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이 말이 했던가? 힘없는 정의는 무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고 정치는 방황하는 이상에 현실감이라는 무게를 더하는 일이다. 정치인은 그 균형을 잡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른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 감각을 가진 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인다. 하나 그 둘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반대의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현실은 이상을 보며 고리타분하고 실리도 없는 허상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고 이상은 현실을 보며 어떤 상황과도 타협하는 결과론적 목적성에 치를 떨지도 모른다. 내면에 이런 갈등이 발생하면 외부에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 당면하게 되는 명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와 맞붙게 된다. 뼈아픈 낙선과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치력을 바탕으로 김운범은 수단과 목적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그 이분법을 파훼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의 정치여정이 시작되고 낙선과 좌절을 반복하다 강원도 인제에서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훗날 그의 그림자이자 정치적 방향성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선거 전략가, 서창대다.
“킹메이커”는 굴곡진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 김대중과 그의 선거 참모이자 마타도어의 귀재라 불리던 엄창록의 관계를 소재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왜 이제야 영화로 만들어졌을까 싶을 만큼 흥미로운 에피소드다. 두 사람은 처음 강원도 인제에서 만나 후보와 비서로 한께 하게 된다. 그 후 엄창록은 김대중의 정치 행보에 상당한 기여를 하게 된다. 인제 보궐 선거 당선을 시작으로 그의 기반인 목포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엄창록의 전략은 실로 기발했다. 폭력과 금권 선거로 얼룩진 당시 상황을 역이용해 공화당원으로 위장해 선물 주고 도로 빼앗기, 거드름 피우며 싸구려 담배를 유권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양담배를 피우는 행동에 공화당원 명의로 식당을 빌려 사람들을 초대하고 정작 본인은 안 나가는 식의 공작으로 공화당의 금품을 역이용하는 전력을 사용한다. 변성현 감독은 이런 전략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
사실상 영화 속에 주요한 에피소드는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인물들에게 가상의 이름을 부여하고 이야기가 픽션임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것은 역사를 재조명에 목적을 둔 영화라기 보단 조력자의 시선과 감정에 무게를 두려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킹이 아닌 킹메이커에 방점을 두고 있다. 자신의 이상을 누군가를 통해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자, 그의 마음의 동요를 담아내려면 김대중이라는 이름에 걸린 아우라를 걷어낼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정확히는 김대중이 가졌었던 하나의 감각 ‘상인의 현실감각’을 담당했던 엄창록과 정치적 이상을 우선 과제로 삼았던 김대중의 기억을 김운범과 서창대라는 두 개의 길을 갈라놓는 작업인 것이다. 그 갈림길은 결국 목적과 수단이라는 형태로 관객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로 다가온다.
영화는 약방에 일하던 서창대와 농부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농부는 매일 마다 달걀을 훔쳐가는 이웃이 얄밉지만 그가 이장의 친척이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이대 서창대는 꾀를 내어 그의 집에 자신의 닭을 넣어두고 도둑으로 몰라고 말해준다. 나쁜 놈 상대하는데 자신만 깨끗한 방법으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고 서창대의 관점은 그의 모든 선거 전략에 동원된다. 악에 악으로 대응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순간 배트맨처럼 어둠 속에 영웅처럼 보이기도 한다. 추구하는 정의, 즉 김운범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선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것이다. 이기고 이겨서 정치인 김운범의 입지가 커질수록 승자가 곧 정의라는 그들이 지양하던 모습과 같아지며 모순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은 결국 파국을 맞고 갈라선다. 영화는 다시 수단에 삼켜진 그림자를 따라간다. 말미에 이르러 서창대는 김운범에게 농부에게 받았던 질문을 해본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던 그는 피식하고 웃어 보인다. 그가 가려던 김운범의 길은 수단과 목적의 이분법에 대한 고민이 아닌 스스로를 증명하는 행동이었다.
김운범을 바라보는 서창대의 시점을 통해 변성현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하나의 인물이 지난 양가적 감정을 두 개로 나눠 인물로 구현화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애증의 관계에 무게를 둠으로써 현실 고증이라는 무게에 끌려가는 대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한다. 클로즈업되는 화면에 담기는 손은 나아가는 방향과 기대고 싶은 마음 한 구석을 담고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그림자가 그림자를 덮는 연출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의 이면에 담긴 표정을 읽어내려 한다. 역사와 정치가 지나는 길목엔 그림자가 있다. 거기엔 적당히 비겁하고, 현실 순응적이며 그러면서도 순결한 올바름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이들의 모습이 있다. “킹메이커”는 어쩌면 그런 그림자에 남겨진 소시민 모습을 드러내려 했던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선댓글 후 감상 하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다시 리뷰를 꺼내 읽어보면
깊이를 모르고 영화를 본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만요..ㅎㅎㅎㅎ
덕분에 장면 하나하나에 집중하려는 노력은 하게 되었습니다~
소대가리님 항상 좋은 리뷰에 빚을 지네요.
감사합니다!!!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늘 많이 배웁니다.
오늘 영화를 보고 읽는 소대가리님의 리뷰가 크고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거기엔 적당히 비겁하고, 현실 순응적이며 그러면서도 순결한 올바름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이들의 모습이 있다. “킹메이커”는 어쩌면 그런 그림자에 남겨진 소시민 모습을 드러내려 했던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이 표현 특히 좋네요. 저는 김대중이라는 도구로 우리의 꿈을 실현하자고 열변하던 장면도 좋았습니다.
영화가 내려가기 전 조만간 꼭 보고 싶었는데 더더욱 그래졌어요. 잘 읽었습니다 :)
우와 내내 몰입해서 읽었어요 !
앞으로도 소대가리님 글 자주자주 읽고 싶습니다 😍
영화보다 더 몰입되는 리뷰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하는건 어느선까지 용인이 되어야 하는걸까요? 대선 국면과 맞물린 여러가지 상황들을 보면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영화보기전인데 감상후기만으로도 생각이 참 많아집니다 관람직전 한번 더읽고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