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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언카페 꽃피는 나무 아래서 원문보기 글쓴이: 검은호수
▲ 홍세화 <르몽드 디폴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 ⓒ프레시안(최형락) |
무심의 대가는 광기다!
솔직히 말하면, 스테판 에셀이 2010년에 쓴 <분노하라>의 프랑스어 판을 읽기도 전에 감격했다. 1917년에 태어나 올해 만 아흔넷의 에셀이 <분노하라>를 통해서 정당한 분노와 적극적 참여를 선동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프랑스 지식인의 앙가주망(참여) 전통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셀은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나치를 물리치고, 평생을 자신이 꿈꿨던 프랑스를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랬던 그가 니콜라 사르코지와 같은 우파들에 의해서 자신의 조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런 흐름에 침묵하는 젊은이의 무관심을 질타하고 분노를, 참여를 강조하고 나섰다. 다음 세대에 대한 연대 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에셀의 <분노하라>가 프랑스의 어떤 지적 전통 속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봐야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그의 <분노하라>는 16세기 프랑스의 지식인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자발적 복종>(박설호 옮김, 울력 펴냄)까지 이어지는 프랑스의 지적 전통 속에 놓여 있다.
에티엔 드 라보에티는 몽테뉴와 동시대에 살았던 16세기의 지식인이다. 그는 <자발적 복종>에서 이렇게 묻는다. '폭군이 등장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는 시민의 '자발적 복종'이야말로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권력이 요구하는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면서, 부당한 억압-피억압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발적 복종'으로 부당한 구조가 유지되는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한 참된 자유인의 탄생은 불가능하다는 게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성찰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주장을 그가 불과 열여덟 살에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매트릭스'에 갇힌 존재라는 사실을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년 전에 열여덟 살의 청년이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런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성찰은 볼테르, 장자크 루소,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폴 사르트르 등의 지식인으로 이어져 에셀까지 닿았다. 특히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강조한 무관심에 대한 질타의 연원은 볼테르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볼테르는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누군가?' 볼테르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은) 광신자다. 광신자가 열성을 부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지혜를 가진 자들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광신은 광신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열성이 내재해 있다. 마찬가지로 사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남다른 열성이 있다. 며칠씩 노름을 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광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지 않나? 또 광신적 극단주의자는 어떤가? 자신의 가치, 믿음에 남다른 집착을 가진 그들의 열성 또한 놀랍다.
여기서 우리는 볼테르가 얘기하고, 에셀이 다시 한 번 강조한 무관심에 대한 질타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세상사에 무심할 때, 방관할 때 당연히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이 누구겠는가? 바로 남다른 열성을 내제한 광신자,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극단주의자들이다.
실제로 지금 한국의 상황이 그것을 증명한다. 폭넓게 보면 이명박 정부를 대중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광신자,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들, 극단주의자들이다. 얼른 감이 안 온다면, 지금 이 시간에도 서울 명동에 가면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명동에서 여덟 글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그들은 얼마나 열성적인가?
이명박 정부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뉴라이트는 어떤가? 그들은 또 매사에 얼마나 열성적인가? 그런데 정작 인권, 연대, 상식 이런 걸 추구하는 이들은 열의가 없다. 자, 이제 볼테르가 일찍이 간파했던 세상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시민들이 열의를 가지고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지 않으면 광신자들의 득세를 막을 수 없다.
스테판 에셀의 무관심에 대한 질타는 바로 이런 볼테르의 문제의식을 이어 받은 것이다. 깨어난 시민이 열의를 가지고 분노하고, 참여할 때야 비로소 남다른 열성을 가진 광신자, 사익 추구자, 극단주의자들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깨어난 시민이 열의를 보이며 분노하고 참여해야 둘 간의 힘의 균형 상태가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이다.
▲ 스테판 에셀. ⓒ프레시안(최형락) |
질서보다 정의가 우선한다!
그렇다면, 스테판 에셀은 왜 분노하라고 외치는가? 우리나라처럼 질서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이런 에셀의 주장은 도발적이고 당혹스럽다. 먼저 에셀이 따르는 지적 전통에 놓인 프랑스 지식인 중 한 명인 빅토르 위고가 했던 말을 떠올려보자. 위고는 이런 얘기를 했었다.
"빠리는 항상 이를 드러내고 있다. 화를 내지 않으면 웃는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프랑스인은 항상 분노하거나, 웃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혁명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 사회에서 공유되는 핵심 가치 중 하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핵심 가치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
질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모두 다 '오더(order)'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잘 알다시피 '질서'뿐만 아니라 '명령'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겪어온 질서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이었나? 바로 신분 질서였다. 아버지가 왕이면 자식도 왕이고, 아버지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라는 식의.
이런 식의 신분 질서를 옹호하기 위해서 중세에는 그 질서가 바로 신의 '명령'이라고 강조했다. 신의 명령이니 지킬 수밖에 없는 질서라고 대중을 기만한 것이다. '질서'와 '명령'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질서를 강조하는 것이 사실은 사회의 불평등을 고수하는 책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는 중세의 지독한 신분 질서를 혁명을 통해서 무너뜨리고 자유, 평등, 박애(우애)의 세 이념에 기반을 둔 공화국을 만들었다. 이런 사정을 염두에 두면, 왜 프랑스 공화국을 뒷받침하는 핵심 가치가 바로 '사회 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 이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알베르 카뮈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우리나라처럼 질서만 강조해서는 결코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극복할 수 없다. 마치 신분 질서를 신의 명령으로 따랐던 중세 사회처럼 말이다. 노동자가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왜 굳이 파업을 하겠는가? 이렇게 사회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당연하다 여겨지는 질서에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 이렇게 외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 세상에 만연한 불의가 보인다. 그리고 그런 불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참여할 때 세상은 바뀐다. 세상을 뜰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에셀이 <분노하라>를 펴낸 것은 자신의 지적 전통 속에서 내려오는 이런 문제의식을 한 번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기업의, 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나라
자, 이제 한국 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고도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자본주의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가?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왜 학교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가?
"16-14-12-10-8."
이 숫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짝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대부분의 한국 시민은 이 숫자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이다. 이 숫자는 노동 시간 단축의 역사다. 오늘날 평범한 시민이 직장에서 하루 여덟 시간만 일하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가 연대해서 피와 땀으로 얻은 성과, 즉 노동 운동의 성과가 바로 지금의 여덟 시간 노동인 것이다. 또 열여섯 시간 일하던 노동자의 대부분은 고용인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사실상 오늘날의 비정규직과 비슷했다. 그들이 또 점차 정규직 노동자로 자리를 잡은 것 역시 노동 운동의 빛나는 성과다.
그런데 이런 노동 운동의 성과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이른바 '민주 정부' 10년간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제 노동자의 상당수는 다시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으며, 자진해서 여덟 시간 이상의 노동을 선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이 얼마나 심각한 퇴행인가?
정작 더 심각한 일은 이런 엄청난 퇴행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시민이다. 최근의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를 둘러싼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기업하기만 좋은 나라', 이른바 '기업 사회'가 되었는데도 아무도 그런 사태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다.
이런 일이 민주 세력, 개혁 세력을 자처하는 이들이 집권하던 때에 벌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애초에 그들에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 부재,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해서, 노동 운동에 대해서 학교에서 어떤 것도 가르치지 않은 교육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스테판 에셀이 프랑스 사회를 향해서 "분노하라"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놓고 보면, 우리는 프랑스 사회보다 100배, 1000배, 1만 배는 분노해야 하는데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처한 참담한 현실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끔찍한 빈익빈 부익부다.
불안에 짓눌린 경제 동물의 나라
ⓒ프레시안(최형락) |
왜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불평등이 문제인가?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기준으로 놓고 그 문제의 심각성을 따지고 싶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존엄한 존재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확인이 되는가? 바로 자신의 몸이 놓이는 자리에 따라서 그 존엄성이 확인된다.
우리 모두 안다. 도저히 인간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놓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노숙인, 독거노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한 부모 가정의 구성원 등…. 몸이 놓일 자리에 따른 인간의 존엄성을 잣대로 4900만 명을 나눠보면, 한국 사회는 깨진 콜럼버스의 달걀 모양을 연상시킨다.
달걀의 맨 밑의 깨진 부분에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걸 맞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 거칠게 통계를 내보면, 4900만 명의 10퍼센트 어쩌면 그 이상이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살아간다. 자, 그것은 그들 10퍼센트의 문제일 뿐이니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아니다. 그 10퍼센트에 속하지 않는 90퍼센트도 행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늘 불안하다. 언제 자기나 아들딸이 그 10퍼센트로 추락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렇게 불안이 크다 보니, 분노해야 할 때 분노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불안이 만연하다 보니 너도나도 경쟁에 나선다. 오는 7월 12일에는 또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치른다. 학생을 줄 세우고, 교사를 줄 세우고, 학교를 줄 세우고, 결국에는 모두 다 불행해질 이 일제고사에 한국 사회가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경쟁 이외에는, 그래서 너도나도 다 불행해지는 방법 외에는 다른 해법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사회의 시민은 최근 10년간 '경제동물'로 전락했다. 전인적 인간을 지향하는 이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놀림거리가 되고, 오로지 소유에만 관심을 두는 경제 동물이 성공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다. "부자되세요!" 이런 말이 전 국민의 인사가 되었던 상황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대다수 시민은 분노는커녕 굴종하는 삶으로 전락한다. 소유만 하면 되니까,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한다. 한 직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일하던 이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서로를 증오하고, 수십 년 동안 친밀한 공동체를 꾸려왔던 이들이 돈 몇 푼에 원수지간으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고만 볼 것인가? 계속 우리는 이렇게 살 것인가? 이런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있다. 10퍼센트가 될까봐 불안하고 경쟁하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 10퍼센트를 없애면 해결된다. 패자가 될까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도록 구조를 바로잡으면 된다. 이미 우리는 그 방향을 알고 있다. 공공성 회복이 방향이다. 최저임금 인상, 감세가 아닌 증세 등이 공공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수단이다.
더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가 '분배'를 좀 더 고민해야 한다. 기왕에 분배 얘기가 나왔으니, 최근에 한국 사회에서 부쩍 유행하는 '나눔'과 비교해보자.
'나눔', '분배'. 다른 말인가? 같은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른 말이다. <조선일보>도 나눔 캠페인에는 앞장서면서 분배는 안 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통상적으로 나눔의 반대말은 '독차지'이지만, 분배의 반대말은 '성장'이니까? 이런 상황을 꿰뚫어 봤는지 150년 전에 빅토르 위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눔 혹은 시혜, 온정 등을 놓고 판단할 때, 항상 주는 쪽의 입장만 생각한다. 왜 받는 쪽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지 않을까? 나는 나눔이 강조되는 사회가 싫다. 나는 나눔이 요구되지 않는 사회를 바란다."
위고는 알았다. 이미 나눔이 요구되는 사회는, 벌써 인간성이 훼손된 사회라는 것을. 진짜 인간성이 훼손되지 않은 사회는 나눔이 요구되지 않는 사회라는 것을. 그렇다면 나눔이 요구되지 않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바로 공적 분배가 잘 되어서, 누구도 타인에게 손을 벌릴 필요가 없는 그런 사회다.
물론 기부와 같은 나눔도 의미는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적 나눔은 공적 분배가 있고 나서 그것을 보완하는 측면에서만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조선일보> 같은 언론이 앞장서 사적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공적 분배에 대한 요구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프레시안(최형락) |
빨강 약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그나마 한국에서 지금의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동창을 만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는 사람들이 여기 모였다. (전체 웃음)
잠시 딸, 아들 얘기를 하겠다. 프랑스에서 자란 내 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기는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선언을 했다. 그 때는 듣고만 있던 그 밑의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나이가 되더니 고등학교 3학년짜리 딸에게 이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럼, 누나는 개량이구나. 나는 사회주의자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짜리 사회주의자와 고등학교 3학년짜리 사민주의자가 생산 수단의 국유화를 놓고 열띤 토론을 하곤 했다. 이처럼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공부를 하도록 되어 있는 프랑스 사회와 그런 기회가 차단돼 있는 한국 사회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까? 학교 교육을 통해서는 절대로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여러분이 이렇게 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서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선배를 잘못 만나서. (전체 웃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강 약, 파랑 약을 들이밀면서 "빨강 약을 먹으면 다시는 너는 원래대로 못 돌아가" 이랬던 것처럼 선배가 내민 빨강 약을 먹은 이들이 바로 여러분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1970~80년대에 운동권이 많이 썼던 '의식화'라는 말이 얼마나 잘못 쓰였는지를 짚어보기 위해서다.
당시 널리 쓰였던 그 말 속에는 이런 전제가 갈려 있다. 순진하고 중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평범한 후배가 의식화 과정을 통해서 진보적인 주체로 완전히 거듭났다는. 과연 그랬던가? 참으로 큰 착각이었다. 선배를 만나서 빨강 약을 받기 전에 지배 세력에 의한 철저한 의식화가 있었는데 말이다.
에티엔 드 라보에티의 말을 빌리자면 '자발적 복종'의 의식화가 전 생애에 걸쳐서 집요하게 있었지 않았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군대 용어인 "차려", "열중쉬어"라는 사실은 그 단적인 예다. 그렇게 지배 세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의식화되었던 여러분이 고작 단 한 번의 계기로 정반대로 의식화된다고 믿었던 것은 얼마나 순진한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배 세력에 의해서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의식화 과정에 대한 성찰은 참으로 부족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읽고 그 메시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할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기 있는 여러분과 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 소수 역시 오랫동안 단련을 거치지 않은 미성숙한 의식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 진보의 모습은 어떤가? 혹시 '남들은 아직도 모피어스를 만난 것은 아니니까', '나는 이렇게 의식이 깨어났는데…' 하면서 오만해 하며 공부는 안 하는 그런 상태는 아닌가? 단적으로, 선배가 어떤 정파인지에 따라서 자신의 정파도 결정되는 익숙한 모습이야말로 그 미성숙성의 증거 아닌가?
이제 우리는 지배 세력에 의한 전 방위적이고 철저한 의식화 과정에 대해서 좀 더 철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진보적인 의식이 얼마나 미성숙한지를 깨닫고 뼈아픈 자성과 쉼 없는 공부를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진보가 영향력을 확대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더 집요하고 더 적극적인!
ⓒ프레시안(최형락) |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항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고 창조하는 것은 곧 저항하는 것이다." 에셀이 '창조'를 강조한 것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현실의 불의에 분노하고, 그것을 고치고 바꾸기 위한 다양한 저항이 있어야 한다. 단, 그 저항은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니라 참여하는 개인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더 한 번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에셀이 무엇보다 강조하고, 앞에서도 얘기했던 앙가주망 즉 참여다. 분노만 해서는 안 된다. 참여해야 바뀌고, 바로 그 과정에서 창조가 가능하니까.
최근에 이사를 하기 전까지 서울의 다가구 주택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사람 중에서 집 초인종을 누르는 딱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분들은 교회에 같이 가자는 분들이다. 또 다른 분들은 돈 줄 테니까 신문 보라는 분들이었다. 얼마나 열성적으로 하는지 모른다. (전체 웃음)
반면에 인권, 연대, 상식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열의를 가지고 참여하고 있는가?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겨레> 구독을 권한다. 내가 열의를 표현하는 한 방식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보던 진보적인 잡지를 귀국하면서 끊었다. 그런데 그 잡지로부터 다섯 번 편지를 받았다. 정말로 집요하다. 한국의 진보도 좀 더 적극적이고, 집요해질 필요가 있다.
오늘 여러분의 책상 위에는 <프레시안>의 자발적 유료 독자 '프레시앙' 가입신청서가 놓여 있다. 적극적이고 집요하지 못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프레시앙 가입을 종용해야지. 책상 위에 신청서를 놓아두기만 하면 누가 선뜻 신청을 하겠는가? 이게 지금 한국 진보의 문제다. 한 번 더 강조하건대 진보가 생존하려면 또 넓어지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집요해야 한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강조했듯이, 지금 한국 사회야말로 분노하고, 참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만연해 있는 정리 해고,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 문제는 그 중에서도 시급히 대응해야 할 일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백척간두에 서 있다.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 정리 해고에 맞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 있는 김진숙 씨와 연대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주말(7월 9~10일)에 전국에서 한진중공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희망 버스'가 다시 영도조선소를 찾는다. 바로 그 희망 버스에 탑승하고 또 응원하는 일부터 시작하자.
홍세화 편집인의 약 1시간에 걸친 강연에 이어서 청중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 마흔두 살의 <한겨레> 구독자다. <한겨레>를 보면, 김규항 씨는 기명 칼럼에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한다. 오늘 강연 중에 민주화 세력이 비정규직 양산에 토대를 마련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는 대목이 있었다. 그것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화에 대한 기여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오점인가? "극우가 득세하는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 속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권력을 잡은 것을 물론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한 점을 제대로 비판하지 않고 덮어둔다면 그 역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심하게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빈곤했다. 예를 들자면, 신자유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인식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를 따라서 '제3의 길'을 들고 나왔을 때, 막 프랑스에서 귀국했던 나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가 제3의 길을 들고 나왔던 것은 20세기 초부터 영국이 구축하고 운용했던 사회 안전망을 조정해야 한다고 한쪽에서 강하게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사회 안전망이 없었던 한국에서 그런 제3의 길을 들고 나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개혁 세력을 자처하며 그것을 구축해야 할 김대중 정부가?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을 대하는 태도를 놓고는 솔직히 말하면 마음속에 앙금이 있다. 2003년 1월 두산중공업의 배달호 씨가 분신했을 때, 그 때 막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 목적 달성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 정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에 당시 노무현 정부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들이 얼마 후 청와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에 대한 빈곤한 인식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예라고나 할까." -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는 학생이다. 1970~80년대에 세상을 바꾸겠다며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이들 중에서 변절한 이들이 정치권에는 굉장히 많다. 현재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 중에도 사실은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이중적인 이들이 꽤 될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간혹 진보적인 사람 중에는 단 한 번에 변화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 비유를 하자면, 잡초를 한 번에 없애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잡초를 없애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는 스스로 잡초가 된다. (전체 웃음) 잡초는 한 번에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씩 하나씩 뽑는 것이다. 변화도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서 잡초를 뽑듯이 조금씩 노력을 하면서 변화가 이뤄지는 것이지, 단번에 변화를 꾀하다가 스스로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더구나 정치에 뜻을 둔 이들 중에는 애초부터 정서적으로 지나친 권력욕을 가진 이들이 있다. 한국 사회가 이런 정치인들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힘이 부족하니 이들이 쉽게 공익을 저버리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이들을 좀 더 견제하고 비판하는 힘을 기른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사실이 그렇다. 이번에 서울 학생 인권 조례를 발의할 때 청구인 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발의 요건인 서울 시민의 1퍼센트인 약 8만 장을 모으기가 어려웠다. 가까스로 8만5000장을 모으긴 했지만. 그런데 오세훈 시장이 무상 급식에 반대하는 주민 투표를 위해서 80만 명이 넘는 서명을 금세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깨어있는 시민이 공공성 강화를 위한 움직임에 참여해 줘야 한다. 8만 대 80만의 차이는 그렇지 못한 한국 상황을 반영한 게 아닐까? 광신자, 사익 추구자, 극단주의자가 열성을 발휘할 때 정작 지혜로운 시민은 열의를 보이지 않는 모습의 전형적인 예다.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주위 사람을 집요하게 설득하는 방법밖에 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우리의 교육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좀 더 지혜를 모아야 한다. 공부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데, 정작 자기 생각을 만들 시간은 없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이런 교육을 바꾸면서 먼저 깨어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적극적이고 집요하게 설득해야 한다." - 교사가 되고 싶은 대학생이다.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왜 한국에서는 선배를 잘못 만나지 않고는 사회에 대한 진보적인 인식을 가질 수 없을까? 가장 큰 원인은 역사, 사회와 같은 인문·사회과학 영역의 과목이 암기 과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역사, 사회 과목을 암기 과목 취급하고, 교사 역시 그런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런 수업은 사회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사고력이 아니라 암기력만 훈련하는 시간으로 전락했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확실한 해법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한 주제를 놓고 자기 생각을 고민하고 정리하는 데 글쓰기보다 더 좋은 수단은 없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수업에서 또 다른 영역의 수업에서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해보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성과가 당장 나타나리라고 확신한다. - 대학생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박정희 정권 18년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놓고 대립되는 두 가지 시각이 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산업화에 기여한 공은 높게 평가를 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브레히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누가 테베의 7대 피라미드를 건설했는가. 역사책은 왕들의 이름으로 빽빽하다. 왕들이 그 무거운 돌들을 끌어올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만리장성이 완성된 날 저녁에 석공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자였지만 산업화에는 기여했다' 이런 시각에 정말로 분노한다.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노동자의 삶이 어땠는가? 그들이 얼마나 산업화를 위해서 심신을 바쳐서 고생했는지를 아는 이라면 그런 얘기는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1960~70년대의 산업화가 온통 정치인 한 사람의 공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그런 시각이 만연해 있으니 '똑똑한 한 사람이 9만9999명을 먹여 살린다' 이런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것이다. 이런 얘기는 얼마나 황당한가? 이런 경우가 정말로 있는가? 그리고 설사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가 바라는 상황인가? 이런 얘기에 혹하는 게 바로 '자발적 복종'에 동참하는 일이다. 덧붙이자면, 정치가 경제이고 경제가 정치인데 어떻게 그것을 분리해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평가의 위험성과 순진함에 동의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국제 정세에서 한국과 비교해야 할 나라는 남아메리카가 아니라 타이완(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이다. 이들 나라가 그 때 산업화를 못했던가? 만약 박정희 정권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지금 한국의 위상은 또 다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 한국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도대체 어디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야 하는가? "계속 같이 분노하자.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런 어려움을 겪을 요량으로 계속 인간의 길을 걸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야말로 인간의 외침이고, 인간의 요구 아닌가?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얘기했듯이, 분노 자체가 인간성의 구성 요소니까. 그리고 그렇게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걸어가다 보면 희망이 어느새 옆에 있다. 희망은 어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우리 옆에 있다. 다만 그것을 보느냐 그러지 못하느냐가 우리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요즘 들어와서 정치권에서 보편 복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맞춤형 복지니 뭐니 표현하면서 공공성 강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훼방을 놓고 있지만, 이런 논의가 시작된 것 자체가 큰 진전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어렵지만 연대하면서 꾸준히 전진하자. 적극적으로 또 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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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으며 최근 의문이 들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글을 퍼왔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것을 반대하는 데, 분노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 새로운 대안이 되는 사회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사회의 온갖 문제들에서 눈을 돌리려고 애쓰며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나 처럼 눈을 돌리고 무관심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척이나 부끄러워지는 아침입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경숙씨 고마워요.
이렇게 읽고 쓰고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내 일상이 그냥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어쨌든 항상 읽고 얘기하겠습니다. 분노할 이유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