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역사적 용어 연구 1) '中國'이란 2) 국호 '조선' 3) 은나라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 머리말 은[殷]주[周] 교체기 朝鮮으로 갔다는 箕子와 箕子朝鮮은 부여[夫餘]에서 부터 고구려[高句麗], 고려[高麗], 李朝鮮까지 무려 2천이 넘게 정설로 받아들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철저하게 농락[籠絡] 유린 당했고, 일제의 犬가된 조선의 일부 학자들로 인해 일제 강점기 부터 광복이전, 광복이후를 거처 지금까지 미제[未濟]의 사건으로 몰고와 '기자조선'은 허구의 역사 또는 단군조선의 변방 제후국 정도로 보고 있다. 기자조선의 대한 견해로 ① 기자와 기자조선은 역사적 사실이기때문에 기자조선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견해.②기자조선은 역사적으로 성립될 수 없으나 옛 조선 변방에 국한된 정권이나 세력이라면 동래 자체는 가능하다는견해.③해씨조선등이 기자조선이라는 견해④기자조선은 후대의 조작된 것이므로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날조 되었다는 견해,로 여러가지 설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필자는 ① 기자와 기자조선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기자조선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를 깨우쳐 주신 박대종 소장님, 이형구 교수님, 심백강 박사님, 조원진 교수님등에게 감사드리며 필자는 이분들의 글들을 인용하여 기자조선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2. 역사적 용어 연구
1)中國이란 中國이란 용어는 고대에서는 天子國 또는 大國을 일컷는 용어로써, 현제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사뭇 다른 용어임을 깨닳을 필요가 있다. 그와 관련하여 언어를 연구하시는 대종 언어연구소 http://www.hanja.co.kr/ 소장이신 박대종 소장님께서는 제하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종대왕 당시 훈민정음 언해본을 통?여 밝힌 바 잇드시, '중국'이란 천자[황제]가 잇는 나라를 의미?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인 호금도는 천자가 아니기 ?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은 옛날의 '중국'과 그 의미 면에서 절대 같지 안습니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을 줄여서 '중국'이라 할 수 잇지만, 그 줄임말인 '중국'은 옛날의 천자가 잇는 '중국'과는 다른 말임을 ?달아야 ?니다. ?라서 이러? 용어혼란을 막기 위?서는 종전처럼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지칭? ?는 그 줄임말을 '중국'이 아닌 '중공'으로 ?는 것이 합당?다고 봅니다. 참고: <훈민정음 언해본>
또 같은 글에서 中國과 中原은 같은 말이며 고대 고대에 동아시아의 조상들은 '세계'라는 말을 '천하'라 ?엿스며, '천하'의 圓(원)은 크게 3분되는 바, 제일 안?(안쪽) 중심의 원은 바로 천자가 잇는 '중국'이며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둘러? 두번ㅅ재 원은 '제후들이 거?는 지역 ?는 나라들'이며, 그보다 외곽에 잇는 마지막 원은 천하의 변방인 '夷'의 지역입니다. 동이에서의 '夷'는 중심에 잇는 중국과 비교?여 '변방'의 의미가 강조된 말입니다. 물론, 제일 밧갓?(바깥쪽) 夷는 ?다시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으로 구분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2) 국호조선 우리 역사에 있어 조선이라는 국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듯 사용됐듯이 무려 2500년이 넘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고조선, 단군조선, 왕검조선, 전조선, 후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근세조선,이씨조선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역사학계'얘기하는 '고조선'의 용어 부터 살펴보자. ①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까지를 고조선의 포함시키는 학자들.
지금은 명칭이 바뀐 교육인적자원부의 국제교육진흥원 사이트를 보면, ‘한국의 교육’란에 외국어로 “고조선(古朝鮮)은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강력한 국가체계를 취하기 위해 팔조법금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교화하였다.”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현 중고교 국사책과 국가공무원 7,9급용 국사 수험서 등에서는 팔조법금은 고조선사회의 기본법이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정부의 교육방침이 담긴 이들 국사 서적에 기자 또는 기자조선이란 문구가 보이질 않는다. 고조선 부분은 단군조선에서 곧바로 위만조선으로 건너뛰었고, 팔조법금은 출처인 한서지리지를 언급하면서도 기자조선이 아닌 고조선의 법으로 기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체계에서 기자조선을 떼어내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면 기자가 제정한 8조법금도 삭제해야 도리다. 기자는 왕따 시키면서 그가 만든 8조법금만은 한서지리지를 왜곡하여 ‘고조선의 것’으로 돌려 크게 써먹는 것은 이율배반적 행동으로 보인다, 라고 말씀하셨다.
살펴보건대, 古朝鮮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삼국유사는 단군조선과 기자에 대해 서술한 다음 단군과 기자조선만이 옛 조선이라고 명 명[命名]하였다. 고조선이라는 용어를 쓸 때 학자마다 다르고 그 학자를 따르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막연히 고조선이라고 하면 어떤 조선을 얘기하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팔조법금을 제정한 사람은 후 조선의 서여대왕이시다. 박대종 소장님의 말씀처럼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왕따시키면서 그가 제정한 팔조법금을 한서지리지를 왜곡하여 기자조선이 아닌 고조선으로 크게 써먹는 것은 누가 봐도 이치에 맞지가 않다. 삼국유사’에는, 처음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국명을 ‘조선’(朝鮮)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단군께옵서 세운 원조 ‘조선’이 고유 국호를 사용치 못하고 이씨왕조가 세운 조선에 밀려 푸대접을 받은 꼴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용어 혼란을 막기 위해 단군께옵서 세운 조선을 조선으로 명명하고 다음으로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 혹은 근세조선이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3. 기자조선의 쟁점
1) 일본, 기자조선 빼자. ① 일제가 내세우는 기자조선 말살의 논거의 요지를 살펴보면,...箕子는 中國사람 이므로 箕子朝鮮史는 朝鮮史에서 제외[除外]하여야 하고, 중국역사[中國歷史]의 일부로 취급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있다.(1934년 7월 30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제8회第8會 위원회간사委員會幹事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보고報告, p. 68)[李相時, <겨레의 바른 正史>(1987), p. 66]
② 箕子朝鮮의 정체[正體] : 周의 책봉[冊封]을 받은 箕子가 신례[臣禮]를 닦아 周에 들어왔으므로 武王이 그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정치[政治]의 규범을 물었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李明植, <韓國古代史要論>(형설출판사, 1983), p. 42]
살펴보건대, 일본은 조선사를 새롭게 재편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주무왕의 책봉을 받은 신하로써, 중공사람 이므로 제외 하여야 하고 중공역사의 일부로 취급한다고 하고 있다. 기자는 주 무왕의 스승인데 어떻게 책봉을 받은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결코 중공의 역사가 될 수 없다. 4-1,3-4참조
2) 기자, 그는 누구인가! 기자는 은나라 천자天子 신의 제부諸父(아버지와 한 항렬)로 무을 천자의 차남 휘리諱理의 아들이다. 사마정(司馬貞)이 말하기를,“사마표(司馬彪)는 기자의 이름이 서여(胥餘)라고 하였다. 신(辛)이(세상에서는 그를 주(紂)라 불렀다)이 처음에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반드시 옥술잔을 만들 것이고, 옥술잔을 만들면 반드시 먼 외방의 진기하고 괴상한 물품을 좋아할 것이다. 수레와 말과 궁실을 호화롭게 꾸밀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진작될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주가 음란한 행실을 하자 기자가 이를 간하였으나 주가 따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떠나는 것이 옳다.” 하니, 기자는,“남의 신하가 되어 간하다가 듣지 않는다고 해서 떠난다면 이는 임금의 악을 드러내어서 스스로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는 것이다. 나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하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거짓 미친 체하여 남의 종이 되었다가 마침내 숨어 버리고는 거문고를 타면서 스스로 슬퍼하였다.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이를 ‘기자조(箕子操)’라고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전한다. 고시기(古詩紀)의 기자조(箕子操)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아, 주왕이 무도하여 비간을 살해했도다. 아아, 어찌하여 홀로 옻칠을 해 몸을 헐게 하고 머리를 풀어 헤쳐 미친 체하였나. 지금 종묘를 어찌하리오. 하늘이여, 하늘이여, 돌을 안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구나. 아아, 사직을 어찌하리오,라고 전한다.
상서대전등 에서는 주나라 무왕이 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였더니 기자가 이를 감당할 수가 없어 조선으로 도망갔다. 무왕은 이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후로 봉하였다. 그래서 기자는 주 왕실에 신하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없어 무왕13년에 주 왕실에 문후인사 드리러 갔었고 무왕은 이때에 기자에게 홍범을 물었다,고 전한다. 반면 사기(史記)에서는 무왕이 은나라를 이기고서 기자를 찾아와 물으니, 기자가 홍범(鴻範)으로 대답하였다. 이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다가 봉하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하였고,서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나라 무왕이 치세의 도를 물어 기자께옵서 그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쳐주었다. 따라서 기자는 주 무왕의 스승이 되기 때문에 도리상 신하로서가 아닌 스승으로 예우하여 봉한 것이므로 위와 같은 기록이 있게 된 것이다.즉, 기자를 주나라의 신하로 보지 아니 하였으니, 기자조선은 신하가 아닌 왕국이 되었다. 무왕이 기자를 제후로 책봉을 했다는 어려운 근거중 하나는 주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조선이라는 해외국가에 무왕이 마음대로 기자를 봉해주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이거나 형식적인 조치로 주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기자가 망명한 것을 인정했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주나라 오복(五服)의 안에 있으려고 하지 않아서 해외의 먼 곳으로 피하였으니, 어찌 무왕에게서 땅을 나누어 봉해 주는 명령을 받았겠는가. 기자께옵서 주 무왕의 신하가 되고 무왕의 땅을 나누어 봉해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이르기를 기자가 은나라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는데,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약(醫藥), 복서(卜筮)를 하는 자들이 모두 따라 갔다. 시서로써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은나라의 예악의 제도를 알게 하였으며 위문(?門), 관제(官制), 의복(衣服) 등의 제도를 모두 은나라의 것을 따랐다,하였고 또한 반만 명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遼水)를 건너갔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기자는 조선에 도착한 뒤에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통역하여 알려 주고는 시서를 가르쳐서 은나라의 예악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리하여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도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禮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온갖 공인들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약과 무당, 음양과 복서의 술(術)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어 신의를 숭상하고 유학을 돈독히 배워서 은나라의 풍속을 이루니, 성인(聖人)의 교화라고 이를 만하였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전쟁과 싸움을 숭상하지 말도록 가르치고 이르기를 ‘하루의 혼란은 10년이 되어도 안정되지 못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면 생업에 편안히 임하지 못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강하고 사나운 자들을 덕으로 복종시키니, 이웃 나라들이 모두 그 의리를 사모하여 서로 친애해서 기자조선의 번병(藩屛)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대대로 기자조선을 친애하고 믿어서 봉작을 받아 조공이 끊이지 않아 예의(禮義)의 도가 무너지지 아니하여 의관과 제도가 모두 기자조선의 각 왕조의 제도와 같았다. 그러므로 조선을 가리켜 ‘시서와 예악의 나라’이고 ‘인의(仁義)의 나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자가 처음 시작한 것이다.
3) 은나라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사람들은 저 마다의 언어로 창조와 문명을 이끈 신들의 계보를 만들고 신화를 남겼다. 동아시아에도 그 신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많은 사람들은 은나라라고 하면 중공의 역사로 인식하는것이 보편적이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이의 대해서 동의하기가 어렵다. 먼저 은(殷) 민족이 제사를 지내던 신화 속의 천제(天帝) 제준의 신화를 산해경에서 살펴보면,
대황의 한가운데에 얼요군저라는 산이 있다. 그 위에 부목이 있는데 높이가 300리이고 잎은 겨자와 같다. 얼요군저라는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의미한다. 부목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10의 태양이 걸려있다. 이들은 매일 매일 교대로 떠오르면서 낮과 밤, 즉 하루를 운행한다. 바로 이 10개의 태양속에 삼족오가 살고 있다. 산해경을 살펴보면, 양곡 위에 부목이 있는데 한개의 해가 막 도착하자 한개의 해가 막 떠오르며 모든해가 까마귀를 싣고 있다. 제준이 예에게 붉은 활과 흰 주살을 하사하여 그것을 하계를 도아 주게하니 예가 비로소 하계의 온갖 어려움을 없애고 구제해 주었다. 양곡을 다스리는 천제 제준에게는 10명의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태양이었다. 이들은 매일매일 뜨고 지면서 낮과 밤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난기가 발동한 10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하늘로 떠올랐다. 세상은 온통 열기와 가뭄으로 들끓고 고통으로 신음하던 백성들이 제준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이를 안타까이 여긴 제준은 예를 불렀다. 예야 이 활과 하살을 가지고 하계로 내려가 백성들을 도와주거라. 제준의 명을 받은 예는 태양속의 삼족오를 향해 화살을 쏘아 10마리중 아홉마리를 맞춰 떨어뜨렸다. 결국 하늘에는 하나의 태양만 남게 됐다. 삼족오 신화속에 등장하는 예는 과연 누구일까! 예는 활을 잘쏘는 신궁이다. 예(?)예의 이름에는 깃羽자가 보인다. 이는 새를 토탬으로 조류숭배사상을 엿볼수 있다고 하겠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변한)편에는 살펴보면, 큰새 깃털로 죽음을 보내는데, 그 의미는 죽은자가 날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라고 적고 있다. 이는 영혼을 하늘세계로 데려가는 존재로써 하늘의 전령인 새의 역할을 말해주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즉 산동반도, 발해만, 한반도등이 새와 관련된 신앙이나 풍습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그 중 고구려대에 와서는 삼족오가 가장 화려하게 부활하는데 삼족오가 의미하는바가 크다하겠다.
다음으로 고기를 인용한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말함)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는데 자주 천하를 차지할 뜻을 두어 사람이 사는 세상을 탐내고 있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位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들을 널리 이롭게 해 줄 만했다. 이에 환인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환웅(桓雄)에게 주어 인간(人間)의 세계를 다스리게 했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마루턱(곧 태백산太白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이른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壽命)·질병(疾病)·형벌(刑罰)·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했다.(나머지 생략) 환인의 서자 환웅과 웅녀로 인해 단군을 낳아 한국 최초의 신성가족이 시작된 것이다. 단군신화는 신화일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너무도 또렷한 옛 조선의 흔적들이 신화에서 역사를 읽게 한다.옛 조선 신화는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건국신화가 역사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건국한 국가가 역사의 실체로 남아 있고, 그 국가의 제 1대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을 신화적인 표현으로 서술을 했다고 볼수 있고, 신화적인 내용을 역사에 편입시켜서 역사로 바꾸어 기록했다,라고 볼 수 있다.
몽골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는 브리야트 공화국(러시아 연방) 바이칼호에서는 아직까지 샤머니즘이 살아 있다. 그 샤머니즘에서 태어난 영웅이 있다.그중 관심을 끄는 것이 브리야트에 전해오는 게세르 신화이다.게세르 신화는 바이칼 일대와 몽골과 티벳등지에 펴져있는 영웅 신화이다.게세르의 신화를 살펴보면 환웅 단군과, 하늘신의 아들 게세르와 그의 아들의 공통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통점) 거의 똑같지 않은가? 이 신화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얘기하기 전에 몽골의 학자들이 먼저 인정하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은나라의 시조 신화를 살펴보면, 은나라 시조 설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씨(有女戎氏)의 딸로서 제곡의 두 번째 비(妃)였다.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을 때 검은 새〔玄鳥〕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삼켰더니 잉태하여 하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설이다. <사기 은본기>
고구려의 건국신화 광개토 태왕 비문을 살펴보면 옛적에 시조이신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셨으니 북부여에서 나오셨다. 왕은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 추모왕은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 부터 성덕이 높았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비문, 나머지 생략
이것은 모두가 아는 광개토 태왕 비문에 나오는 추모성왕 신화다. 이 신화는 우리역사서에 뿐 아니라 중공 위서에서도 볼수 있다. 그런데 추모성왕 혈통에 이상한 대목이 눈에 뛴다.삼국유사 기이편에는 주몽은 해모수의 아들로, 왕력편은 주몽은 단군의 아들로,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삼국유사 북부여편에는 해모수가 아들을 낳으니 해부루이다.삼국유사 기이편에는 단군기에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친하여 아들의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
논형 길험편에서는 북쪽 탁리국 왕의 시비가 계란 같은 큰 기운이 와서 임신했다. 왕이 버렸으나 소와 말이 보호했다. 아들을 낳아 동명이라 했고 활을 잘 쏘았다. 왕이 죽이려 함으로 남으로 도망가니, 엄체수에서 자라와 물고기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동명은 부여를 창건 하였다.
탁리국을 동부여로, 왕의 시녀를 하백의 딸로, 동명을 주몽으로 바꾸면 영락없는 추모성왕 신화다. 이는 추모성왕 신화 이전에 이미 똑같은 내용의 건국 신화가 북부여를 무대로 전해 내려왔다는 얘기인것이다.
이제 몽골의 칭기즈칸 설화를 살펴보면, “밤바다 밝은 금빛을 띤 사람이 겔(몽골인의 천막집)의 에루게(천막 위로난 창문)의 창문을 통해 빛처럼 들어와 나의 배를 비치자 그 빛이 내 뱃속으로 들어왔다. … 뱃속의 아이는 하늘의 아들이다 … 이 아이가 우리 모두의 칸이 되면 일반 사람들은 이 아이의 내력을 알게 되리라 (『몽골비사』)”
알랑고아는 물에서 태어난 여인이라고 한다.추모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하백의 따님이시다. 유화부인이 창문을 통한 빛으로 임신했고, 알랑고아가 (겔)게르 천장을 통하여 들어온 빛으로 인해 임신한 상황은 같다. 두분 다 집 떠나 강을 넘어서 살았다는 점이 비슷하다. 그리고 추모성왕이 당시 고구려를 건국했고,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오녀산성이다. 버단차르도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한부족을 정복했다. 그리고 여기서 칭기즈칸의 몽골이라는 국가가 시작된다. 빛으로 잉태된 알랑고아의 아들중 아비가 다른 배척으로 가족을 떠나 새로운 시족을 형성하는데 그 후예가 징기즈칸이다. 금와의 아들들의 핏박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피야해 했던 주몽의 이야기가 겹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화가 전해지는 곳이 또 있다. 어느날 신령한 새가 붉은 열매를 물어다 막내 선녀의 옷에 놓으니 그녀의 배에 들어가 사내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포고리옹순이라 하고 작은 거룻배를 주었다. 물길을 따라가 나라를 여니 그이름이 만주이다. 이것이 누루하치의 건국신화중 일부다. 또한 신라의 박혀거세, 김알지(김일제), 김수로왕의 사화역시 모두 비슷하다.
제준, 단군, 게세르, 동명왕,추모성왕, 칭기즈칸, 누르하지등의 신화가 유사한 이유는 무었일까,북방민족들은 문화가 일치하고, 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에 일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바이칼호에서 유목민의 땅 몽골을 지나 드넓은 만주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누볏던 영웅들에겐 동일한 신화가 있었다. 고사변에는 동이족은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 라고 했다.
은나라는 천하를 제패한 천하의 중심국 즉, 중국이였다. 하지만 화하족(한족)사람들은 은나라등 가르켜 동이, 즉 동쪽 오랑캐 혹은 야만인들이라고 불렀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이형구 교수께서는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중 부여의 습속에서 흥미로운글을 쏟아 내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부여에서는 제사, 군사, 정치면에서 고대 동방 사회의 중요한 신앙 활동의 하나인 갑골을 통하여 점복을 행하고 있었음을 사서[史書]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보면, 군사라든가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먼저 소를 잡아 그 굽뼈를 보고 좋고 나쁨을 점친다. 이때 소의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해져 있으면 길하다고 판단하여 일을 행하였다.그리고 <한원>고려[고구려]조에는 <왜략>에 이르기를 고려<고구려>의 풍속 가운데 ...군사가 있을 때에는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굽뼈를 관찰하여 길하고 흉함을 판단하다,고 하였다.이는 군사 활동이 있을 때마다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소의 제골[굽뼈]로 점을 쳐서 출진[出陳] 여부를 결정했다고 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한원>이외에 <왜략>의 일문을 중화 민국 초기(1925)의 장붕일이 모아 편찬한 <위략집문>이 있는데, 이 책의 부여조에는 점복기사를 따로 싣지는 않았으나, 당나라 은공로의 <북호록>의 <위략>을 인용하면서 고구려조의 점복기사 말미에 부여국에서도 이와 같았다,라고 덧붙여놓았다. 즉, 부여국의 점복습관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는 기사이다.
갑골신앙이 가장 유행한 은나라에서는 국중대사를 비롯하여 왕이나 귀족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복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천, 제조, 정벌, 년세, 천기, 복화, 전렵, 유력, 질병, 생육 등을 대상으로 점복을 했다. 한편 은대의 갑골문 중 제천과 군사에 관한 복사(卜辭)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제천과 군사가 있을 때마다 점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과 부여와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발해연안 초기 갑골문화에는 사슴, 양, 돼지 등 동물의 견갑골이나 늑골을 이용하여 점복을 하였고, 황하 하류 지역으로 내려와 살면서 주로 소의 견갑골이나 거북의 뱃바닥을 이용하여 점을 쳤다. 그래서 구복갑의 甲자와 견갑골의 骨을 합쳐서 갑골[甲骨]이라 한다.문헌상으로 기록되었던 부여의 갑골문화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고고학상의 갑골과 복갑 자료가 만주 지방의 송화강 유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서 특별히 주의할 기사로 以殷正月祭天과 在國衣?白및 白布大袂,袍、?및 殺人......라고 하는 내용이 있다. 먼저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지낸다(以殷正月祭天)고 하는 기사중에서 以殷正月이라고 함은 은대 역법에 따른 정월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은대역법을 따른 정월인 축월에 제천한다는 뜻이다.
부여의 점복신앙이나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까지 살펴보았으나 순장 습관 등 여러가지 관습이 은나라의 관습과 매우 비슷할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그것과도 일치한다. 건국신화에서 부터 은력을 사용하는 풍습, 습속등은 고대 우리민족과도 매우 흡사하다, 또한 요,금,원,청나라등의 역사가 결코 중공의 역사가 될 수 없듯이 은나라 역사또한 우리민족의 역사와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결코 중공의 역사가 될 수 없다.
4. 기자조선을 부끄러워 하는 어리석은 한국인들
기자조선은 남,북측의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사학자들까지 철저하게 왜곡되고 버려진 왕국이다. 많은 문헌이 이를 입증하고 있고, 또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음에도 단군조선에 열광한다. 그런데 기자는 5천명의 정예요원을 이끌고 조선으로 와서 단군조선 토착세력 및 문화와 은나라의 문화를 수용하여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만들어 공자도 기자를 군자로 칭송하고 군자가 계신 기자조선을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슈퍼성군을 왜 한국인들은 부끄러워 하고 왜곡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행한 업적등은 아래와 같다.
1) 주 무왕의 스승 기자 세종 40권, 10년(1428 무신 / 명 선덕(善德) 3년) 4월 29일(신사) 3번째기사에서는 이런 기사가 있다.
판우군부사 변계량이 기자 묘비(箕子墓碑)의 비명을 지어 올리니, 그 글에 말하기를, “선덕(宣德) 3년 무신(戊申) 하(夏) 4월 갑자일에 국왕 전하께서 전지하시기를, ‘왕은 이렇듯 이르노라. 옛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복하고 은의 태사(太師)를 우리 나라에 봉하여, 그의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였도다. 우리 나라의 문물과 예악이 중국과 비견(比肩)함이 지금까지 2천여 년에 이르게 된 것은 오직 기자의 교화에 힘입은 것이로다. 돌아보건대 그 사당집은 좁고 누추하여 우러르는 예법에 맞지 아니하므로, 나의 부왕께서 일찍이 중수(重修)할 것을 명하셨고, 내가 그 뜻을 받들어 〈공사를〉 독려하여 이제 낙성(落成)하였도다. 마땅히 비석에 새겨서 영원히 〈뒷세상에〉 보여야 하겠다. 사신(史臣)은 이미 비문을 지으라. ’고 하셨도다. 신 계량이 명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도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자(孔子)는 문왕(文王)과 기자(箕子)를 《역경(易經)》 〈명이괘(明夷卦) 상사(象辭)〉에서 나란히 거론(擧論)하였으며, 또 삼인(三仁)이라고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에서〉 칭찬하였으니, 기자의 덕(德)은 감히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하우씨(夏禹氏)가 물과 토지를 다스리니하늘이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내려 주어 이륜(?倫)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설(說)은 일찍이 《우서(虞書)》나 《하서(夏書)》에 한번도 드러나지 않다가, 1천여 년이 지나 기자에 이르러서 비로소 발설(發說)되었으니, 그때 만일 기자가 무왕을 위하여 이것을 자세히 진술하지 않았다면, 낙서(洛書)에 나오는 하늘의 뜻과 인사(人事)와의 관계에 대한 학문을 뒷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서 알 수 있었겠는가. 기자의 유도(儒道)에 유공(有功)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기자는 무왕(武王)의 스승이다. 무왕이 그를 다른 곳에 봉하지 아니하고 우리 조선에 봉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친히 그의 〈교화에〉 훈도(薰陶)되어서, 군자(君子)는 대도(大道)의 요지를 들을 수 있고, 백성들은 더할 수 없는 어진 정치의 보호를 입을 수 있었다. 그 교화는 행길의 유실물(遺失物)을 주어 가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하늘이 우리 나라를 후(厚)하게 돌보아, 어진 이를 보내어 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다. 정전(井田)의 제도와 8조(條)의 법이 해와 별처럼 밝아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대로 그 가르침에 복종하게 되었으니, 1천 년 뒤에도 마치 그 당시에 사는 것과 같다. 추연(?然)히 〈그의 신령을〉 우러러 대하니 저절로 〈감회를〉 참을 수 없다. 하였고 서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주나라 무왕이 치세의 도를 물어 기자께옵서 그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쳐주었다, 하였으니 무왕의 스승은 기자대왕이 분명하다.
2) 요동은 기자의 영토 요해총서라는 문헌에는 요동이 중국의 풍모를 가지고 있다(有中國之風)라고 하였고, 구지(舊志)에 이르기를 기자가 분봉 받은 땅箕子所封之地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대해서는 2-1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굳이 얘기 할 필요가 없고, 또한 분봉(分封)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또한 3-3에서 얘기했으므로 굳이 이의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기자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이 얘기하는 평양(지금의 북한지역)이 옛조선이라는 것에 비추어 보면 참 대조적이다. 은나라가 망하고 동아시아 판도는 주나라가 아닌 기자조선의 있음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좋은 예라 하겠다.삼국지 권30「오환선비동이전」‘한(馬韓)조’《위략》에 이르기를 “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연나라에서는 곧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을 쳐서 땅 이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으로 국경을 삼으니, 조선은 차츰 힘이 약해졌다.고 하는 기사를 보면 기자조선의 영토가 얼만큼 이였는가를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의 동래 문제는 기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단군조선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진다. 또한 상주 교체 시기는 상나라 유민의 이동과 연나라의 성립, 인접한 고죽과산융 그리고 단군조선의 역할 문제와 맞물려 새로운 국제질서 편성이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문헌을 보면 이미 그 표현의 논리상으로 기자가 오기 전에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기자조선 이전에 있었던 단군조선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이 옛 조선이 바로 王儉朝鮮 즉 檀君朝鮮인 것이다.
3) 무천은 기자조선의 풍습 그동안 동예의 제천풍속으로 알려진 무천행사가 이보다 앞선 고조선의 풍속으로 기록된 문헌이 최초로 발견돼 국내학계에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됩니다.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 박사는 지난 1907년 영국으로 반출된 돈황문서에서 고구려사와 관련한 귀중한 사료를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윤 박사는 돈황문서의 토원책부 주석에 고조선의 풍속으로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이 있었다는 기록을 새로 발견했다고 설명했습니다.이는 지금까지 국사교과서에 고조선 이후 동예가 '무천', 부여는 영고, 고구려가 동맹이란 제천행사를 지낸 것으로 실려 있는 것보다 앞선 시기에 무천 행사가 열렸다는 기록이어서 논란이 예상됩니다.토원책부는 당 태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장왕의 지시로 65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과거시험에 출제될 예상문제와 모범답안을 저술한 책입니다. 출처:YTN뉴스
이제 살펴보면 영국으로 반출된 돈황문서에서는 옛 조선의 풍속으로 10월에 제천행사인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이 있다는 기록을 새로 발견했다,는 기록이다.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라고 했는데 옛조선의 설명은 2-2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단군조선 혹은 단군, 기자조선을 얘기하는 것이다. 무천행사는 엄밀히 말하면 기자조선의 풍습니다. 3-4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갑골신앙이 가장 유행한 은나라에서는 국중대사를 비롯하여 왕이나 귀족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점복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제천, 제조, 정벌, 년세, 천기, 복화, 전렵, 유력, 질병, 생육 등을 대상으로 점복을 했다. 은대의 갑골문 중 제천과 군사에 관한 복사(卜辭)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을 보면 이는 역시 제천과 군사가 있을 때마다 점복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자는 5천명의 정예요원을 이끌고 조선으로 오는 과정에서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약(醫藥), 복서(卜筮)를 하는 자들이 모두 따랐다고 했으며, “殷의 도가 쇠락하자 箕子는 朝鮮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禮義(예의)와 田蠶[누에농사] 및 織作[베짜기]을 가르쳤다.” 고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 구당서 신당서고구려(高麗)전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其俗多淫祠,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國城東有大穴,名神隧,皆以十月,王自祭之。” (박대종 소장님 해석: 고구려의 풍속에는 우상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으며, 농사를 주관하는 靈星神, 태양신, 가한신, 기자신을 섬긴다. 나라의 성 동쪽에는 큰 굴이 있는데 神隧라 이름하며 항상 10월이 되면 왕이 몸소 그곳에서 제를 지낸다.) 따라서 은의 풍속, 습속등을 이어 받은 기자대왕으로 인해서 부여, 고구려,고려등까지 제천행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고대국가의 제천행사는 아래와 같다.
부여의 제천의식 영고: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에는 "은(殷)나라 정월에 하늘에 대해 제사하는데, 이때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고 했다.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 그 시기를 납월(臘月)이라 했다. 이는 12월의 다른 명칭으로 은정월과 같다.
예족의 제천의식 무천: <삼국지〉에 의하면 예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 또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지낸다"(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라고 했다. 예는 농경을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던 사회로서, 그 주민들은 별자리를 보고 그해의 풍흉을 알았고, 삼베를 생산하고 누에를 쳐서 옷감을 만들었다. 따라서 농사가 끝난 10월에 행해진 무천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에 해당하는 농경의례였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제천의식 동맹: 일종의 추수감사제로 동명(東明)이라고도 하여 고구려 국조신(國祖神)에 대한 제사의식이라는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國中大會)로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隧穴)이라 부른다. 10월 국중대회 때는 수신을 맞이하여 돌아와서는 수도의 동쪽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神坐)에 모신다"고 했다. 수신의 성격에 대해서는 단군신화의 혈신(穴神), 즉 웅녀신(熊女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국토신·생산신인 수혈신을 맞아 수도 동쪽 물가에서 제사지냈다는 것은 동명신화에서 하백녀가 청하(淸河)의 웅심연(熊心淵)에서 해모수(解慕漱)와 결합했다는 구성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동맹이 농경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추수감사제와 같은 성격의 것인 만큼 수신은 곡신(穀神), 즉 지모신(地母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 주몽신화에서 주몽의 어머니로 나오는 하백의 딸 유화(柳花)가 농업을 주관하는 지모신의 성격을 갖는 것과 같다.
신라, 고려의 제천의식 팔관회: 〈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는 551년(진흥왕 12) 처음 행해진 이래 4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신라 때 행해진 팔관회는 모두 호국적인 성격이 짙으며, 10월과 11월에 행해진 것으로 보아 종래 제천의식과 불교가 결합되어 행해진 의식인 듯하다. 고려시대에도 유교가 성하던 성종대를 제외하고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의 2대 의식의 하나로 중요시되었다. 이때의 팔관회는 불교적인 색채를 거의 띠지 않아 천령(天靈)·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 등 토속신에게 지내는 의식과 같았다.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해졌는데 개경에서는 11월 15일에,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열렸다. 개경에서 행하는 팔관회 의식에는 행사 전날에 행하는 소회일(小會日)과 행사 당일에 하는 대회일(大會日)이 있다. 소회일에는 왕이 불법을 통해 호국을 염원하기 위해서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고, 때에 따라 위봉루(威鳳樓) 또는 신봉루 등에서 여러 신하들의 축하인사를 받거나 군신간의 헌수(獻壽), 그리고 지방 수령들의 선물 봉정식이 있었다. 대회일에도 축하와 헌수를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의 인사를 받기도 하고 개경의 팔관회를 이용하여 무역도 이루어졌다. 서경의 팔관회는 조상제의 성격을 띤 예조제(藝祖祭)로서 정부에서는 보통 재상을 파견하여 재제(齋祭)를 행했다. 팔관회는 고려 초기에 성하다가 현종 이후부터 점차 쇠퇴했다. 그러나 고려말까지 국가 최고의 의식으로 행해졌으며,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한 시기에도 이 의식이 행해졌다. 그러나 李조선이 건국되면서 배불정책에 따라 철폐되었다.
이밖에 마한·변한은 계음(契飮), 백제는 교천(郊天)을 봉행 했다고 한다. 제천의식과는 관계 없이 고대에서 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있었다. 부여시대에는 이 종교의 명칭이 대천(代天)이라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경천(敬天),신라에서는 숭천(崇天),고려시대에는 왕검교(王儉敎)라고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고삿날'이라는 민속화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설했다.
3) 공자가 살고 싶어 했던 구이는 기자조선 심백강 박사님은 2004년 2월에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아주 흥미로운 글들을 ?아내셨다. 그중 "공자가 살고 싶어했던 ‘九夷’가 바로 고조선"이 그것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고전서·자부’ ‘명의고(名義考)’ 5권에 “구이(九夷)는 동이이고 동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사고전서·경부’ ‘주례전경석원(周禮全經釋原)’ 8권에는 “동이 기자의 나라는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하던 곳이다(東夷箕子之國 孔子所欲居)”라고 했다. ‘논어’에는 “공자가 구이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子欲居九夷)”는 기록만 있고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말은 없다. 그런데 ‘명의고(名義考)’ 5권은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그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런 자료를 통해서 고조선이 여러 동이 국가들 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적 수준이 높고 대표성을 띤 동이 국가로, 공자가 마음속으로 동경하던 나라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십일경문대(十一經問對)’ 1권에는 ‘논어’ 자한편(子罕篇)의 ‘자욕거구이 혹왈누 여지하 자왈 군자거지 하루지유(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대목을 논하여 “여기서 말하는 군자는 기자를 가리킨 것이지, 공자가 자칭해서 군자라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동안 우리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자의 해석에 따라 “군자거지(君子居之)면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군자가 가서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 군자가 공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자료는 “군자거지(君子居之)니 하루지유(何陋之有)리요” 즉 “구이에는 군자인 기자가 살았으니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공자는 평소 겸양의 미덕을 강조해 자칭 군자라고 했을 가능성이 적고, 또 ‘산해경(山海經)’에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공자가 가서 살고자 했던 구이를 기자조선으로 보고 “기자조선은 일찍이 군자인 기자가 도덕정치를 펼친 문화국가이니 가서 산들 무슨 누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런 자료도 공자가 가서 살고 싶어했던 구이가 바로 기자조선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좋은 근거라 하겠다. ‘사고전서·경부’ ‘상서주소(尙書注疏)’ 17권에는 “성왕(成王)이 동이를 정벌하자 숙신(肅愼)이 와서 축하했다(成王旣伐東夷 肅愼來賀)”라는 주관서(周官序)의 내용과 여기에 대한 공안국(孔安國)의 다음과 같은 전(傳)이 실려 있다. “해동(海東)의 제이(諸夷)인 구려(駒麗)·부여(扶餘)·한(?=韓)·맥(貊)의 무리가 무왕이 상(商)나라를 이기자 다 길을 통하였는데 성왕이 즉위하자 배반하였으므로 성왕이 이들을 정벌하여 복종시킨 것이다.” 고 말씀하셨다.
이제 살펴보면 세계에서 지금까지 추앙 받는 공자는, 기자대왕을 일컬어 군자라고 추앙했고, 군자가 계신 조선을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공자는 지금까지도 추앙 받고 있지만 공자가 추앙한 기자대왕은 한국사람들은 아직까지 이런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철처하게 버려진 왕국으로써 왜곡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4) 홍범구주 洪範九疇(홍범구주)란 무엇입니까? 출처: 한국 정신문화 선양회
5) 팔조법금 팔조지교,팔조금법으로도 부르는 팔조법금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전에는 기자(箕子)께옵서 조선에 와서 8조의 교법(敎法)을 만들어 인민을 교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8조의 교(敎)가 아니라 그 자체가 법금, 금약(禁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8조법금의 전문은 전하지 않고 3조항이 ≪한서≫ 지리지에 전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3.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명당 50만전(錢)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즉, 1조는 생명에 관한 것, 2조는 신체에 관한 것, 3조는 재산에 관한 것이다.
8조법금은 곡물을 화폐와 같이 교환의 표준으로 삼고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법금 중에서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조항은, 중공 한나라 때의 사형수에 대한 속전법과 같기 때문에 한나라 군현시대에 이르러 개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서≫ 지리지에는 처음에 한나라의 관리 상인들이 낙랑에 와서 토착 조선인들이 밤에 문을 닫지 않고 있음을 보고 도둑질을 하기 때문에 풍속이 점차 나빠져 법금이 60여 조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8조법금은 당시의 사회상의 변천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자께옵서 제정한 8조법금만 보더라도 당시 조선이 얼마나 문화대국이였는가를 볼 수 있는 단적인 좋은 예 라 하겠다.
6) 동방예의지국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서두에서 “동이가 천성이 유순하고 도리로 다스리기 쉬워 군자불사지국(君子不死之國)이라 일컬어졌으며, 그래서 공자가 구이에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논왈(論曰) 부분에는 “옛적 기자(箕子)가 조선으로 갔다. 그것이 그 나라 풍속의 시작이며 그 이전에는 들은 바가 없다. 기자가 8조의 규약을 시행, 사람들로 하여금 금할 바를 알게 하니 마침내 음란함과 도둑질이 없어졌다. 그 법이 수백천년 동안 이어진 고로 동이가 통하여 유순하고 삼가는 것이 풍속이 되었으며 서융, 남만, 북적의 3방과는 달랐다. 진실로 정치하는 바가 펼쳐진 즉 도의가 있었다. 그래서 공자가 분함을 품고 구이에 가서 거하고자 하였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7) 백의민족 우리는 우리민족을 일컫는 용어로는 한민족, 백의민족, 배달민족, 한겨레등을 얘기한다, 반면, 세계에서 부르는 용어로는 조선족, 고려인, koren, coree, 동이, 조센징등이다. 여기서 백의민족은 흰 옷을 즐겨입었다,는 데서 비롯됐다. 보편적으로 백의민족의 기원은 부여에서 있다고 알고 있다.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이 나라의 옷은 흰색을 숭상하고, 희 천으로 소매가 크고 바지가 넓은 도포를 만들어 입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백의민족의 기원은 따로 있다. <예기>단궁상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대(夏代)에는 흑색을 숭상하여 상사(喪事)가 있을 때에는 황혼(黃昏)에 임렴(入斂)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흑마를 타며, 제사시에는 흑색희생물을 바친다. 은대에는 백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정오에 입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백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백색을 바친다. 주대에는 적색을 숭상하여 상사가 있을 때에는 일출시에 임렴하고 군사행동이 있을 때에는 적마를 타며, 희생물 역시 적색을 바친다.
즉, 하나라에서는 흑색을 숭상하고, 은나라에서는 백색을 숭상하며, 주나라에서는 적색을 숭상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한편, 殺人尙白에 대한 한(漢)나라 정현이 붙인 주에 보면 은정월인 축월에 비친달이 곧, 아백색이라고 한 것이다. 은나라에서 백색을 숭상한 것과 같이 부여 또한 상백(尙白)사상[崇白숭백사상]을 갖고 있는데, 바로 위의 <삼국지>위서 동이전 부여조의 기사에서 이와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기자께옵서 시서로써 사람들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은나라의 예악의 제도를 알게 하였으며 위문(?門), 관제(官制), 의복(衣服) 등의 제도를 모두 은나라의 것을 따랐다, 고 하였고,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이르기를 기자가 은나라 사람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갔는데, 시서(詩書), 예악(禮樂), 의약(醫藥), 복서(卜筮)를 하는 자들이 모두 따라 갔다,하였다. 살펴보면 기자조선은 은나라의 관습과 습속, 의복등을 은나라의 것을 따랐다고 하였고 부여에서도 상백사상이 있는것을 보면 그 전통이 은나라를 거처 은 왕족인 기자로 부터 조선으로 넘어와 부여로 전해져 내려 왔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또한 부여에서는 은나라를 선조(조상)으로 보았다는 단적인 좋은 예 라 하겠다. 참고: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중에서...
8) 고고학으로 밝혀진 기자조선 발해연안 청동기시대에서 또하나 중요한 시기가 바로 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문화 사이의 과도적인 시기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하가점 하층문화와 상층문화 사이에 직접적인 상하 계승관계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이가 곧 과도적인 은나라 말기 혹은 주나라 초기 즉 은말주초가 되는데 이시기가 바로 은말주초의 청동기문화가 유입되는 시기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만리장성 동쪽, 지금의 중국요녕성 객좌현 산성촌 남구둔에서 처음으로 은말주초의 청동기가 발견된 적이 있었으나 크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에 와서 중국정부의 국토건설사업과 농민의 개간 사업으로 인하여 많은 유적과 유물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고고학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와같은 과정에서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가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 우리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바로 은말주초의 청동기 유물이다. 그 대표적인 유적으로 요녕성 객좌현 소전산자, 산만자, 화상구, 소파태구, 북동, 조양현 목두성자, 대묘, 그리고 의현초호영자등이 있는데, 주로 대릉하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기는 대부분 은말주초 시기의 예기들로서 세발 혹은 네발 달린 청동 솥을 비롯하여 술그릇 술잔 물그릇 등 주로 제사지낼때 사용되는 그릇 즉, 예기들이 주종을 이룬다. 이밖에 요하 하류지역의 요녕성 신민현 대홍기에서 은말주초 시기의 청동 도끼가 출토되었다. 1975년에는 요하를 건너 무순시 망화유적에서 은나라 때의 전형적인 고리 달린 칼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요하 이동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은대 청동기이기때문에 우리의 주목을 끈다. 망화유적에서는 환수동도와 함께 세발달린 토제 솥을 비롯하여 몇 점의 삼족기가 반출되었는데, 그중의 토기 파편을 열석광측정을 통하여 검출한 연대가 지금으로 부터 3000천년 전이다. 이와같이 대릉하 유역과 요하 유역에서 발견되는 은말주초의 청동기는 그 문화적 의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매우 귀중한 역사적인 의미도 갖게된다. 그것은 바로 이시기가 고대 역사서에 나타난 기자가 은말주초 동쪽(조선)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명한 사실은 대릉하 유역에 은말주초의 청동기문화가 적지 않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발해연안 북부 대릉하 유역에서 하가점 하층문화와 대체된 은말주초의 청동기문화은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요소와 새롭게 어우러져 이른바 하가점 상층문화를 창조하게 된다.하가점 상층문화 즉, 남산근문화의 내용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주초의 청동기문화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무덤 형식이 대개 석관묘 또는 석곽묘를 사용하고 있으며 특별히 이른바 비파형 청동단검이라고도 하는 발해연안식 청동단검을 부장하고 있다는 덤이다. 남산근 문화는 만주 지방과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이와같이 만주와 한반도의 돌무덤에서 청동단검이 출토된 사실은 매우 의의가 깊으며 양자간에는 어떤 함수관계를 내포하고 있을것으로 짐작케 한다. 출처: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한편 문자를 연구하는 박대종 소장님은 http://www.hanja.co.kr/ '기후방정'이라는 제하의 칼럼에서 기후방정은 기자조선의 유물이 아니며, 즉 자씨문중의 것이 아니며 강씨문중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씨문중은 기자조선의 제후국이라고 말씀하셨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족휘라 함은 고대의 어떤 족속을 표시하는 휘기(徽記: 마크)이다. 위 족휘 명문 중에서, 亞(아)자는 주로 은상 때 사용되던 것으로, 그 안에 족휘나 글을 기재한다. 亞는 현재 복건성에 남아 있는 전통 가옥인 토루와 비슷한 것으로, 갑골학계에서는 네 개의 집이 서로 연결된 고대 건축물의 평면도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亞는 여기에선 일족인 대가족을 수용하는 거대한 집합주택의 모양에서 나아가 ‘족휘’를 표시하는 허사(별다른 번역은 하지 않음)로 쓰였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역사적 용어와 기자 및 기자조선의 대하여 살펴보았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문헌이 선진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한대 이후에 나타난다고 하여 부정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새롭게 발견되는 갑골문과 금문에 나타나는 기후등이 문헌상의 기자와 기자의 제후국으로 주목되면서 기자의 대한 연구는 새롭게 재조명 될 필요가 있다. 요서 대릉하 유역에서는 은,주 유물이 매장된 유적이 집중적으로 출토 되었고 특히 요령성 객좌현 기후방정 유물을 근거로 기자가 은말주초 요서지역으로 동래하여 조선을 세우고 이후 요서, 요동, 평양(북측)으로 이동했다는 견해가 국 내외에서 나오게 된다. 세종대왕께서는 단군을 전 조선의 시조로, 기자를 후 조선의 시조로 보셨다. 세종의 학식은 물론이고 세종당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문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치우치지 않은 세종대왕의 바른 마음과 일개 사학자들이 비교될 수 있을지 의문이며 한자도 그렇고 옛 한글도 그렇고 필자의 생각은 세종의 터럭만큼도 따라가지 못할거라 확신하며 수천년동안 기자를 선조로 본 고구려, 고려, 조선의 선조들의 대한 예의가 아니다. 따라서 이런 기자조선은 새롭게 재 조명되길 희망한다.
2011. 10. 25. 淸武
|
출처: 역사란 무엇이뇨~! 원문보기 글쓴이: ?─맑은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