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울렁인다. 숨소리가 얼마나 거칠던지 산이 울릴 지경이다. TV 속의 그들은 숨 가쁘게 산을 오르고 있다. '일박 이일'이라는 방송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이 프로는 젊은 연예인들이 일박 이일 동안 여행을 하며 그 지역을 소개해 주고 있다.
오늘은 그들이 설악산을 오르고 있다. 영하 20도나 되는 날씨에 눈 덮인 설악산을 오르는 여정인지라 상상만으로도 그 고통이 짐작이 된다. 어디 그뿐이랴. 바람이 어찌나 센지 볼이 터질 지경이라며 모두가 아우성이다.
출연자들은 설악산의 '대청봉'을 두 개의 코스로 나누어 오르고 있다. 한 팀은 급경사를 먼저 오른 후 완만한 능선을 타는 코스이고, 다른 팀은 완경사를 걷다가 나중엔 가파른 능선을 타는 코스다. 그런데 급경사를 먼저 올라야 하는 코스는 전체의 길이는 짧았고, 완경사를 먼저 오르는 코스는 전체의 길이가 길다. 코스의 선택은 자유롭게 각자 알아서 하도록 했다.
급경사를 먼저 오르는 코스는 두 사람이 선택했다. 급경사를 먼저 오르지만 전체의 길이가 짧으니 아무래도 쉽지 않겠느냐는 생각인 것 같다.
완경사를 먼저 걷는 코스는 세 사람이 선택을 했다. 코스가 길더라도 경사가 완만하니 쉬우리라 생각한 모양이다. 아무렴, 그들 나름으로는 깊이 생각했으리라. 그들은 설악산의 서쪽과 동쪽 서로 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출발을 했다.
급경사를 먼저 오르는 팀은 처음부터 힘이 드는 듯하다.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숨을 헐떡이며 혀를 내두른다. 처음부터 이러니 과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지 걱정을 한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는 한다.
반대로 완경사를 선택한 팀은 유유자적이다. 경사가 심하지 않으니 노래도 부르며 여유를 부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아무리 완경사라 해도 그래도 산길이 아니던가. 그들도 차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급경사를 먼저 오른 팀은 완만한 능선에 올라서자 조금 편안해진 듯하다. 그러나 완경사가 있는 쪽으로 간 출연자들은 더 고통스러워한다. 다리에 쥐가 나서 몇 번이나 쉬어야 했고, 심지어 포기하고 내려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사람들은 지하도와 육교가 동시에 나왔을 때 대부분 지하도로 간다고 한다. 육교는 오르막을 먼저 올라야 하고 나중에 내려오는 것이고, 지하도는 먼저 내려 간 다음 나중에 올라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둘 다 힘을 쏟는 건 꼭 같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하도로 가는 것이 훨씬 쉬우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쉬운 것, 편한 것부터 먼저 선택하는 버릇이 있다. 설악산의 완경사를 택한 그 사람들도 그와 같으리라. 나는 힘들어 하는 그들을 보며 요즘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노인들이 떠오른다.
우리의 자살률이 세계 1위가 되었다고 한다. 노인들의 자살이 부쩍 늘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자살의 원인은 생활고, 외로움, 신변 비관이라고 한다. 이 세 요인은 모두 경제력 즉 돈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평생 일하여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치고, 독립까지 시켰지만 정작 자신들의 노년은 준비하지 못한 때문이다.
수명이 늘어난 만큼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막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어른들 말씀에, '청춘의 궁핍은 견딜 수 있어도 노년의 궁핍은 견디기가 어렵다'고 하더니, 비참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리라.
그들이 누구인가. 가난과 온갖 고난을 이겨낸 세대들이 아닌가. 그 어려움을 이겨낸 분들도 견디지 못하니 그 고통은 짐작 되고도 남는다.
급경사를 오른 팀은 벌써 '중청봉' 산장에 도착하여 느긋하게 쉬고 있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자 오지 않는 팀을 걱정하고 있다.
그에 반해 반대쪽에서 올라오는 팀은 캄캄해졌는데도 아직도 산을 오르고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기진맥진 초주검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멀리 비치는 산장의 불빛을 보며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강노지말(强弩之末) 이라는 말이 있다. 제갈량의 말인데 강하게 날아간 화살도 멀리 날아가서는 비단결 한 장을 뚫지 못한다는 뜻이다. 힘들어 하는 그들이 바로 그런 꼴이었다.
먼 길을 걷게 되면 지치지 않을 수 없다. 지칠 대로 지친 후에 경사를 오르려니 훨씬 힘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나 지쳤는지 손만 갖다 대어도 '픽' 쓰러질 것만 같다. 힘들어 하는 그들의 모습 위에 먼 길 걷는 노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