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말썽을 부리려나? 복사기에 원본을 조심스레 올려놓고, 필요한 부수를 지정한 후 시작 버튼을 누른다. '삐―' 하는 신호음이 울리며 원본이 차례대로 복사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늘은 복사가 잘 되려나보다.
강좌의 수강생이 늘어나면서 교재의 양도 많아졌다. 구식의 수동 복사기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형편이 어려워 반자동 복사기를 들여 놓았다. 복사된 용지가 자동으로 정렬되는 기종이었다. 손으로 한 장씩 간추려야하는 이전의 구식 복사기와는 성능부터 차이가 났고 모양새도 세련되었다.
새 복사기를 처음 들여 놓던 날은 황홀했다. 복사되어 나온 용지는 새색시가 자분자분 쟁이는 듯하여 정인(情人)을 보듯 신통하게 바라봤다. 복사가 다 끝났다는 신호음이 울리면 그대로 꺼내 종이찍개로 묶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렇게 일손을 덜어주어 얼마나 사랑스럽고 대견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자 슬슬 문제를 일으켰다. 종종 용지가 끼어 걸린 것을 빼내어야 했다. 애프터서비스를 불렀더니 수평을 맞추어 주고 갔다.
복사기는 한 동안 별 문제없이 잘 되더니 다시 멈춰 서기 시작했다. 삼복의 어느 날 기계는 멈춰 섰건만 걸린 용지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짜증을 내며 애프터서비스를 불렀다. 기사가 달려 와 손을 봐 주었지만 복사가 늦어 허둥지둥 강의실로 달려가야 했다.
그 정도는 그래도 괜찮았다. 얼마쯤 지나자 복사된 용지가 밖으로 튀어나와 사무실 바닥이 난장판이 되었다. 출구에 문제가 생겼는지 복사기는 성난 사람처럼 용지를 마구 바닥으로 내던졌다. 어떻게 손을 댈 수도 없어 또 기사를 불러야 했다. 기사는 출력되는 부분의 고무 롤러가 닳아서 그렇다고 했다. 들여놓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한동안 잠잠하던 복사기가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기사를 불렀다. 뚱한 표정의 기사는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기사 앞에서는 잘 되다가도 가고나면 또 말썽이었다. 아무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기사도 시도 때도 없이 불러놓으니 이젠 늦장을 부렸다. 그럴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어떤 때는 강의 시간이 촉박하여 부근의 카피몰로 헐레벌떡 뛰어가야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이제는 기사도 잘 오지 않았다. 전화로 어디를 만져 봐라, 어느 버튼을 눌러 보아라, 그저 지시만 할 뿐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멀쩡한 것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이런 복사기가 내게 왔을까. 이젠 보장 기간이 지나 새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 그냥 확 발로 차버릴까도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그저 참고 또 참아야 했다.
이렇게 복사기 앞에만 서면 도를 닦듯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세상 만물은 다 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깜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복사기에 나는 완벽하기만을 잔뜩 바라고 있었고, 제 값을 다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부아가 났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들과 만나게 된다. 친구도 만나고 배우자도 만나고 복사기 같은 사물과도 만난다. 운이 좋아 완벽한 것들과 인연을 맺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부족하거나 불편한 것과 만나기도 한다.
부족하거나 불편하거나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화만 낼 수 없지 않은가. 이 별난 복사기를 만난 것도 다 인연이 아니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것 내가 참고 수고를 조금 더 하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스위치를 누른 다음 복사기 앞에 앉는다. 복사가 되어 나오는 용지를 한 장 한 장 내 손으로 일일이 받아 낸다. 용지가 끼어 멈추기도 하고 끼지 않았는데도 멈춰 서곤 한다. 한 권씩 정렬되기도 하고 제멋대로 튀어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측은지심으로 다독이며 다시 시작 버튼을 누른다. 달리 방법이 없으니 어쩌겠는가. 성가시지만 한 장씩 받아내니 오히려 마음은 편하다.
세상에는 바라야 오는 것이 있고, 바라지 않아야 오는 것이 있다. 바라는 대로 다 이뤄진다면 바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神)이 관장하는 영역은 인간인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것인가 보다.
이젠 한 권씩 간추려져 나오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깟 수고가 대수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보다 훨씬 낫다. 무원해탈(無願解脫)의 경지는 아니지만 제발 다른 말썽 없이 오래 오래 견디기를 그저 바랄뿐이다.
복사기는 '삐―' 소리를 내며 한 장 한 장 잘도 출력을 한다. 한 권씩 정렬되지 않으면 어떤가, 이렇게 순서대로 나오는 것만도 감지덕지다.
첫댓글 복사기 때문에 애먹늠 모습이 훤히 보입니다.
저도 컴퓨터가 서툴어서 자주 애를 먹거든요. 연경이 안되는 일도 가끔 생기고
그걸 손보고 나니 요즘은 카톡으로 연결 되는 것이 안 되어서 사람을 불러서 해도 안되어
애를 태우니 울산 사위가 일부러 와서 고쳐 주고 갔어요.
나이 팔순 중반인데 그만 둘까 하다가도 아무 것도 안 하면 어쩌나 싶어서 다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