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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란 학자형 정치인을 의미한다.
신진사대부는 유학파 천재 학자인 묵은 이색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성리학을 공부해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세력을 의미한다.
이들은 권문세족과 불교의 부패로 백성들의 땅을 빼았고 민생을 어지럽히는 모습에 고려를 개혁하고자 일어섰다. 그러나 그 과정 중 개혁에 대한 의견 차이로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로 파가 나뉘게 된다.
온건 개혁파는 고려라는 나라를 유지한 채로 차근차근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몽주가 있다.
급진 개혁파는 아예 이성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조를 내세워 새 나라를 세우자는 입장이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도전이 있다.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자는 의견을 처음으로 내비친 인물이며, 잦은 유배 생활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며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이 세워지고 나서는 앞장서서 새 나라의 기바을 다졌으나, 정도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자 이를 우려한 이방원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조선 초기 약 50년의 세월을 집권한 세력은 관학파라고 불린다. 흔히 훈구파와 혼동된다고는 하나, 실재로는 그 성질이 약간 다르다.
관학파는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 출신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나라가 기틀을 잡아가는 동안 집권하였으며, 기본적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해 집현전에서 왕과 논의하는 형식의 관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즉, 엘리트 코스를 밟아 관직에 오른 이들이라는 의미이다. 그 덕분에 차후 조선을 집권하게 될 사림파에 비해 실무능력이 월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는 비교적 옅었다고 하며, 성리학 이외 사상 및 학문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 기술적으로 조선이 가장 발전하였을 시기도 관학파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아무래도 새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였기에 절대왕권과 재상중심 정치를 두고 의견이 많이 갈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관학파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사건인 계유정난 이후 훈구파와 은둔 세력으로 갈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계유정난 공신 세력에 속한 관학파들이 그대로 훈구파가 되면서 후대에 훈구파와 관학파를 혼동하는 일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은 몇몇 관학파 인물들은 관직을 버리고 지방으로 내려가 자연스레 성리학에 빠져들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사림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훈구파는 15세기의 주도 세력으로, 조선을 세운 개국공신이자 계유정난의 공신이다. 훈구파라는 의미 또한 훈장이 많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 마디로 나라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집단이었다는 의미이며, 부패한 관료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학문 또한 순전히 학식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관직에 오르기 위한 학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인지 관학파도 그렇고 훈구파도 그렇고 성리학 이외 사상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성향을 띠었다고 한다.
사림파는 16세기 주도 세력으로, 정몽주에서 길재로 이어지는 온건파 사대부의 후인들이다. 그렇다 보니 조선이 세워지고 난 후 지방으로 내려와 세력을 형성하였기에 사림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들은 세력의 뿌리를 지방에 두고 있기 때문에 향촌의 자치를 추구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진정한 선비로서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또한 성리학에 대한 믿음과 사상이 깊어 이외 사상을 배척하는 행보를 보였다.
제9대 왕 성종은 조선 최초로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른 이였다. 그러나 정희왕후의 모범적인 수렴청정으로 큰 탈 없이 성인이 되어 명군으로서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훈구파의 권력이 막강하자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대신을 대간으로 견제하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지금의 대간이 대신이 되므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실패하였다.
다음으로는 무관을 조정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이 또한 법안 및 무관이 실질적 업무 수행 능력이라는 문제에 막혀 실패하였다.
그렇게 끝끝내 성종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후예, 즉 사림파를 정계에 들이는 것이었다.
이때 성종이 등용한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김종직이었다. 성종은 김종직을 삼사(사헌부, 사감원, 홍무관이라는 세 기관을 일컫는 말로, 언론 기관을 의미하는 말이다.)로 등용하였다. 이에 따라 김종직은 정치적 입지나 영향 같은 건 신경쓰지 않고 간언하였고, 이때 주장한 사상 중 대표적인 것들이 실천윤리 중시, 직분 강조, 왕도정치 추구 등의 성리학적 사상들이다. 이를 성종이 밀어줌에 따라, 김종직은 정계에서 사림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첫 인물로서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김종직의 입장 상, 당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훈구파에 의해 김종직 및 그의 일파가 숙청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4대 사화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과정 중 보다 힘이 강했던 훈구파에 의해 사림파가 숙청당하는 네 번의 큰 사건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중 무오사화는 김종직과 그의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훈구파가 계획한 사화이다.
갑자사화는 10대 왕 연산군이 개인의 복수심 및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파와 훈구파까지 숙청한 사화이다.
그리고 기묘사화는 중종반정으로 관료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하루 아침에 왕위에 오른 11대 왕 중종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인 조광조를 등용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상징적인 인물로,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의 제자이다.
그는 굉장히 개혁적인 사상을 지녔던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얻은 이후로 소격서 폐지,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 등을 진행하였다.
소격서 폐지는 조광조의 사림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소격서란 나라에 정통적으로 이어져 오던 단군왕검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그러나 성리학 이외 사상을 배척하던 조광조는 도교 행사인 소격서 또한 폐지하였다.
그리고 현량과 실시는 훌륭한 인재들을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능력에 상응하는 관직에 앉히는 제도를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세력이 없었던 조광조가 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추진한 제도로, 이때 현량과를 통해 관직에 오른 이들 중에는 사림파 인물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위훈삭제는 당시 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훈구파를 제대로 건드리던 사건으로, 이는 훈구파들의 과장되거나 만들어진 공을 지우는 일이었다. 중종반정 때에는 모반을 준비한 이들 이외에도 전반적으로 모두 모반에 가담하는 분위기였다. 즉, 당일 날 모반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자 너도 나도 모두 모반에 가담하였고, 결국에는 이들이 모두 공신 목록에 올라 막대한 포상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나라 살림은 거덜나고, 관료들의 횡포는 거세졌는데, 이런 와중 조광조가 약 100인의 공신 목록 중에서 70여명을 제외하거나 낮추자는 의견을 낸 것이었다.
그리고 중종은 이러한 의견을 모두 들어주었다. 하지만 중종은 이러한 급진적인 조광조의 개혁 방식에 마음이 식은 상태였고, 또한 훈구파 역시 조광조를 배척할 궁리를 하던 와중이었다.
결국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일으켜 조광조와 그의 일파를 내치자는 상소를 올렸고, 중종은 이를 허가하며 기묘사화가 벌어졌다.
이후 척신 세력의 세력 다툼이었던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난 이후로도 사림은 끊임없이 번창하여 마침내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 과정에서 훈구파는 사림파로 넘어가거나, 혹은 세력 다툼 도중 목이 달아나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이가 들어 죽음을 맞이하는 등, 그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사림파가 집권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사림파가 달고 있던 양 날개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사림파가 지방에 세운 학교로, 오늘 날의 대안학교와 비슷한 개념이다. 사림파는 서원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종종 정치에 대한 논쟁을 나눌 때에도 서원 공간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퇴계 이황이 백운동서원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서 사림은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사액서원이란 개념은 나라에서 공인한 교육 기관이라는 의미로, 노비와 땅을 지원 받고 나라에 내는 세금이 면해지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림은 총 4번에 걸친 사화가 있고 난 후로도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해 계속해서 정계로 사람을 보낼 수 있었다.
향약은 사림파가 지방에서 만든 자치 규약으로, 한창 훈구파가 정계에서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지방 관리들을 약화시킬 때 사림파가 지방의 신진 세력으로 우뚝설 수 있었던 법안이다. 당시에는 현대와 같이 SNS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나라에서 새로운 법안을 계정한다 할지라도 지방에서까지 법을 받아들이기에는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방은 주로 자치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때 사림파가 향약과 소학(8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유학을 공부하도록 하는 학문)을 배급하면서 지방에 세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그렇게 정권을 장악한 사림파는 이후 붕당 정치를 사작하면서 부터 점차 변질되어가기 시작한다.
붕당이란 정치적 이념, 학문적 경향, 자연적 차이로 이루어진 당파 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사림파가 처음 분당되는 건 14대 왕 선조 집권 시기, 척신 정치 청산 문제와 이조전랑 임명 문제를 두고 의견이 갈리는데서 시작하였다.
척신 정치 청산 문제는 13대 왕 문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며 문정황후가 수령청점하였을 시기, 정계의 중추를 차지하였던 척신 세력들에 대한 처부 문제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의견이 갈렸는데, 그중 신진사림의 입장은 외척은 배척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기성사림은 외척 중에서도 믿을만한 인물은 기용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이조전랑이란 정계에 인사권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관직으로, 직급으로 보았을 때는 그리 높지 않으나 원하는 인물을 등용할 수 있으며 자신의 후인을 직접 임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권한이 막강했던 직책이었다. 그리고 심의겸이라는 인물 뒤로 김효원이 이 이조전랑위에 임명될 뻔 했으나, 이를 심의겸이 반대하였고, 이후 여차저차 하여 김효원이 이조전랑에 임명되었다가 물러날 때 심의겸의 동생인 인물이 후인으로 추대댔으나 이를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러한 두 문제로 생긴 세력 간의 갈등에 따라 사림파는 두 당파로 분당되었고, 그렇게 동인과 서인이 탄생하였다.
동인은 이황, 조식 등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 주류 세력이었고, 서인은 이이, 성혼 등으로 대표되는 기호학파 주류 세력이었다.
동인은 동인의 대표 인물인 김효원의 거처가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마찬가지로 서인은 서인의 대표 인물인 심의겸의 거처가 경복궁 서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정치 초기에는 나름대로 건전한 정치가 이어졌다. 각 붕당은 상대 집단을 견제하며 보다 올바른 정치를 해 나가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 역시 얼마 가지 못하고 결국 인간의 사리사욕에 의해 무너진다.
붕당 정치 초기에 두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율곡 이이의 존재가 그 원인이었다. 이이는 이후 동인이 주류 세력이 되면서 동인이 이이를 서인에 포함시켜 버림으로 인해 흔히 서인 측 인물로 받아들여 지지만, 사실 이이는 동인도 서인도 아닌 중립을 지키는 인물이었다. 가능한 세력간의 다툼을 중재하는 중재자로서 정치적 색을 띠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이를 선조가 밀어줌에 따라 당분간은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후로는 동인이 정치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도 잠시, 1589년 동인 측 인물인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키려다 사전에 붙잡히는 일이 있고 이에 따라 서인인 정철이 동인 측 인물들을 숙청하고자 나서면서 기축옥사가 일어난다. 기록에 따르면 기축옥사로 인해 약 10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하나, 이는 지난 4대 사화를 전부 합친 수치인 500여명의 사상자보다 많은 수이기에 다소 과장되었다고 생각되어진다. 또한 현대에는 이 기축옥사 사건을 선조가 계획했다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 근거로 기축옥사가 마무리 된 이후 선조는 금방 정철을 내쳐버리기 때문이다.
1591년 서인 측 인물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이 일어난다. 세자 책봉 문제로 우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내세웠으나 선조가 정철을 벌하였고, 이에 따라 동인이 다시 동인이 정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정철 중심의 서인을 처벌하는 문제를 두고 남인과 북인으로 다시 갈라지게 된다.
임진왜란 까지는 류성룡을 필두로 남인이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로는 북인이 의병장을 여럿 배출하여 남인과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는다. 그리고 북인은 선조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나뉘어진다.
당시 광해군은 선조가 도망가고 난 이후 전국에서 왜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여러 공을 세웠던 반면, 영창대군은 아직 어리고 공이 없었으나 그의 어머니를 선조가 왕비로 들이면서 명분이 생겨났다. 그러나 잡소리가 좀 있어도 결국 광해군의 공이 작지 않아 왕위에는 광해군이 오르게 되었다.
15대 왕 광해군을 몰아내기 위해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이후 기호사림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집권하며 남인을 기용해 서로 공존, 상생하는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인조의 권력이 강했었을 때 뿐, 병자호란 이후 왕이 오랑캐에게 고개 숙이는 큰 굴욕을 벌인 이후 왕권이 약해짐에 따라 서인이 득세해 남인을 탄압하였다.
서인의 주요 관료들을 중심으로 권신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점차 정기는 혼란을 겪게 되고, 이후 심기원이 모반을 준비하다 걸려 김자점에 의해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게 된다. 이때 심기원은 자신에게 능지처참의 형을 내린 김자점을 저주하며 그 또한 능지처참 당하리라 하였는데, 이후 김자점 역시 똑같이 모반을 준비하다 왕에게 걸려 능지처참 당하는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혼세를 겪고 난 후, 효종과 현종 대에는 왕은 신하를 억압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았으며, 신하 역시 왕권이 약하다고 해서 왕을 허수아비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서인과 남인도 가능한 유혈 충돌을 피했으며, 대부분 유배나 곤장 형 정도에서 마무리 되는 등 서로 조심하고 선을 정해 정치를 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를 후대에서는 붕당 정치사 제2기라 칭하기도 하며 그나마 붕당 정치의 정신이 나타나는 시대라고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도 잠시일 뿐, 결국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인간은 과거를 잊고 순간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조선 19대 왕 숙종은 왕위에 올라 환국 정치로 통치하였다. 환국 정치란 직역하면 판을 바꾼다는 의미로, 숙종은 이를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 사이에서 권신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680년 남인인 허적과 허견이 왕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여 이에 대한 처벌을 두고 서인이 남인 탄압 강경파인 노론과 남인 탄압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어진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뭉친 세력이였으며, 소론은 이러한 송시열의 우유부단함에 반발하는 신진세력이 뭉쳐 만들어진 세력이었다.
1689년 숙종이 인현왕후 사이에서 후사가 나질 않자 희빈장씨를 왕후로 올릴까 고민하였다. 이에 서인이 인현왕후를 계속 왕후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숙종이 희빈장씨를 왕후로 올리며 송시열 중심의 서인 세력이 몰락학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1694년 숙종이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앉힐까 고민하였고, 이에 남인이 반대하였으나 숙종이 인현왕후를 다시 왕후로 앉히며 송시열 등의 서인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여러 차래의 환국을 지내며 각 집단들은 다시 타 붕당을 탄압하고자 하였고, 그 때마다 숙종은 각 집단의 균형을 맞추어 붕당간의 갈등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도 21대 왕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점차 사그라들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추진하며 각 붕당에서 내세울 수 있는 관직의 수를 제안하였고, 유생들이 공부하는 성균관 앞에는 탕평비를 세웠으며, 사림파의 뿌리인 서원을 철폐하며 학자들의 세력 기반을 차근차근 무너트려 나갔다.
이후 인조 집권 시기에는 붕당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다싶이 하였다고 한다. 주요 요직에는 왕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척신 세력을 앉히는 등 점차 정계는 척신 정치의 색을 띠게 되었고, 훗날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노론이 시파와 벽파로 갈리었다고 하나, 이는 확정 지을만한 내용은 아니라고 한다.
애초에 붕당이나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라고 하는 구분은 명확하지 않으며, 어느 정도 추상적인 성질을 띠기도 한다.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집권 세력이 바뀌던 시기에는 한 집안 내에서도 사상의 차이에 따라 파가 갈리기도 하였다고 하며, 한 인물이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넘어가기도 했을 정도라고 한다.
어쨌거나 신진사대부부터 시작해서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를 지나 붕당 정치를 거친 학자들의 정치사는 이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번 발표를 준비할 때, 나는 기본적인 자료를 공부하고서 금방 ppt 작업을 마무리 하였다. 왜냐하면 이번 공부를 통한 나의 배움에 구색이 금방 잡혔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번 공부를 통해 배운 점은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한 순간, 누군가의 투철한 개혁정신이 빛을 발할 때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질되며 재해석되게 된다. 내가 이전 공부로 도산서원의 퇴계 이황 공부를 했기 때문일까. 나는 조선 정계의 역사를 어느 정도 퇴계 이황의 관점에서 살펴보게 되었다. 인간의 선한 본성인 도덕감정 사단을 이야기하는 성리학자들의 정치사. 그러나 실상은 일반감정 칠단에 이리 저리 휘둘리며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권력을 남용하는 실정이었다. 이들이 정말 유학자들이 맞는 건가? 공자의, 주자의 후인들이라 자처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학자들이 맞는 건가? 설령 오랜 악업의 반복 끝에 기적적으로 눈을 뜨는 시대 또한 존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잠시일 뿐, 인간에게 과거란 너무나 멀며, 욕망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이는 단 한 명의 성군이 바꿀 수 있는 흐름도 아니며, 단 한 명의 성인이 뒤바꿀 수 있는 바람이 아니다. 그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몰아치는 파도에 허우적댈 뿐,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이러한 파도 속에서도 유독 눈에 뛰는 몸짓을 남긴 사람들은 성리학의 본질을 이야기 하였고, 나 역시 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는 있으나, 결국 전반적인 역사를 공부한 내가 배운 바는 하나였다.
이쯤에서 이제 이 배움을 나의 일상과 연결 지을 순간이다. 나는 이 역사를 공부하며, 결국 내 삶 또한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알았다. 이는 내 일상도 순간의 욕구에 이리 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기발이승의 행태라는 것이다. 그러다 어찌저찌 하여 배움의 순간을 맞닥트리게 되면, 그 순간에는 정말 충만한 마음으로 마치 이거면 다 되었다 싶은 기분이 든다. 이제 다 된 것처럼, 앞으로의 삶 또한 충만할 것 만 같은 마음에, 딱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기만 하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언제나 배움의 순간이 있은 다음 날, 눈을 뜬 나는 가장 먼저 이런 생각을 마주한다. '아, 일어나기 귀찮다.' 고귀한 경험의 무색해질 정도로 어이없는 고민. 그리고 그에 타협하는 스스로의 행태. 자신이 미워지는 순간이다. 아니, 나 분명 멋진 순간을 경험한 것 같은데. 나 분명 대단한 배움을 얻은 것 같은데. 왜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지? 그러나 이는 그나마 오래 간 경우이고, 대부분은 배움의 순간을 경허한 당일 밤만 되어도 금방 식고 만다. 딱 한 번 배움의 여운이 며칠 간 적이 있기는 하나, 지금 생각해 보면 배움에 여운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 같다. 그니까, 배움이라는 건 그냥 그 순간으로 땡. 끝이라는 말이다. 그럼 그 다음 순간부터는? 나는 분명 방금 전에 대단한 경험을 한 대단한 사람인데? 다음은 또 그 순간의 내가 책임지고 배워야 할 일이지, 배움이라는 건 시간을 따라 이어지는 게 아니다. 매 순간, 나는 심판대 위에 오른다. 좀 무서운 표현으로는 신은 매 순간 우리에게 죄를 지을 권리를 준다. 그러니 그 순간들에 항상 교만하지 않고 배우고자 하는 학생 정신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 테고.
어쨌거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한 순간 깨달음을 얻고 계속 성인이었을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수양을 하다 깨달음을 얻고, 항마촉지인을 지으며 마침내 마를 물리친 이후로는 줄곧 부처였을까? 설마. 그들도 사람인데. 그들에게도 칠정이 있고, 본성인 사단을 마주한다고 해서 그것이 칠정을 물리쳐 주는 것도 아닌데. 결국 부처님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마를 물리친 다음 탈탈 털고 일어났을 때, 또 새로운 모습을 띠고서 악마가 나타났을 것이다. 결국 부처님도 똑같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부처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부처님은 악마가 다시 나타날 것이란 사실을 알았으리란 것이다. 그리고 그 악마가 악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에 휘둘리지 않은 채로 자신의 본성에 따라 부처로서의 삶을 살았으리란 것이다. 아마 내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 있었더라면, 그 상황에 뭐야 이거? 하고는 악마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혹은 악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다시 살았을 것이라는 거다. 즉, 내가 저 ppt 마지막 장에 멋드러지게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건 존재한다."라고 써 놓은 말이 뭐냐면, 결국에 악마를 피할 수는 없다는 거다. 내가 뭔 짓을 해도 악마는 언제나 내 곁에 있고, 내가 뭘 어떻게 하려 해도 나는 칠정에 휘둘려 실수를 하고 결국 내 주위 누군가를 상처입힐 거라는 의미이다. 그게 몸을 입고 온 내가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업보니까. 암만 부정하더라도, 나는 단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이 모든 악한 기운을 모조리 물리치는 그런 기적을 행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저 찬찬히.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마음을 가라앉힌 채로. 나는 지금 내가 뻗을 수 있는 나의 걸음을 내딛으면 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 한 걸음. 이 걸음을 이야기 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주저리 주저리 내뱉고야 말았다. 그러나 스스로가 느리다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 걸음을 내딛을 때 조급한 마음으로 성급한 한 걸음을 내딛고, 스스로가 빠르다 생각하는 사람은 다음 걸음을 내딛을 때 근심 걱정으로 걸음을 제대로 내딛지를 못하게 된다. 결국 중도를 내딛는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이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말들을 속에서 부터 끄집어 내며 사유하고자 하고 있음에도 명확한 형태로 와닿지 않는 것처럼. 그렇기에 멋드러지게 "세상에 어쩔 수 없는 건 존재한다."같은 짧은 문장으로 이 모든 걸 함축하여 담아내고자 했지만, 정작 내 스스로가 이 모든 의미를 이 한 문장을 통해 사유하지 못하였기에 결국 말이 길어졌다. 결국 모든게 다 나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며, 이 어쩔 수 없음에 해당하는 문제로 인한 것이다. 사실, 이게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저 내 의욕 부족이거나 다짐 부족인지 그 경계도 애매모호하기는 하지만, 이에 관하여 너무 깊이 사유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해로움으로 이만 사유는 마치도록 한다.
말이 많이 길어졌다. 이것으로 나의 훈구파와 사림파 발표를 마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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