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문학을 좋아했었다. 젊은 시절에, ‘뷔른손’을 ‘싱클레어 루이스’를 ‘서머셋 오옴’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내가 문학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영화였다. ‘에덴의 동쪽’ ’로마의 휴일‘ ’젊은이의 양지‘ 같은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 멋진 영화를 연출하는 영화감독이 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시절의 한낮 꿈일 뿐이었다. 영화도 문학도 눈에 닫지 않는 아주 먼 곳에 서 있다가 머리에 수양버들의 꽃가루를 허옇게 뒤집어 쓰고서야 문학과 만나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좋아했던 단편이 있다. 노벨상 수상작가 ‘싱클레어 루이스’의 ‘늙은 소년 엑슬브롯’이다.
시골의 늙은 농부인 엑슬브롯은 ‘예일대학’학생들이 교정의 잔디밭에 앉아 문학과 철학을 토론한다는 책을 읽고 크게 매력을 느낀다. 자신도 그런 멋있는 대학생활을 해보리라 마음먹고 밤을 세며 입시 준비를 한다.
이웃들로부터 미치광이 소리까지 들어가며 오랜 세월의 노력 끝에 노인은 결국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입학해 보니 교정에서는 문학과 인생 토론은 간 곳 없고 저질의 연애담만 난무하여 노인은 실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뜻이 맞는 한 학생과 만나게 된다. 그 학생과 함께 연극을 보고 밤길을 나란히 걸으며 철학과 인생 이야기를 하며 밤을 꼬박 세운다.
그는 태어나 그렇게 기분 좋은 밤은 처음 이었다. 이런 황홀한 기분을 맛보려 그토록 오랜 시간 애를 쓴 것이라 생각 한다. 그는 아침이 오면 그 아름다운 꿈이 깨어질까봐 기숙사로 돌아오자 고향으로 돌아가려 서둘러 짐을 꾸린다.
나도 엑슬브롯처럼 얼굴의 주름을 세며 문학강좌에 수강신청을 했다. 첫 강의가 있던 날 오후,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학교에 도착했다. 이른 시각이라 2층 강의동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교정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늙은 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 하얀 꽃잎 위로 오후의 햇살이 말갛게 내리고 있었다. 꽃잎들은 가벼운 바람에도 서러운 듯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텅 빈 강의동, 오후의 햇살, 눈처럼 지고 있는 꽃잎, 긴 세월을 돌아오게 된 문학 강좌, 나는 왜 여기에-, 생각이 그곳에 이르자 뇌리의 저쪽에서 ‘싱클레어 루이스’의 ‘늙은 소년 엑슬브롯’이 떠올랐다.
눈처럼 날리는 꽃잎, 강의실에서 만난 젊은 문우들의 해맑은 얼굴, 진지하게 진행되는 강의에 매료된 나는 액슬브롯처럼 바로 짐을 꾸려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정서가 같았던 사람들과의 만남. 열정에 휩싸였었던 묘한 문학적 분위기. 그것들로 해서 나는 매일 그런 생각을 되풀이 하곤했다.
늙은 소년 엑슬브롯’은 한 학생을 만났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때 그 황홀했던 분위기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상징과 비유, 형상화를 수 없이 되뇌었고 문학성이라는 낱말에 우리는 끝없이 매달렸다. 한마디 한마디의 강의가 큰 감동이었고, 그 열정을 식히지 못해 돌아올 때는 차가운 맥주를 앞에다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었다.
그토록 갈망했던 영화와의 만남은 결국 이루지 못했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접은 지 오래다. 그 대신 문학을 만났다. 문학 중에도 수필이 좋다. 수필은 내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야기도 끌어들일 수 있어서 좋다. 허구와 우연을 멀리하고 진실과 필연만 있어서 수필이 좋다. 그래서 영화 대신 나는 수필을 쓰려한다.
영화를 갈망하다 수필을 만났으니 영화 같은 수필을 써보고 싶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콘티를 짜고 감독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은 내가 주인공이 되겠지만, 친구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옆집 아주머니가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촬영도 내가 한다. 긴박할 땐 카메라 워크를 빠르게 그렇지 않을 땐 느리게, 강조해야할 때엔 클로즈 업, 연상 해야할 때엔 오버 랩을 시킨다. 그뿐인가 조명도 의상도 셋트도 다 내가 한다. 사건이 벌어지는 때와 장소에 따라 수수한 차림, 은은한 조명, 음침한 셋트, 또는 화려하고 현란한 의상을 주인공에게 입힐 수도 있다. 얼마나 멋있는가. 나는 영화보다 더 향기로운 그런 멋있는 수필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