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남자들은 언제나 마음에 공허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이 때로는 비어버린 우물로 혹은 차 안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안에서 돌아보는 것은 돌아본 적 없었던 자신을 둘러싼 세계다. 거기엔 언제나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 여성이 있고 세계의 일부에서 개별적 존재로 선명해진다. 나오는 작품들마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이라는 객체를 여전히 관찰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그의 세계를 가져다 분해하고 전혀 다른 색을 입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나로부터 확장되는 소설 속 인물들 대신 외곽도로를 배회하다 집과 같은 안식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플롯은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세편에서 가져왔다. 초반의 시작은 오고 가는 이야기의 중첩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완성하는 세헤라자데, 의도치 않게 아내의 불륜을 목도하는 남자의 방황을 그린 기노, 거기에 베이스가 되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섞어서 하나의 새로운 플롯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하마구치 류스케는 체홉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삽입한다. 앞서 제시한 개별의 작품들은 영화 속에서 각자의 양식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이야기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식으로 맞물려 돌아가기도 하고 종국에는 바냐 아저씨라는 무대극이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합쳐지기도 한다. 쌓여가는 이야기들은 지난 것들이 외치는 말들을 경청하며 완성되어가는 방식의 뛰어난 설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이라면 40분 동안 진행되는 기다란 프롤로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고, 상대를 존경하는 가후쿠와 그의 아내 오토, 그들 사이는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아내는 드라마를 쓰고 그 모티브를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런 그들 사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드라마 각본을 쓰는 아내는 늘 자신이 쓴 대본의 주인공들과 혼외관계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후쿠는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런 아내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토록 행복하다 믿었는데, 프롤로그의 종반부에 다다르면 오토는 가후쿠에게 오늘 중요한 할 말이 있으니 일찍 집에 와달라는 주문을 한다. 가후쿠는 아내에게 들을 말이 무엇일지 두려워 밤이 늦도록 배회하다 집에 도착하니 오토는 지주 막하 출혈로 사망한 상태였다. 아내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지나고서야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고 마치 이제 시작이라는 듯 이야기는 전개된다.
영화가 40분이라는 긴 시간을 프롤로그로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적 문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가후쿠에게 남겨진 질문은 오토가 남기려던 말과 그녀는 왜 혼외관계를 가진 것일까 일것이다. 에필로그가 시작되고 그들 사이엔 4살에 일찍 숨을 거둔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상실은 공허를 만들고 끊임없이 사랑을 나눠도 아무런 존재를 잉태하지 못했던 아내는 결국 이야기를 잉태한 것이었고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들과 관계를 통해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내의 죽음이란 그들이 만들고 잉태했던 이야기의 죽음인 것이다. 아내를 보내고 충격에 빠져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못하던 가후쿠는 연출을 위해 히로시마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을 연출하기로 계약하고 본격적인 오디션과 대본 리딩을 시작한다.
여기서 이 영화의 또 다른 흥미로운 설정이 등장한다. 그것은 대본을 리딩 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 방식을 거기에 녹여낸다는 것이다. 연극을 위해 선발된 배우들은 사각으로 둘러싼 테이블에서 일체 감정이 실리지 않는 리딩을 경험하게 된다. 정확하게 느리게 본격적인 연습이 아닌 대본을 감정 없이 수 차례 반복하게 된다. 오랜 시간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상대의 대사까지 체화된 상태에서 그들은 실제 연기 연습에 돌입하게 된다. 모든 상황과 대사가 몸에 녹아든 상태에서 처음 연기를 하게 되는 순간이 되면 그들은 정해진 지문보다 자신과 상대의 감정, 뱉어지는 호흡이 만들어내는 공명에 집중하게 되는 마법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히로시마에 도착 후 연극제 관계자들과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독특한 룰인 연출자는 직접 운전을 하지 못하며 고용된 드라이버가 운전을 해야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떨떠름 하지만 결국 받아들이고 고용된 전용 기사 미사키 그들은 빨간색 사브를 타고 어색한 동행을 시작한다. 원작을 읽은 독자라면 으레 왜 사브가 노란색이 아닌 빨간색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영화가 중반부를 지나면 가후쿠는 차 안에서 오토가 녹음해준 바냐 아저씨를 반복해서 듣는다. 그때 그 차 안은 가후쿠의 심장처럼 느껴진다. 그 속에 담긴 모든 것들, 놓쳐버린 순간 떨치지 못한 것들과 함께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처음 차를 타는 순간에 위치는 운전하는 미사키와 그 바로 뒷좌석에 가후쿠가 안게 되는 모습으로 비친다. 상하로 된 관계구조에서 함께 하는 시간이 흘러 서로에 대해 진솔하게 터놓을 수 있는 격을 내려둘 수 있는 관계가 되었을 때 가후쿠는 처음으로 운전수 옆좌석에 안게 된다. 이것은 위치가 변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도 담고 있지만 가후쿠가 처음 아내의 자리를 안게 된다는 점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어볼 마음이 생기게 되는 심적 변화의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가후쿠와 이어진 모든 인연들 오토, 바냐 아저씨를 함께 만든 배우들, 드리이버 미사키까지 이들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결국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일부터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무대에서 바냐 아저씨를 연기하는 그는 수화로 대사를 전하는 소냐로부터 우리는 희망을 향해 살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둬야 한다는 큰 위안이 된다. 운전을 하던 미사키는 이 연극을 객석에서 정면으로 보고 있다. 뒷좌석에 모시던 상사에서 옆에 타던 친구로 그리고 정면에서 서로의 삶에 위안이 된다. 예술은 인생에, 인생은 예술에 이 양자는 서로에게 반응하며 스파크를 튀게 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전하던 말을 가만히 떠올렸다.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계속 기억해. 어떤 형태로든. 그게 계속되지. 너와 나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 일하러 간다. - 필립로스 <에브리맨>
첫댓글 크~~역시 믿고보는 소대님 리뷰!!
일본 영화라서 못볼거 같지만...
소대님 리뷰만으로 충분합니다 저에겐^^
여자없는 남자들 읽은지 오래되서 가물했는데 리뷰 읽다보니 머릿속에 영상들이 그려지네요. ㅎㅎ
책도 다시 읽어보고
영화도 꼭 챙겨보겠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은 영화에요 ^^
영화 감상 후 다시 읽어보러 오겠습니다 🥰
어제 극장에서 감상 후 다시 읽으러 왔어요 ^^
원작을 읽지 못해서 어느 부분까지가 감독의 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키의 세계를 확장해서 아주 새로운 영역을 영상으로 아주 잘 구현했다고 생각해요 ^^
소설로 읽었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받지 못했을거 같아요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하게 될거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
수어 포함 동북아를 대표하는 4개의 언어로 하나의 연극이 상영되었다는 점은 약간 뭉클하기도 했고, 주인공이 자신을 진실로 직시하면서 통찰하는 장면, 언어속에서 언어로서가 아닌 서로가 소통하는 장면등 너무 좋은 점이 많았지만
러닝타임이 좀 길다는 점, 마지막 대사에서 너무 친절하게 영화의 메세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긴 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
소대가리님의 멋진 리뷰에 항상 감탄합니다 ^^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