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부르르 떨린다. 나뭇가지를 훑는 바람소리는 아예 비명에 가깝다. 밤이 이슥하도록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댄다. 이렇게 바람 부는 겨울밤엔 무슨 연유인지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날도 몹시 추웠다. 눈이 금방이라도 '펑펑' 쏟아 질 것 같은 캄캄한 밤이었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대어, 사람들은 올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라며 야단스레 말했던 날이었다. 그때 한 아이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아이는 선생님 댁에 공부하러 가야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신작로에 나서자 매서운 바람은 기다렸다는 듯 볼과 귀를 사정없이 할퀴며 달려들었다. 아이가 입은 옷으로는 애당초 칼바람을 막아내기란 틀린 일이었다.
그날도 저녁상을 물린 뒤, 식구들은 라디오 앞에 모여 있었다. 온돌방 아랫목은 장판이 노릇노릇해질 정도로 끓었고, 식구들은 이불 속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윗목 앉은뱅이책상 위의 라디오에서는 깨가 쏟아지도록 재미있는 연속극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이는 십 리도 더 되는 선생님 댁에 공부하러 가야했다.
선생님은 당신의 반 이이들을 위해 아래채에다 공부방을 하나 내어 주셨다. 아이와 몇몇 친구들은 매일 밤 그곳에서 공부 하게 되었다. 윗동네에 사는 친구들은 아이와 함께 가기 위해 매일 같이 집에 들렀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추웠던지 친구들이 오지 않았다.
아이는 춥기도 추웠지만 어두운 밤길을 혼자서 가기가 정말이지 싫었다. 캄캄한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윙윙거리며 불어대는 바람 소리는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밤길을 혼자 가야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싫었던 것은 늘 같이 가던 친구들과 동생들은 다 따뜻한 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추운 밤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주저하던 아이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오늘만 쉬면 안 될까요?"
윗목에서 양말을 꿰매시던 엄마는 짐작이라도 한 듯 고개도 들지도 않고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이까짓 추위를 무서워해선 안 돼!"
아이는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엄마, 딱 오늘 한 번만요!"
그러나 엄마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안 돼, 일어나!"
아이는 문풍지를 떨게 하는 저 칼바람보다 엄마가 더 차갑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애원어린 투정을 부렸다.
"동생들은 다 집에 있는데 나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마당으로 불려 나와 바지를 걷어 올려야 했다. 싸릿대 회초리로 종아리를 내리치시는 엄마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험한 길일수록 아무도 함께 가주지 않는 거야!"
"춥고, 무서워도 혼자 가야 해!"
아이는 그렇게 종아리를 흠씬 두들겨 맞고 막 선생님 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신작로를 훌쩍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간혹 돌부리를 걷어찼는지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걸었다. 캄캄한 밤길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먼지를 일으키는 바람소리만 윙윙 거릴 뿐이었다.
한참을 걷던 아이는 설움이 남았던지 미련이 남았던지 식구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을 자신의 집 쪽을 돌아다보았다. 저만치에는 불빛 반짝이는 아이의 동네가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그마한 집들 가운데 불빛 깜빡이는 아이의 집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장독대 위에 올라 서 있는 하얀 스웨터 입은 엄마의 모습이 조그만 했지만 또렷이 보이지 않는가. 칼바람보다 더 차갑던 엄마, 치맛자락으로 눈물 닦아주며 같이 울었던 엄마가 그때까지 아이를 지켜보며 서 있었던 것이다. 마치 바다의 등대가 된 것처럼 아이가 가는 쪽을 이제껏 지켜보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본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엄마로 해서 길이 환히 밝아졌을까,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무섭지 않았을까. 아이는 캄캄한 신작로를 총총 걸어서 갔다.
어머니는 그토록 나를 강하게 키우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바람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했다. 강단도 없고 재주도 없는 못난 사람으로서 결코 옹골지게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험한 길을 헤집고 예까지 왔다. 이만큼이라도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날 밤 그렇게 지켜봐 주시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저 하늘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