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인생 / 신현식
고속도로가 폭파되어 무너져 내린다. 자동차가 튕겨져 나가 헬리콥터를 떨어뜨린다. 브루스 윌리스는 그 속을 종횡무진으로 악당들을 쫓고 있다. 영화 ‘다이하드’를 보고 있다.
그동안 영화관 왕래가 뜸했는데 딸이 예매해 주어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총각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사운드 오브 뮤직’, ‘남과 여’, ‘닥터 지바고’, ‘25시’, ‘아라비아 로렌스’, ‘007 시리즈’와 왕우, 이소룡의 무협영화들을 보았다.
영화를 많이 본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부모님께 책을 산다는 핑계로 자금을 조달했으니 개봉관은 엄두도 못 내고 동성로의 송죽극장, 자유극장 같은 재개봉관을 들락거렸다. ‘ 형제는 용감하였다’, ‘상류 사회’, ‘초원의 빛’, ‘성숙 20세’ 같은 영화를 그곳에서 봤다.
중학생 때는 학교에서 단체 관람도 많이 했었다. ‘벤허’, ‘퀴바디스’, ‘잔 다르크’, ‘대장 부리바’ 같은 사극을 많이 보았다. 물론 우리나라 영화도 있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성춘향’, ‘의사 안중근’, ‘유관순’ 같은 영화가 다 그때 본 영화들이다.
그 시절에는 서부극이 많았다. 알란 랏드의 ‘셰인’, 버트 랑카스트의 ‘베라크르즈’, 존 웨인의 ‘역마차’, 게리 쿠퍼의 ‘하이눈’도 다 그때 본 영화들이다. 칼싸움하는 영화도 가끔 있었다. 쟌 마레, 스튜어트 그렌저가 나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스카라무수’ 같은 영화들이다.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명화들도 그때 보았다.
내가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남문시장 부근에 ‘대도극장’이 개관을 했었다. 그날, 할머니를 모시고 온 집안 식구가 영화를 보러 갔었다. 생전 처음 간 극장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검은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니 무대에 흰 천이 늘어져 있고 그 위에 활동사진이 비춰졌다. 그때 본 영화가 ‘숙영낭자전’이었는데 흑백 영화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변사가 배우의 대사를 대신했었다. 요즘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변사의 대사가 그때는 신기하고 황홀했었다.
그 시절엔 문화 교실이라는 것도 있었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위하여 아침 일찍 영화를 상영했었다. ‘백설 공주’, ‘피터 팬’ 같은 영화를 문화 교실에서 보았다.
그 당시 유명한 극장이 또 하나 있었다. ‘육군중앙극장’이었는데, 지금의 대구시민회관 자리의 붉은 벽돌의 건물이었다. 아마 6.25 때 군인회관으로 쓰였으리라. 아무튼 대구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이었다. 그곳에서는 외국 영화만 상영했는데 요즘 같은 자막 처리는 없었고, 변사가 그것을 대신했었다. 그때 본 영화들이 ‘코만치’, ‘아파치 요새’, ‘제5전선’, ‘대열차 강도’ 같은 영화들이었다.
영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설극장이다. 말뚝을 박아 두꺼운 천으로 담장을 쳐 놓은 그야말로 노천극장이었다. 넓은 공터에는 가끔 가설극장이 섰는데 교육대학 부근의 우리 동네에는 영선못을 메우고 난 공터에 자주 섰었다. ‘심청전’, ‘임꺽정’, ‘남자 식모’, ‘사장 딸은 올드 미스’ 같은 영화들을 가설극장에서 보았다. 중간 중간 필름이 끊어져 고함을 지르거나 휘파람을 불어 대며 소란스러웠지만 별빛 아래 부채를 부치며 보는 영화도 나름대로 낭만이 있었다.
나는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시절의 문화생활이란 영화가 전부여서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속 상상의 세계가 좋았다. 두꺼운 문을 열고 검은 커튼을 걷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현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의 세계가 내 앞에 펼쳐졌다. 나는 곧바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와 같이 웃고 울었다. 가난의 고통도, 슬픔도 외로움도 다 영화가 달래 주었다. 그래서 흘러간 영화 속에는 지나간 내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나는 영화가 좋아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었다.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영화에 빠져 있던 그때가 나의 황금 시절이었고, 내 삶의 원천이었다.
브루스 윌리스로 인하여 엄청난 돈을 거머쥐려는 해커들이 소탕되었다. 영화지만 어떻게 그런 가공할 힘이 나올까. 제임스 본드, 람보, 스파이더 맨, 록키보다 브루스 윌리스는 더 강한 사니이인 것 같다.
이슥한 밤, 극장 문을 나서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외지고 어두운 길이다.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다. 불한당이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다 쓰러뜨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영화는 참 대단하다. 젊어서는 근심 걱정을 잊게 하더니 이렇게 세월까지도 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