은 커서 울지 않지만,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어려서 부터 독서를 즐겼고, 열 두 살이 되던 해에 숙부인 송재 이우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인물인 주자와 좋은 시를 쓰던 도산명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논어를 공부하였으며, 특히 주역 공부에 열중하다 그만 건강을 잃었다고 한다.
1528년 소과에 입격하고 1533년 성균관에 입성해 공부했으며, 같은 해 노수신을 만나 조광조라는 당시 유명한 성리학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귀향 도중 오랜 친구과 될 인연인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고 한다.
그리고 1534년 과거에는 세 차래 떨어진 끝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계에 입성하게 된다. 이황 정도 되는 인물이 과거에 세 차래나 떨어졌다는 점이 의외였으나,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1543년 승진을 거듭하던 와중, 대뜸 성묘를 핑계 삼아 사직 후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아마 이맘때 즈음 부터 조정의 일에 회의감을 느끼고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하였던 듯하다.
그러나 1545년 조정에서 다시 부르는 바람에 홍무관 전한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점차 조정의 일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던 와중,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인 을사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는 본래 파편 윤씨 집안의 세력다툼이었으나, 이들 대윤과 소윤의 싸움이 조정까지 번져 사화를 이루게 되었다.
1544년 증종이 승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대윤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소윤의 핵심 인물인 윤원로를 유배보낸다. 그러나 이는 소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종이 재위 8갸월 만에 승하여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파와 손을 잡았던 문정황후가 대윤파 인물들을 모조리 숙청한다. 있는 명분 없는 명분 모조리 다 갔다 대 죄를 늘리고, 이를 통해 연관된 인물들은 모조리 휩쓸렸다고 한다.
을사사화가 사화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당시 조정에 있었던 학자들, 사림이 문정황후의 행동에 잘못을 지적하는 간언을 하다 그만 덩달아 휩쓸려 여럿 목이 날아가 버렸다. 사림이란 성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로, 이황 역시 사림 학자이다.
이황 또한 을사사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황은 을사사화의 역신이었던 김저와 같은 무리로 탄핵 당하고 파직 되었다. 그러나 이후 누명임이 인정되며 조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황에게 있어 을사사화가 크게 와닿았을 부분은 다른 일이었다.
1548년 이황과 같은 조정의 학자였던 형 이해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갑산으로 유배를 가던 도중 양주에서 병사하게 되었다.
아마 이황은 조정의 신하들이 스스로의 악한 감정에 휘둘려 일을 벌였을 때 어떤 사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톡톡히 경험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 중요도를 자각하는 과정 중의 하나였으리라 상각한다.
이황은 1548년 경상도 풍기군수를 지내며 명종에게서 친필 사액을 받아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들었다. 왕이 직접 현판을 사액한다는 건, 왕이 인정한 서원이라는 의미이다. 이황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든 일은 차후 사림의 후학들에게 있어 최초의 사액 서원이라는 모범 선례가 되었다. 이는 사림이 서원을 통해 번창하는 계기가 되었다.
1552년 몇몇 관직을 지내던 이황은 시독관에 임명되어 왕에게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황은 평생 성리학 이외 도교, 불교 등의 학문을 배척하였다.
1553년 이황은 몇몇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후 이황과 조정 사이의 관계는 계속되는 임명과 거절의 반복이었다. 이황은 한평생 총 140여개의 관직에 임명되었고, 그중 70여개의 관직을 거절하였다. 이황이라는 대학자를 데려오려는 조정과, 자신의 학문에 전념하고 싶은 이황 개인 간의 일종에 사투랄까. 1559년, 마침내 이황은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며 낙향하였다. 동지중추부사란 나라에 단 8명 뿐인 관직으로, 일종의 명예직과 같은 것이며 자택 근무를 보장해준다.
1560년 이황은 직접 설계한 도산서당을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 세웠다. 그곳에서 여태껏 관직에 머무르며 제대로 하지 못한 독서, 수양, 저술 등의 개인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또한 명성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문하생들 중 일부를 선별하여 이들을 지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황의 학문적 완성은 말년에 이루어졌다는 평이 절대적이다.
이후 왕께 무진육조소, 성학십도 등을 바치며 국은에 보답하였다. 이 두 저서는 이황 말년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특히 1568년 선조 재위 2년에 바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주요 개념을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상소문이다.
이황은 왕이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이루어 백성들을 다스려, 결과적으로 도덕적 이상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이황이 조정의 내신들 보다 왕의 역할을 더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학파에서 이황과 반대되는 사상가로 대조되던 율곡 이이의 사상을 보면, 이이는 내신들이 왕에게 간청하여 정치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반면에 이황은 왕이 스스로의 수양에 전념하여 올바른 군자가 될 것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1570년 음력 12월 8일, 이황은 자신의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일상적인 한 순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일절 조회를 하지 않았다. 대학자 이황의 죽음에 애도의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측의 사진은 현재 안동 토계리에 위치한 이황의 묘소이다. 이황의 묘에서 독특한 점을 꼽는다면, 일단 대학자의 무덤 치고는 너무나 조촐하다는 점도 있겠으나, 무엇보다 무덤 전방에 있어야 할 묘비가 무덤 우측에 위치해 있는 걸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건 발표 마무리 부분에서 마저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 성리학은 이황의 사상에 핵심이 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이황이라는 인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필시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논하고, 그를 통해 이황의 깊은 사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리학은 12세기 경 중국에서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 일명 주자가 불교와 도교를 유교에 접목시켜 집대성한 유교의 한 학파이다.
주자의 성리학은 이기론으로 대표된다. 성리학의 학문적 성질은 삼라만상, 이 세상 만물을 이해하는데 초점이 잡혀져 있다. 이를 이와 기라는 개념을 통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성리학의 이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란 세상의 모든 현상과 현상이 일어나는 현실 세계를 칭하는 말이다. 기운 기자를 사용하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란 모든 현상 뒤에 있는 이치를 칭하는 말이다. 다스릴 이자를 사용하며 삼무곡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영혼이다. 그 외 신의 영역, 절대의 영역 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우선 성리학에서 말한는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부여 받은 존재, 즉 영혼의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세상을 통해 공부하고,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이란 세상 만물의 이치임으로, 영혼의 존재인 이는 세상이라는 상징을 통해 자신의 본질, 이의 영역을 탐구할 수 있는 것이다.
기란 단 하나의 개념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기에 해당하며, 그림의 나무도, 길도, 사람도, 강도 모두 기이다. 그리고 이란 이치이기에 단 하나 뿐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뜬 달을 이라고 했을 때, 잔잔한 우물에 비친 달은 잔잔하다고 하면, 일렁이는 우물에 비친 달은 일렁이는 형태이듯 단 하나의 이를 다른 형태의 기가 비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기론에는 이기불상잡과 이기불상리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이기불상잡은 이와 기는 섞일 수 없다는 뜻으로, 책을 읽어서 배움을 얻었을 때 그 책과 배움이 어찌 섞일 수 있는가. 이 둘은 근본 부터 다른 것이다 하는 것이 이기불상잡이다.
이기불상리는 이와 기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으로, 책을 읽어서 배움을 얻었을 때 그 책과 배움이 어찌 따로일 수 있는가. 책을 읽었기 때문에 배움이 있는 거고, 배움의 경험이 있기에 책을 읽는 것인데 이 둘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하는 것이 이기불상리이다.
여기까지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정리한 성리학이다. 본디 삼라만상, 우주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출발한 성리학인 만큼 언뜻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개념들이 두루 존재한다. 또한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바로 중국의 성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발표의 본론인 사단칠정논쟁이다.
사단칠정논쟁이란 본디 추상적이며 삼라만상을 설명하던 성리학의 개념을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인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끌고 온 조선만의 독자적, 독창적인 성리학 발달의 시도가 되는 논쟁이다.
사단칠정논쟁으로 넘어가기 전, 사단칠정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사단과 칠정에 대한 개념을 집고 넘어갈 것이다.
사단이란 인간의 도덕 감정을 의미하며, 성선설을 믿었던 맹자가 그 덕성을 높일 수 있는 4가지 품성을 이야기 하는데서 유래하였다.
인의예지란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있다.
인의 감정인 측은지심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이른다.
나는 성리학의 여러 개념들에 대하여 삼무곡의 언어를 통해 제해석 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이는 삼무곡 철학과 성리학에서 말하는 부분들 중 분명 일치하는 것들이 있으리라 생각하였으며, 또한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측은지심이란 '공감'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의의 감정인 수오지심은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이른다.
수오지심이란 '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의 감정인 사양지심은 겸손하고 남에게 사양하는 마음을 이른다.
사양지심이란 배움을 추구하는 학생의 자세, '가장 낮은 자리에서 배우는 학생의 태도'라고 생각하였다.
지의 감정인 시비지심은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이른다.
시비지심은 해석하는데 가장 애를 먹었으나, 결과적으로 '사랑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삼무곡의 기억의 지도에 따르면 사랑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양심을 설명하는 말로 나오기에, 아무래도 세세한 부분에서 까지 삼무곡의 철학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칠정이란 인간의 일반 감정을 의미하며, 중국의 고대 고유가인 오경 중 예기에서 처음 나온 표현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희노애락에 사랑 애, 싫어함 오, 슬픔 애, 그리고 욕망을 의미하는 바람 욕까지 총 일곱 가지의 일반적인 감정을 나타낸다. 종종 락 대신 두려움 구가 포함되기도 한다.
사단은 본성, 즉 마음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내가 명상을 한다고 하면 내 내면은 비워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어떠한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 그 상태가 성선설을 이야기하는 유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 즉 도덕 감정인 사단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상태에서 문득 내가 어떠한 상상을 떠올렸을 때, 이에 따라 내 마음에 어떠한 작용이 일어난다면, 이때 일어나는 즉흥적인 감정이 일반 감정인 칠단이라는 것이다.
고로, 사단칠정논쟁을 다시 한 번 정의하자면, 영혼의 존재인 인간의 본성 사단과 이가 어떠한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기질적 성향을 띤 일반 감정인 칠정과 가거 어떠한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에서 시작된 논쟁인 것이다.
정지운이라는 이황의 옆집에 살던 학자가 천명도설을 지어 이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이황은 딱 한 부분을 고쳐주었고, 이를 기대승의 보고 이황에게 반박의 편지를 쓰면서 사단칠정 논쟁이 시작되었다.
천명도설이란 이와 기의 개념으로 인간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한 저서로, 당시에는 반도의 일개 학자가 중국의 성리학을 본인만의 식견으로 제해석 했다는 점이 굉장히 당돌한 일이었다.
본래 정지운은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문구를 적었다.
이를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하고, 칠정은 기가 발한다고 고쳐주었다. 이는 본래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던 이, 기와 사단, 칠정 사이의 관계를 굉장히 직설적으로 정의한 것이었다.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명확하게 구분지어 설명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황은 이기불상잡을 주장하며 이귀기천을 이야기하였다. 이귀기천은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라는 뜻으로, 이황은 이와 기는 서로 합쳐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논쟁에서 이황과 논쟁을 주고 받았던 기대승은 독학으로 공부한 성리학을 통해 과거에 막 합격한 신출내기였다. 당시에는 이황이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던 때로, 이를 현재에 대입해 보면 명문대에 대학원생과 한 명 뿐인 대학 총장 정도의 신분 차였다. 또한 둘 사이에 나이 차 역시 26살로, 사실상 세대가 다른 학자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단칠정논쟁을 주고 받는 와중 이황과 기대승 모두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며 오로지 학문만을 논하였다고 한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 모두 감정의 영역에 해당하는 개념인데, 이 둘이 어찌 불리될 수 있냐며 이황에게 반박의 편지를 보낸다.
그러면서 칠정이라는 큰 감정 내에 사단이라는 도덕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칠정은 기가 발하기도, 이가 발하기도 하며, 그중 이가 발한 것이 사단이라고 말하며 이기불상리, 즉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황은 기대승의 주장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허나 그러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입장을 강화한다. 감정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맞으나, 감정을 구분 지을 수 있지 않는냐고 말이다.
감정에서 사단이라는 반드시 선한 감정을 구분하고, 칠정이라는 그 이외의 감정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황은 이라는 개념 역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뉘는 것을 예로 든다.
본연지성이란 순수한 선의 영역 그 자체이고, 기질지성은 기질에 깃들어 있는 선을 의미하는 것이나 이 둘 모두 이라는 것이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분리시켜 보게 된다면, 사단에 있는 선한 감정과 칠정에 있는 선한 감정이 서로 분리되어 버린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칠정이라는 일반 감정 안에 사단이라는 도덕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며 이기불상리를 주장한다.
이황은 기대승의 일부 의견을 수긍하였으나 이와 기를 나누어 보는 관점은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발기수와 기발이승이라는 개념을 나타낸다.
이발기수는 이가 발하면 기가 따른다는 의미로, 이 위주의 마음 작용을 나타낸다.
기발이승은 기가 발하면 이가 탄다는 의미로, 기 위주의 마음 작용을 나타낸다.
이발기수는 말을 타고있는 이와, 말인 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이발기수는 사람이 말을 잘 몰아 올바르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기발이승은 말이 멋대로 날뛰어 이에 사람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것을 예로 들었다.
이황은 이발기수와 기발이승의 예를 통해 여전히 선한 본성인 이에서 기를 분리시켜 나타내고 있다.
기대승은 이황의 답변에 정밀함을 인정하였으나, 여전히 이와 기를 분리시켜 보는 주장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기대승은 태양이 먹구름에 가려지는 것을 예로 들었다. 구름에 해가 가려 날씨가 흐려지게 된다면, 해는 언제나 제 자리에 있으니, 일반 감정인 칠정에서 악한 감정들을 걷어내 사단을 들어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즉, 해는 이를 상징하며 구름은 칠정의 악한 감정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하늘 전부가 사람의 마음, 정인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에게 보낼 반박 편지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편지를 보내는 대신, 논쟁을 마치자는 편지를 지어 기대승에게 보낸다. 이에 기대승은 자신의 입장에서 논쟁을 마무리 하는 글인 사단칠정후설과 사단칠정총론을 지어 이황에게 보냈고, 이황은 이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그렇게 길었던 사단칠정논쟁은 마무리 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논쟁의 승패가 갈렸다거나 일로 보기 보다는, 이황도 기대승도 모두 서로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한다. 이황도 기대승도 모두 서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품은 채로 논쟁에 임하였고, 그만큼 서로의 입장과 사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사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단칠정논쟁은 실재로 8년간 약 70여개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진행되었다. 또한 논쟁의 형식은 퇴계 이황과 기대승아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실상은 논문의 형태 또한 띠고 있었다. 이황은 기대승에게 보내는 편지를 먼저 서울에 있던 제자 이문량에게 보냈다. 그 과정에서 편지는 전국을 돌게 되고, 이는 전국의 학자들이 편지를 읽게 됨으로서 사단칠정논쟁에 대한 전국적인 규모의 학회가 열리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이끌었다. 말인 즉, 사단칠정논쟁을 통해 조선의 전반에서 성리학의 발달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중국과는 다른, 조선 고유의 성리학이 새롭게 발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돈 것이다.
또한 이황이 활동한 시기 이후 성리학자들은 개개안의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학파가 갈리고 체계화 되면서 실질적인 사림의 번창으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단칠정논쟁은 이러한 역사적, 학문적 영향을 빼고 보더라도 그 자체로 배울 점이 많다고 본다.
우선 추상적이었으며 무엇도 명확하게 정의되었지 않았던 이기론과 인간의 감정 사이에 영역을 새롭게 탐구하고 학문을 논하며, 그 과정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한 채로 오로지 학문만을 논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자에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칠정의 악한 감정을 절제하고, 오로지 사단을 추구하며 학문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인상적이었다.
이황과 기대승이 서로를 존중하였을 것이라는 예는 이황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황은 죽기 전 자신의 제자에게 조정에서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하더라도 거절하라 이르며, 자신의 묘비에는 오직 자신이 지은 글귀만을 새기라 일렀다. 이는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 이씨의 묘'라는 단순한 글귀였으며, 덧붙이기로 기대승 같은 사람이 자신의 묘비문을 적으면 묘비문을 장황하게 채울 것이라며 농을 피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이황의 묘비문이 초라하게 세겨지는 것을 두고볼 수 없었고, 결국 묘비문은 기대승이 쓰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황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묻어나는 만큼, 가운데 이황이 말한 문구의 양 옆으로 빼곡한 글씨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선조는 이황의 묘비를 세울 때 죽은 이황의 눈치를 봐 이황의 묘 우측에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사단칠정논쟁에 임할 당시, 아무래도 이황과 기대승은 서로 입장의 차이를 가진 챌고 논쟁에 임하였었다. 물론 서로 이를 논쟁에 끌고 오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젊은 학자였던 기대승에 반해 이황은 조정의 온갖 사화를 몸소 겪으며 살아 온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는 앞에서도 말했듯 인간의 온갖 악한 감정들이 어떻게 발하는지를 직접 경험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을사사화에 엮였던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이황이 서른의 나이에 들여와 15년 간 함께했던 권씨 부인 역시 갑자사화로 가족을 잃어 정신 질환을 가지게 된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황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에서도 도덕 감정인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보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온갖 사화를 일으키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악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단을 중시하도록 이르기 위해선 사단과 칠정을 분리시켜 명분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황의 학문적 완성은 말년에 이루어졌다. 관직에 지낼 당시에는 하지 못하던 공부를 마음 껏 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이황은 말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수양론을 강조했다. 이황의 수양론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목표로 하며, 이를 통해 도덕적 이상 사회를 이루는 것을 꿈꾼다.
방법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지니게 된 기질을 바로잡는 교기질을 내세우고 있다. 교기질은 극기과 경으로 나뉜다.
극기란 사사로운 욕망을 극복하는 것. 이를 삼무곡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이란 경건한 상태를 말하며, 도덕적 긴장상태를 유지하는 것, 도덕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를 삼무곡 언어로 표현하자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학생의 자세, 언제나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그런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이라는 가치에 도달하게 된다.
성이란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것. 이를 삼무곡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와 상대방 이외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온전한 I AM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번에 성리학의 개념을 공부하면서, 마치 내 배움의 과정을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를 습득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리학이라는 이론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크게 감흥이 있지 않았으나, 이를 품고 살다보니 어느 순간순간에 어라? 하고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도덕 감정과 일반 감정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우리 삶에 가까이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대할 때, 기질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고 있을 때, 문득 성리학에 대하여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지금 휘둘리는 것이 일반 감정 칠정이라는 것이라는 사실이 먼저 떠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지금 현재 추구해야 할 가치가 도덕 감정인 사단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를 마지막으로 내가 학생으로 있는 삼무곡의 언어로 가져와 보면, 나에게는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라는 물음이 남았다.
내가 길을 잃어 헤매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내가 나아가기로 했었던 길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무엇을 보고 걸음을 옮겨 여기로 오게 되었는지, 이를 다시 한 번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나에게 정답을 알려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잊고있었던 행간의 연유를 다시 한 번 떠올리도록 해준다. 나는 해 온 선택은 무엇이었는가. 나는 어찌하여 이러한 물음을 두고 서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들을 어렴풋이 이야기 해준다.
나는 잊고 있던 나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고, 이제 선택은 나의 몫이다. 딱 학문이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영역의 끝이랄까. 하지만 적어도 내가 왜 이런 물음을 마주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고 나면,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성리학 공부는 나에게 이 물음을 자각시켜 주었다.
이황 선생님과 관련해서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몇 가지 있었다.
이황 선생님은 첫 아내와 8년 만에 사별하고 난 후, 서른의 나이에 두 번째 아내를 맞는다. 이가 바로 권씨 부인. 아까 잠깐 언급한 갑사사화로 인해 가족을 잃고 정신질환을 앓게 된 여인이었다. 이 권씨 부인의 아버지는 유배길을 떠나기 전, 이황선생님의 성품을 알아 보고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 그렇게 이황 선생님은 권씨 부인을 보살피다 끝내 혼례를 올리기 까지 갔던 것이었다.
권씨 부인은 이황 선생님과과 혼례를 올린 후에도 여러 사고를 친다. 이황의 하얀 옷에 난 구멍을 붉은 천으로 제봉해준 일이나, 제사상의 과일을 훔쳐 먹으려던 일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정작 이황 선생님은 권씨 부인이 흰 옷을 빨간 천으로 꼬매 왔을 때에도 그 옷을 기꺼이 입었으며, 권씨 부인이 제사상 과일에 손을 댔을 때에는 그 연유를 묻고, 이에 권씨 부인이 과일이 먹고 싶다고 답하자 직접 과일을 깎아 주며 다음부터는 먹고 싶은 과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말하라 일렀다고 한다.
또 이황 선생님이 도산서당을 짓고 난 후 전국에서 제자들이 찾아 왔을 때에 이황은 특이한 형식으로 면접을 보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면접인 만큼 옷을 잘 차려 입고 면접을 보러 온 이들을 가벼운 옷차림의 이황 선생님이 마주했다고 한다. 이 와중 어떤 이들은 무더위에 옷을 벗어던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끝까지 더위를 참아가며 옷을 입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부류중 이황 선생님은 전자의 이들을 선별하여 제자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끝까지 옷을 벗지 않은 이들은 그 집념은 인정하는 바이나, 그 집념이 관념이 되어 조정에 들어섰을 경우 나라의 일을 크게 뒤흔들 수 있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황 선생님은 그렇게 선별한 제자들에게도 자신의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을 지도하였을 뿐 개개인의 사상을 존중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황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강조하였다고 하는 수양론을 누구보다 충실히 따른 인물이 바로 이황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였다. 극기와 경. 그를 통해 누구든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마주하는 성. 나는 이 부분이 삼무곡에서의 배움 이야기와 전혀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또한 이를 삶으로 살아낸 이황 선생님이 진정한 큰 스승이라는 것 역시도 알 수 있었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삶을 살 것인지, 학자로서 자신이 가치를 둔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온전히 그의 사상에 동조하든 하지 않든 충분히 귀감이 되어준다고 느꼈다.
이황 선생님은 한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아 오셨다. 그 삶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결정이기에 진정으로 의미있다고 느끼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러한 이황 선생님이 자신의 배움을 이어 나가기 위해, 또한 제자들의 배움을 위해 말년에 지은 공간이 바로 도산서당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론 이 도산서당이 바로 배우는 장소, 삼무곡과는 또 다른 배움의 장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황이라는 인물이 죽고 난 후, 그의 제자들이 이황 선생님을 기리는 마음에서, 존경하는 마음에서 새롭게 이룬 공간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단지 이황이 지은 배움의 공간인 도산서당으로 끝났더라도 나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도산서원이라는 공간을 이룬 것이 제자들이라는 건 또 다르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황의 제자로서, 그리고 현곡의 제자로서.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나는 무엇을 배우는 사람일 것인가. 어찌 보면 이 이야기에서 도산서원을 세운 제자들이야 말로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입장이지 않을까. 이야기라는 건 이어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고, 때로는 그 이야기의 등장인물이라는 정체성으로 살기도 하는 법이다. 하지만 결국 삶을 살다 보면,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이루는 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 현재 삼무곡의 학생이라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으며, 이 이야기에 충실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다. 내가 인식하고 있던, 그렇지 않던. 어쨌거나 나는 작가 되는 게 꿈인 사람이니까. 또한 독자로 한 평생 살고자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나니까. 이 이야기는 그런 나에게 찾아 온 한 스승의 이야기이자 학문의 이야기, 어떤 배움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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