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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믿음의 거인들을 본받으며 성장하는 신앙-바울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엡 5: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성경 다음으로 믿음의 삶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전기일 것이다. 성경 그 자체도 대부분 선지자들과 족장들과 왕들의 삶-그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기도하고 수고하고 고난을 당하고 마침내 승리했는지-을 묘사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조이스 브라운 지음, 『세계를 변화시킨 믿음의 거인들』, 김주성 옮김. p.12
* 매스미디어(대중전달매체)가 발달한 이 시대에 우리 자녀들은 본받고 살아야 할 좋은 위인들은 적고, 이런저런 분야에서 빼어난 유명인사들이 넘쳐나는 환경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바르고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녀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과 상황 속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을 그러한 유명인사들보다는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전기를 읽고 배우고, 그런 삶을 살기를 힘쓸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업가들을 찾아다니며 성공 비결을 비우고, 운동이나 악기 연주를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한 운동가나 연주자에게서 배우고 익히듯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배우기 위해서는 그러한 신앙의 위인들을 찾아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바쁜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전기를 읽고 배우는 일을 기뻐하며, 우선순위를 두고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주변에서 가끔 보고 듣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불의와 불법에 대해 낙심하며 주저앉지 말고, 숱한 역경과 고난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간 그리스도인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마음과 시간과 노력을 쏟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1. 개종 이전의 바울은 교회를 전심으로 핍박하는 자였다.
행 7:58; 8:1-3; 9:1-31; 22:3-21; 26:4-23; 갈 13-14; 빌 3:4-6
은성아,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처음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종교 분파인 바리새파 출신이었다(행 26:5). 그리고 당대 바리새파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행 22:3), 남들보다 종교적 열심이 뛰어나서 스스로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 1:14)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요즘 말로 하자면 “뼛속까지” 정통파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었던 사람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을 살펴보자. 그들은 첫째 여호와만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둘째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을 선민으로 삼았다고 믿었다. 셋째 그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자기들에게 율법을 주셨다고 믿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비롯한 우상들을 섬겼던 유대인들이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는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였다. 사두개인을 비롯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런 믿음을 포기하고 현세적인 사람들이 되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 신앙을 고수하고자 몸부림을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자기를 메시야라고 하고,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자기들은 죄인이라고 멀리하는 세리와 창기들과도 교제하고 식사도 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또 자기들이 율법을 엄격히 해석하여 전통으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롭게 가르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자기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예수를 더 이상 가만히 둘 수 없어서 십자가에서 죽여버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며 이 예수가 메시야요, 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믿음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요, 그렇게 처형된 사람은 반역자이자 동시에 패배자라는 것을 뜻하며, 한마디로 십자가는 ‘수치’를 뜻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그대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산헤드린 공회로 잡아와서 심문도 하고 위협도 했고, 나중에는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스데반이라는 제자가 회당에서 능력있게 전도를 하니까 그를 산헤드린 공회로 끌고 왔다. 거기에서 스데반이 이스라엘 역사를 들어가며 길게 설교를 할 때에 그들은 스데반을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쳐 죽였고,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
요즘 전 세계에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교회에 난입하여 성도들을 폭행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예배 중에 교회에 난입하여 교인들을 죽이는 일들도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인들이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이러한데 교회가 막 시작하던 때에는 얼마나 많은 반대와 핍박을 받았는지 모른다. 세계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절대 굽히지 않고 자기들의 신앙을 철저히 붙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그들이 새로 시작하는 교회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은성아, 사울은 기독교인들을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해야 될 줄로 생각하고, 멀리 떨어진 다메섹(다마스커스)까지 가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했다(행 9:2). 그는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서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고, 또 죽일 때에 가편투표를 했으며,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다(행 26:10-11). 그가 주의 제자들에 대해 얼마나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지(행 9:1) 나중에 예수를 믿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성도들이 그가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기를 두려워할 정도였다(행 9:26).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2.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바울은 완전히 변하다.
은성아, 어떤 분이 쓴 글을 보니까 세상을 가장 획기적으로 바꾼 역사적 인물 20인을 이렇게 열거했다. 1위는 ‘예수 그리스도’, 2위는 ‘마호메트’, 3위는 ‘공자’, 4위는 ‘석가모니’, 5위는 ‘플라톤’, 6위는 ‘채륜’, 7위는 ‘콜럼버스’, 8위는 ‘징기스칸’, 9위는 ‘알렉산더’, 10위는 ‘아리스토텔레스’, 11위는 ‘바울’, 12위는 ‘시황제’, 13위는 ‘살라딘’, 14위는 ‘나폴레옹’, 15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16위는 ‘스탈린’ 17위는 ‘마르크스’, 18위는 ‘히틀러’, 19위는 ‘당 태종’, 20위는 ‘다윈’이다. 그런데 바울이 11위라는 데에는 공감이 되지 않구나. 바울의 변화는 유럽의 역사는 물론 전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자기의 삶을 완전히 예수님께 바치는 자가 된다. 이전에 자기가 핍박하던 기독교를 전파함으로 이제는 자기가 핍박받는 자가 된다. 그가 알던 예수 그리스도, 그가 알던 율법, 그가 알던 유대교가 완전히 달리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그가 자기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곳과 그가 쓴 서신서들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을 가장 강조하고 있고(행 17:30-32, 23:6; 24:14-5, 21; 26:6-8; 22-23), 그 부활의 예수님이 자기를 사도로 부르시고, 매일매일의 삶을 살게 하시는 분임을 주장하고 있다(롬 1:1-5; 고전 9:1; 15:8 갈 1:1; 엡 1:19-20; 빌 3:10-11).
은성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오직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서 일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후 11:23-29).
은성아, 너는 이런 글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니? 나는 바울이 일반 상식으로나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삶, 그러니까 ‘미친’ 사람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왜 그런 미친 사람처럼 살았던가를 생각한다.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 믿음도 좋고, 신분도 좋고,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었으니 이런 어려운 삶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존재, 즉 예수 그리스도를 피할 수가 없었다. 세계 역사와 전 인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자기는 지극히 미미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15-16). 바로 이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하신 것을 깨닫고, 그것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다 바쳐 일했던 것이다(행 20:24; 딤후 4:7).
은성아,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기독교가 믿을 만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바울처럼 철저히 기독교를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하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연구해 보면 좋겠다. 성경도 읽어보고, 교회 예배에도 참석해 보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면 그때는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사실은 우리 시대에도 가끔 성경을 거부하고 교회를 공격하려고 기독교와 성경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본다. 북한과 중국, 그리고 여러 이슬람 국가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면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바울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은혜로 부르시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신비하기 짝이 없고, 우리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회심을 전하는 사도행전과 바울이 쓴 신약성경을 읽고 배우며,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