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삶이 소박한 기쁨과 흥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의 삶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처럼 경이와 기쁨, 축제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신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언급하면서 두 번째로 기쁨을 들고 있다.(갈라 5,22-23) 그는 신자들에게 언제나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참조:필리 4,4)
바오로에 따르면 우리가 언제나 기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노리치의 줄리안은 말한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돌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그분 사랑을 깨닫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
언제나 기뻐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뜻이라는 바오로의 말에 어떤 이는 “사람이 어떻게 늘 기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며 어이없어 할지도 모른다. 교부 크리소스토모의 다음 강론이 이 물음에 답한다.
「‘사람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기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우리한테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잃을 수 있고, 친척보다 더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 재산을 잃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명예가 훼손되어 상심하는 경우도 있다. 사적 삶에서나 공적 삶에서 우리를 슬픔으로 내몰 수 있는 요소들은 곳곳에 잠복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기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우연히 이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을 주님 밖에서 기뻐하는 것들은 모두 변화무쌍하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며 쉽게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사람,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참된 기쁨 안에 머물 수 있다.
그에게 슬픔이 다가오더라도 그의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해도 그의 기쁨은 증가된다. 채찍질, 죽음, 상실, 거부, 불의 등이 그를 괴롭혀도, 그것이 하느님 때문이라면, 그들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 찬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누구도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이 크리소스토모의 인용문을 요약하자면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 받은 이의 표징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지속적으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다.
기쁨과 즐거움은 다르다. 무엇이 이루어지면 나는 기쁠 것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쁨을 미룰 이유가 없다. 우리의 기쁨은 주님 안에 그 근원을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상황에 따라 즐거워하다 우울해한다.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즐거움과 우울이라는 감정이 널뛰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쁨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주님께 그 바탕을 두기에 늘 한결같다.
즐거움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이지만 기쁨은 항구하고 영속적이다. 그러니 기쁨을 잃는다는 것은 신앙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없다면 우리 신앙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기쁨이 새고 있다는 말이다.
로마 교황청은 시성 조사 때 그 사람이 살아생전 복음을 사는 자로서 기쁘게 살았는지를 본다. 이러한 조사는 어쩌면 유명한 라틴어 격언에 근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울한 성인도 없고, 기쁨에 찬 마귀도 없다.’
예전에 마더 데레사의 시성 조사가 진행 중에 있었다. 먼저 그분이 기쁨의 삶을 살았는가가 첫 조사 대상이었다. 그런데 수녀님이 하느님의 부재(不在)로 영적 위로를 느끼지 못하고 때로 하느님 존재에 대해 회의까지 했다는 사실이 최근 보도되었다. 이 사실은 수녀님이 영적 고해신부들과 나눈 면담이나 그들에게 보낸 서신을 바탕으로 출간된 <마더 데레사: 나의 빛이 되어라>에 나온다. 이 책의 한 부분이다.
「신부님, 제 나이 49세 또는 50세쯤부터 지금까지 이 고통스러운 상실감, 말할 수 없는 어둠, 이 고독감, 하느님께 대한 지속적 갈등이 제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주어 왔습니다. 제 마음으로도, 제 이성으로도 제 영혼에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는 비어 있습니다. 제 안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갈망으로 인한 고통을 그렇게도 깊은데, 저는 그저 바라고 또 바랄 분, 그것이 제가 느끼는 전부이고, 그분은 저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저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저는 자주 제 마음이 ‘나의 하느님’ 하고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만 아무 응답도 오지 않습니다.」
일부 미디어와 회의론자들은 데레사 수녀의 영적 메마름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신앙이란 것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고 목청을 높였다. 나아가 어떤 신자들은 데레사 수녀가 영적 메마름과 고통을 느끼며 살았다면 당연히 기쁘게 살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질문했다. 그런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데레사 수녀의 하느님 부재 체험은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라며 “신자라면 누구나 하느님의 침묵을 알고 있으며 유별난 것도 아니다. 때로는 비신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하느님의 침묵을 견뎌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교황님의 이러한 말씀은 데레사 수녀의 시성에 어떤 하자도 없다는 뜻으로 한 말씀이다.
이렇게 접근해 보자. 어떤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현존 안에서 일평생을 보냈다고 주장을 해도, 그 사람의 생애에 어떤 열매가 없다면 그러한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랫동안 영적 위로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하느님을 향해 “주님은 저의 피난처이십니다”라고 사랑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완벽한 신앙고백이다. 데레사 수녀가 영적 메마름을 느끼면서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대중 앞에서 용기를 내어 꾸준히 연설을 했고(수녀 자신은 성격상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또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웃음을 보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영적 위로가 전혀 없는 가운데 오직 주님을 위해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데레사 수녀가 감각적 위로가 없어 힘들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쁨 없는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사실 가톨릭 신비주의 전통에서 데레사 수녀가 겪은 영적 어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수많은 성인이 겪은 현상이다. 그러나 성인들이 하느님께 영적 위로를 받지 못했다 해서 내적 기쁨마저 잃었던 것은 아니다. 데레사 수녀는 계속되는 영적 고독을 느끼면서, 그러한 고통이 자신의 소명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자 사명의 가장 어려운 부분임을 자각하면서도 영적 지도 신부에게 이렇게 썼다.
“하느님의 처분에 따를 것.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이 바라시는 만큼 저에게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 어둠이 다른 사람에게 빛이 된다면, 아니, 누구에게 그 무엇도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들판에 핀 하느님의 꽃이 되어 더없이 행복합니다.”-노이너 신부에게 보낸 편지, 1961.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