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던 친구들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모두 IMF의 폭격을 맞아 부도를 내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들은 졸지풍파에 아파했지만 무엇보다 답답해했다. 그래서 시간도 벌고 용돈도 벌어 볼 욕심에 전선을 가공하는 일을 같이 하기로 했다. 마침 가구공장으로 사용하던 내 건물이 한 동 비워져 있어서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전선을 가공하는 작업은 소리가 나지 않아 실내가 조용했다. 그래서 라디오를 틀어 놓고 일을 했다. 라디오를 들으며 일을 하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우리는 곧 라디오의 팬이 되었다.
라디오에 소개되는 사연들은 가지각색이었다. 부부싸움 이야기, 고부간의 이야기, 애들 키우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며칠 전에는 자동차 부품공장을 하던 사람이 모 기업으로부터 부도를 당해 견디다 못해 연쇄부도를 내고 가족 모두 제주도로 내려간 편지가 방송되었다. 그 주부의 사연은 숟가락만 달랑 들고 제주도로 내려간 기막힌 내용이었다.
그녀는 서울의 좋은 집에서, 명품 옷에, 고급 승용차에,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도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니, 처음엔 억울하고 참담했지만 수표를 막지 못해 잠 못 이루던 그때보다 차라리 마음은 편해졌다며 좋아했다.
그녀는 자기 집 마당에서 정확하게 서른 발자국만 걸어가면, 푸른 바다와 만난다며 소녀처럼 좋아했다. 지금의 집은 남편이 몇 년 전 낚시를 와서 보아두었던 빈 집이라 돈 한 푼 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남편은 지금 밀감 밭에 일하러 갔고, 방송이 끝나면 자기는 양배추 밭에 일하러 간다고 했다. 걱정했던 아이들도 서울에서 보다 더 씩씩하고 밝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무척 행복하다고 했다.
며칠 후의 사연도 어느 주부가 보낸 편지였다. 그 주부는 결혼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중증이 라고 했다. 숨이 차서 밥과 빨래는 고사하고 대소변까지 남편이 받아 낸다고 했다. 그런 생활이 벌써 15년이나 되었고,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이 작은 트럭으로 하는 채소장사로 근근이 밥은 먹고 사는데, 그녀의 약값 때문에 생활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편지를 다 읽은 진행자가 그 주부에게 전화를 하여 인터뷰를 했다. 진행자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마지막으로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주부는 울먹이며 자기의 소원은 딱 두 가지라고 했다. 소원 중 하나는 손수 지은 밥 한 그릇을 남편에게 차려 주는 것이고, 또 하나의 소원은 올 해 대학에 진학한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조금 엉뚱한 소원이라 진행자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얼마 전, 딸이 시장에서 500원을 주고 사온 티셔츠가 자기에게 잘 어울린다며 그렇게 좋아했다. 그런데,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저녁도 먹지 않고 울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아 다그쳤더니, 학교 친구들이 싸구려 티셔츠라며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딸 이야기를 하는 그녀는 다시 설움이 북바치는 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없는 사람 없는 대로 살아가도 좋으니 제발 옆에서 상처나 주지 않았으면 좋겠고, 딸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 소리에 라디오를 듣고 있던 친구들 모두 코를 훌쩍거리고 말았다. 명품을 모를 리 없을 여학생, 그 여학생이 500원 짜리 티셔츠에 그렇게 만족해하고 좋아한 것에 감동하여 우리 네 사람은 사내답지 않게 콧물을 훌쩍였다.
그 방송이 있은 며칠이 지났다. 예의 그 방송의 진행자는 그 사연을 다시 소개하며 트럭에 싣고도 남을 만큼의 고급 옷들이 그 여학생에게 보내져왔다고 소개했다.
그 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 앞에 한 줄기 섬광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그 빛은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쏟아지더니 온 세상을 화려한 꽃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착한 그 여학생도 한 송이 꽃이요, 남편에게 미안해 하고 딸을 사랑하는 그 어머니도 한 송이 꽃이요, 15년이나 아내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싫은 내색 않는 그녀의 남편 또한 한 송이 꽃이 아니겠는가.
부도가 난 남편을 따라 제주도의 빈집에 거미줄만 걷고 들어가서도 행복하기만 하다는 그 주부도 한 송이 꽃이요, 착한 여학생에게 옷 한 벌씩 보내준 그 많은 분들도 모두 한 송이 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꽃으로 가득한 세상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