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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右(영우)' 23호 원고 모집에 보낸 원고 3편
한국복지정보통신협의회경남지부에서는 매년 ‘嶺右’라는 동호 회지를 발간하고 있다. 15일 날 대원사 둘레 길을 가족과 함께 걷고 있는데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년과 같이 원고를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홈페지 요강을 보니 특집 주제는 ‘텃밭’이고 원고는 두 편까지 가능하다.
나는 나의 카페에 탑재된 글 중에서 두 편을 골라 起承轉結(기승전결)이 이루어지도록 보완을 하여 원고를 작성했다.
그 원고 작성을 완료한 후에 나훈아 콘서트 공연 소감을 내 카페에 올려 두었는데 이외로 다른 사람의 호응도가 높아 그것도 첨부하여 보내면서 영우의 발간 취지에 맞는 원고를 선정하여 사용하도록 편집 위원에게 위임했다. 보낸 원고 3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수담(手談)으로 가꾼 우정의 텃밭
1. 담론(談論)을 열며
수담(手談)을 한국어 사전에 찾아보면 ‘서로 마주 앉아 말이 없이도 뜻이 통한다는 뜻으로, 바둑 또는 바둑을 두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글쓴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바둑으로 깊은 우정을 쌓아온 두 친구가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은 80년대 중반 같이 근무한 동료 교사로서 자란 환경과 성품과 취미가 비슷한 친구다. 나와 그 친구는 기력(棋力)이 비슷하여 퇴근 후에는 거의 매일 다방에서 바둑을 두었다. 그 시절에는 다방의 구석진 곳에 바둑판을 준비해 두고 손님을 유치했던 것이다.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저녁 늦도록 바둑을 두어도 주인은 내색하지 않았다. 일요일은 오전과 우후로 나누어 두 번 정도 다른 메뉴로 차를 주문하는 것이 통례였다. 그 친구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던지 나의 아내와 친구의 아내는 우리를 애인사이 라고 불렀다. 조금 과장하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보다 그 친구와 바둑으로 소일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근무지가 하동과 남해로 이동했을 때도 일요일 당직 때나 방학 중의 당직 때면 근무지에 함께 가서 바둑을 두고 같이 돌아오곤 했다.
그랬던 친구가 퇴직 후에 자녀들을 따라 거처를 서울로 옮겨갔다.
그 후로 나의 바둑 친구는 바뀌었다. 초등학교 선배인데 주류회사 사장이다. 울산에서 진주까지 바둑을 두러 온다. 내가 양산에 근무할 때는 거의 매일 퇴근 후에 기원에서 바둑을 두었다. 퇴직 후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만나 바둑을 두는데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내가 양산으로 가고 세 번 정도는 선배가 진주로 온다. 토요일은 기원문을 닫을 때 까지 두고 일요일은 오전부터 오후 6시까지 바둑을 두고 헤어진다.
2. 지기지우(知己之友)
흔히들 친한 교분을 가진 친구를 ‘지우’라고 한다. ‘지우’도 한자로 표기하는 글자에 따라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지우(知遇)」의 경우는 ‘자기의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 잘 대해 줌’이라는 의미인데 반해,
「지우(知友)」는 ‘나를 알아주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란 뜻이다.
지우(知友)가 되는 전제는 내가 상대를 사귀고 싶어 하고, 상대방 역시 나의 마음을 간취(看取)할 의사가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우는 어느 한 쪽의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탈무드에는 세 부류의 벗이 있다고 했다
첫째, 음식처럼 매일 필요한 벗.
둘째, 약처럼 가끔 필요한 벗.
셋째, 항상 피해야 하는 질병 같은 벗.
공자는 세 가지 유익한 벗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은 사람을 꼽았다
사실 지기지우(知己之友)의 유래는 백아와 종자기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전국시대에 거문고의 달인 ‘백아’의 음률을 알아주는 사람은 오직 ‘종자기’뿐이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그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는 “훌륭하다. 우뚝 솟은 그 느낌이 태산 같구나.”라고 했고, 그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는 “멋있다. 넘칠 듯이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강과 같군.”이라고 했다. 백아가 뜻하는 바를 종자기는 다 알아맞혔다.
그러나 훗날 종자기가 죽은 것을 알고 백아는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고 그 줄을 끊어버렸다는 백아절현의 고사가 있다
그래서 절친한 벗을 ‘지음’(知音) 혹은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한다.
3. 나와 바둑 파트너 간의 수담(手談) 원칙
가까운 친구끼리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원만하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친구와 좋은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지우치지 않고 서로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소통할 때 가능하다.
더구나 바둑은 서로 경쟁을 하는 게임이기에 자칫 잘못하면 우정을 상하기 쉽다.
오랫동안 신뢰가 쌓여 공감이 형성되고 나면 사소한 말이나 언행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둑을 두면서 우정을 쌓아 가는 기본적 신뢰다.
기원에서 가끔 낯선 사람과 바둑을 두어 보면 즐거워야 할 바둑 게임이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를테면 판세가 유리하거나 불리할 때 상대방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는 사람 있는가 하면, 판세가 유리하면 콧노래를 부르고 불리하면 바둑알을 난폭하게 놓는 사람이 있다. 또, 내기 바둑이 아니면 바둑을 성의 없이 건성으로 두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과 바둑을 두고 나면 기분이 어쩐지 묘하다.
나와 나의 바둑 파트너는 바둑에 임하는 불문율이 있다.
첫째, 바둑을 두자고 제의 하는 전화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둘째, 바둑 약속은 다른 사안보다 우선한다.
셋째, 내기 바둑은 어떠한 경우라도 두지 않는다.
넷째, 소요 경비는 내가 좀 더 부담한다는 생각을 한다.
다섯째, 바둑 결과에 대해 희롱은 하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을 전제한다.
바둑은 신사도가 바탕이다. 그래서 바둑을 둘 때에는 상대를 배려하고 존경하면서 바둑에 대한 기본예절을 지켜야 한다. 기도를 지키면서 바둑을 두면 패하고도 즐겁고 승리하고도 겸손해 진다.
바둑 고전에 ‘위기오득(圍棋五得)’이란 말이 있다.
1) 득호우(得好友) - 바둑을 통해서 좋은 벗을 얻는다.
2) 득심오(得心悟) – 바둑을 통해서 오묘한 삶의 이치를 깨닫는다.
3) 득인화(得人和) - 바둑을 통해서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다.
4) 득교훈(得敎訓) - 바둑을 통해서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5) 득천수(得天壽) - 바둑을 두면 천수를 누릴 수 있다.
5. 바둑으로 인한 에피소드
나와 바둑을 즐겨 두는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바둑 두기를 좋아한다. 일 년 365일 중에서 350일 정도는 기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분이다.
첫 아들 결혼식을 부산의 예식장에서 일요일 날 하도록 날짜가 잡혀 있는데 토요일 날 진주에 바둑을 두러왔다. 기원문을 닫을 때 까지 바둑을 두고 헤어졌다. 그런데 늦은 시간에 전화가 왔다. 결혼식 날 쓸 경비를 외투 주머니에 넣고 왔는데 그 외투를 기원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았을 때의 시각은 벌써 밤 12시가 넘었다. 그런데 낭패였던 것은 원장에게 연락할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비상수단을 썼다. 열쇠를 취급하는 분께 연락하여 문을 열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말하기를 남의 집 문은 경찰의 입회가 없으면 불법이라서 열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 하고 나의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었다. 그랬더니 인적사항을 기록한 후에 문을 열어 주었다.
다음날 오전에 기원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원장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고 양해를 구했었다.
둘째 아들 결혼식은 진주 명신 예식장에서 했다. 화객들과 일가친척들이 다 떠난 뒤에 또 바둑을 두었다. 그날은 그렇게 늦지 않았다. 헤어진 뒤 30분 정도 지났을 때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 받은 축의금을 자신이 주차했던 담벼락 옆에 두고 온 것 같다는 것이다. 뒷좌석에 있던 물품을 앞으로 옮겨 싣는 와중에 축의금이 든 가방을 내려놓고 실수로 싣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차를 이동해 나올 때 그 자리에 봉고 차 주차하는 것을 보았는데 봉고차 옆에 가서 확인을 해 보라고 했다. 부리나케 달려 그 장소에 갔더니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나와 바둑을 두는 파트너는 그 정도로 바둑을 좋아한다. 그런 분의 바둑 제안을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6. 우정과 텃밭의 공통점
텃밭의 작물을 잘 기르기 위해서는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약을 제 때에 뿌리고, 김을 매주고, 북을 돋우고, 곁순을 질러주고, 적과를 알맞게 해야 제대로 된 수확을 할 수 있다.
벗의 사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랑의 손길로 물을 주고, 존중의 손길로 거름을 주고, 믿음의 손길로 어루만지면 무럭무럭 자라게 마련이다.
그리고 가끔 자신을 반추해 보아야 한다.
이기심이 지나쳐 벗에게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허물이 없는 사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지는 않았는지?
농담의 형식을 빌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예의에 벗어난 무례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본심은 포장해 둔 채 가식으로 대하지는 않았는지?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친구를 대하면 진실한 우정이 깊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관계란?
사랑하는 것과 비례하여 정은 깊어지고, 가슴을 여는 만큼 가까워지며, 이해하는 만큼 성숙해 진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진 않다. 시간과 돈과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작심하기가 어려워서다.
중국 당나라 현종 때 왕적신(王積薪)이라는 사람이 바둑의 비결을 담은 ‘위기십결(圍棋十訣)’을 지었다.
이른바 不得貪勝(부득탐승), 入界宜緩(입계의완), 攻彼顧我(공피고아), 捨小就大(사소취대), 棄子爭先(기자쟁선), 逢急棄須(봉급기수), 愼勿輕速(신물경속), 動須相應(동수상응), 彼强自保(피강자보), 勢狐取和(세호취화)가 그것이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살이와 궤를 같이 한다.
7. 글을 맺으며
同心之言 其臭如蘭(동심지언 기취여란)이라 했다. 즉, 마음을 함께 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와 같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마음이 통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만나면 즐겁고 설령 만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각만 해도 흐뭇하다. 자주 못 만난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진심이 축적된 벗은 만나지 않다가도 만나면 예전과 같고, 소식이 없다가도 소식을 접하면 쉽게 과거의 정으로 되돌아간다. 그러한 정을 쌓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으면서 또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바둑이다.
바둑은 흑백인 두 종류의 돌로서 지혜를 겨루어 승패를 가늠하는 종합 예술이다. 그러므로 반상에는 불을 뿜는 치열한 전투가 연속으로 벌어진다. 그 전투 속에는 오묘한 삶의 진리가 숨어있다. 지나친 욕심은 오히려 실패의 원인이 됨을 스스로 깨닫게 해 주기도 하고, 한발 물러서서 스스로를 지키는 지혜가 때로는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해 주기도 한다.
바둑과 인생살이가 닮은 점은 자기 생각대로만 판이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지나간 인생은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없어도 바둑에는 ‘복기’가 있어서 자신이 둔 한판을 되짚어보고 반성할 수 있다. 그것이 바둑을 두는 사람의 내공을 더욱 두텁게 하여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비탕이 되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주관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지기와 바둑을 두는 것도 그 영역의 하나다. 되돌아보면 나에게 두 분의 바둑 친구가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분들의 덕택에 나의 삶이 더욱 윤택하고 향기를 발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잡다한 글을 쓰다 보니 과거 교분을 쌓았던 친구들이 흑백의 필름처럼 지나간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문득 李太白의 ‘山中問答’시가 생각이 난다. 소식이 없어도 만족하게 살고 있음을 표현한 시다.
어떻게 생각하면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도 같고, 어떻게 생각하면 관련이 없는 것도 같다.
그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매조지 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 어찌 산중에 묻혀 사느냐고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 복사 꽃 물길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 이곳이 인간 속세 아닌 별천지로세
소식이 없는 친구는 별천지에서 즐기면서 사는 친구라고 치부하면 얼마나 좋을까?
易學(역학)의 관점에서 고찰한 우리 고장 晉州
周易(주역)은 공자가 만년에 가죽 끈으로 엮은 주역 竹簡(죽간)이 세 번이나 끊어졌을 정도로 많이 읽은 책이다. 주역의 내용 조직을 함축하여 말하면‘우주의 운행 진리 속에서 자연의 법칙을 찾아내고, 그 법칙에 순응하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방안을 예측하고 설명한 서적이다.’
책의 구성 내용은 피상적인 공리공담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본받을 만한 도리가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주역이라 하면 선입견이 난해한 학문적인 이론과 占(점)치는 책으로 간주하고 도전하기를 머뭇거리기 쉽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박완식 교수의 인터넷 주역 강의 159강을 인내심을 가지고 두 번을 시청하고 난 후 김경탁님이 엮은 명문당 발행 周易(주역)을 읽었다. 주역이 철학 서적인 관계로 내용이 심오하고 난해한 면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은 어떠한 학문이든지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은 이미 갖춰져 있다. 다만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한자의 글자를 다 모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물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비록 책의 내용이 암시적이기는 하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자연현상이나 인간사의 보편적 원리를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지식인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역은 卦(괘)로서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卦(괘)는 陽卦(양괘)와 陰卦(음괘)가 있다. 이 두 卦(괘)는 곧 남녀를 뜻한다. 남녀는 음양을 상징한 것이고 남녀의 상징 부호도 가장 외설적인 부분을 상징한 것이다. 이른바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부호로 표시한 것이 양괘(⚊)와 음괘(⚋)다.
해석도 창의적이다. 예를 들어 언급하면 사람들이 봄철에 꽃구경을 가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보면 식물의 성기를 보러가는 것이다. 꽃이라 하는 것은 식물이 씨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성기인 것이다.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여 종족을 보존하려는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그런 논리로 접근하면 주역 괘사에 쓰이는 爻(효)를 아름다운 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부호화 시킨 것이라 생각하면 爻(효)를 조합하여 해석할 때 생각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상상력도 생긴다.
주역 괘를 구성하는 요소를 설명할 때 太極(태극), 兩儀(양의), 四象(사상), 8괘, 64괘를 언급한다. 8괘는 우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본바탕이 되고, 8괘를 거듭제곱으로 도해한 괘가 64괘인데 이것이 吉凶禍福(길흉화복)을 구분 짓는 근간이 되는 것이다.
주역에서 周(주)자가 뜻하는 것은 周나라의 易(역)이라는 의미다. 易(역)자는 곧 日자와 月자를 합성한 회의 문자다.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이 운행하면 지구상의 만물은 그 운행의 원리에 따라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거기에는 일정한 변역의 원리가 있다. 그 변화의 원천에 따라 사람의 삶과 운수가 결정된다고 가정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설명하고 해석한다.
주역의 점괘를 해석할 때 주역점괘에 나타난 현상을 불변으로 보지 않고 상황, 조건, 성별, 시대에 따라 변형시켜 달리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변형시켜 해석하는데도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은 괘사에 쓰여 진 불변의 원칙 토대위에서 변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晉州(진주)를 역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어느 의미에서 보면 흥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晉州(진주)라고 쓸 때 한자의 음과 뜻은 이렇다. 晉(진)은 ‘나아간다’는
뜻이다. 州(주)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固有名詞(고유명사) 두 글자 중에서 ‘晉(진)’자에 방점이 있다.
周易(주역)의 서른다섯 번째 괘는‘火地晉(화지진)’괘다.
卦(괘)의 배열을 보면 上卦(상괘)는 ☲ (離=火)괘이고, 下卦(하괘)는 ☷(坤=地)괘다.
문왕의 彖(단)에 晉(진)을 설명하기를 ‘日出東嶺之象(일출동령지상), 君臣相際之義(군신상제지의)’라 했다. 해석하면 ‘태양이 동쪽 산등성이에서 떠오르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날 때 義(의)로써 만난다.’는 뜻이다.
火地晉卦(화지진괘)에서 ‘☲’괘는 태양을 말한다. ‘☷’괘는 땅을 말한다. 이역하면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이다.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나아간다.’는 의미의 晉(나아갈 진) 글자를 차용한 것이다. 그것이 晉(진)이라는 卦名(괘명)이 된 것이다.
솟아오르는 기상이 晉(진)’이기에 ‘日出東嶺(일출동령)’은 태양이 동쪽 산등성이에서 솟아오르는 상이 되는 것이다.
東(동)은 음양오행의 입장에서 보면 陽(양)의 방향이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희망적이고, 동적이고, 생산적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현상으로 풀이하면, 밝은 세상이 전개되는 시기가 도래하리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밝은 사회가 되려면 명철한 임금과 의로운 신하가 만나게 됨으로써 이뤄진다. 신하는 忠(충)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임금은 禮(예)로써 신하를 부리면 사회는 저절로 밝아지는 것이다.
밝은 사회란?
억지로 공적을 만들어 그런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 다시 말하면 남들의 눈에 크게 띄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해 가는 사람의 공로를 찾아내어 대우받게 하는 사회다.
주역의 64괘중에서 ‘나아간다.’는 의미를 가진 괘는 晉卦(진괘), 升卦(승괘), 漸卦(점괘) 세 개의 괘가 있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 地風升(지풍승)이 지표면에 솟아오르는 나무라면, 風山漸(풍산점)은 산위에 이미 커버린 나무를 말한다. 이 세 개의 괘가 진취적으로 나가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차이가 있다. 그것은 지속성과 속도의 차이다. ‘火地晉(화지진)’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속도로 나아간다는 의미라면, 地風升卦(지풍승괘)는 나무가 지표면에서 겨우 돋아 오르는 것에 불과하고, 風山漸卦(풍산점괘)는 이미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이기 때문에 발전성이 더딘 것이다.
火地晉卦(화지진괘)를 卦象(괘상)으로 보면 ‘日出於地(일출어지)에 升而益明(승이익명)’이라 했다. 즉 태양이 지평선위에 떠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더 밝아진다는 괘이다.
卦德(괘덕)으로 보면 ‘順而離乎大明之主(순이이호대명지주)’라 했다. 즉 下卦(하괘)의 ☷(坤=地)괘는 아래의 신하가 충성과 순종으로서 크게 명철하신 임금에게 上卦(상괘) (☲ : 離=火)에게 붙어서 섬기고 있는 상이 된다.
卦體(괘체)로 보면 ‘柔進而上行(유진이상행)’이라 했다. 즉 부드러움으로써 위로 행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움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려 주는 사람이 공이 있는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단사에서 ‘晉(진)은 進也(진야)’라 했다. 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승진을 뜻한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태양이 솟아오른다. 고 표현한 것이다. 환언하면 晉卦(진괘)는 벼슬길에 진출하는 卦(괘)가 되는 것이다.
晉卦(진괘)에는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밝음이란 가려졌던 것이 벗겨져야 밝아지는 것이다. 태양이 지구에 가려졌다가 벗어나야 밝음을 얻는 것처럼 인간의 德(덕)도 원천적으로 태어날 때는 덕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살아가면서 그 밝은 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막힌 것을 걷어내고 본성의 밝은 곳으로 돌아가야 함이 당연한 이치라는 것을 晉卦(진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晉’에 나타난 의미를 오늘 날 우리들의 삶과 견주어 보면 示唆(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출중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는데, 그들의 성품은 충성스럽고 우직할 것이다.
둘째, 인위적인 활동에 의해 억지로 공적을 만들어 그것을 탐하기 보다는 부드러운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인재가 많이 배출될 것이다.
셋째, 이 고장에서 배출한 인재는 義(의)를 중하게 여겨 쉽게 이익에 따라 변절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넷째, 인물의 기상은 항상 진취적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다섯째, 도시의 발전은 끊임없이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글쓴이는 진괘를 보고 이렇게 해석을 했지만 달리 해석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를테면 錯掛(착괘), 反卦(반괘), 互卦法(호개법)이 그것이다. 거기에다 구체적인 해석법 應(응)과 比(비)와 承(승)과 乘(승)의 네 가지 경우의 수 까지 덧붙여 상황에 맞게 해석하면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周易(주역)의 卦(괘)에는 天地(천지)의 모든 理致(이치)와 現象(현상)이 있다. 그것은 卦爻彖象(괘효단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卦(괘)가 理致(이치)와 現象(현상)이라면 爻(효)는 運用(운용)의 變通(변통)이다. 그 變通(변통)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주역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결국 周易(주역)이라는 책 속에는 大宇宙(대우주)와 인간의 모든 일이 압축된 책이라 할 수 있다.
나훈아 콘서트 진주 공연 관람 소감
2019년 12월 21일 19시 30분 진주 실내체육관에서 나훈아 콘서트 진주 공연이 있었다. 공연 시간은 약 2시간 15분 동안 진행되었는데 감동의 연속이었다. 왜 나훈아 콘서트가 최고인가를 실증적으로 증명한 공연이었다.
관람에 앞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나훈아 진주공연 티켓이 5분 만에 완판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경쟁이 심하기 때문에 보통 사람은 티켓을 구매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아들이 티켓 두 장을 구매하여 보내왔다. 아들이 지금까지 구매하여 보내 주었던 공연 티켓 조용필, 이선희, 조수미 콘서트 좌석은 항상 VIP석이었다. 그런데 이번 좌석은 일반석이었다.
딸이 티켓 구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아들은 명절 때 치열한 기차표 예매로 단련이 되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티켓은 대부분 확보하는 노하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나훈아 티켓 구매에는 그 노하우도 통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예매 시간에 맞춰 딸, 아들, 며느리가 동시에 접속을 시도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예 접속도 못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아들은 접속이 되어 일반석이라도 구매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연 장소에 1시간 일찍 도착했다. 여유를 가지고 갔는데도 차량이 얽혀 주차하는데 애를 먹었다. 그리고 관람객이 너무 많아 입장하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입장 티켓 확인을 할 때 공연 모습 촬영을 금지시키기 위해 소지한 스마트폰 카메라 앞에다 스티커를 붙여 사진을 촬영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 무대장치와 공연 내용의 기획이 치밀하고 조직적임에 감탄했다. 전체 구성은 마치 잘 쓴 단편소설처럼 종횡의 아귀가 꼭 맞았다. 무대와 객석을 디지털로 컨트롤 하는 영상으로 배경을 만들고 조명을 이용하여 객석도 무대의 일부가 되도록 꾸몄다.
콘서트의 구성과 내용조직도 창의적이었다. 때로는 무대 전면 전체가 시네마스코프 입체 화면의 영상처럼 변하는데 배경은 나훈아가 부르는 노래 말에 어울리도록 영상이 나타나고 나훈아 자신은 주인공이 되도록 등장시켜 영상과 실황을 절묘하게 결합을 시켰다.
어떤 경우에는 배경과 무대에 역동성을 불어 넣어 나훈아가 부르는 노래가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서정적인 노래를 부를 때는 바이올린과 첼로 반주가 부각되도록 하였다. 흥겨운 노래를 부를 때는 관악기가 반주의 주음이 되어 귀청을 울리게 했다. 또 자신이 기타를 직접 치며 노래할 때는 목소리의 기교를 마음껏 발휘하여 관객을 숨죽이게 했다. 거기에다 특유의 재담으로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화술은 압권이었다.
오픈 무대는 로켓발사 카운터 다운을 모방하였는데 관객이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시계의 초침이 옮겨 감에 맞춰 ‘하나’ ‘둘’ ‘셋’ ‘나’ ‘훈’ ‘아’를 외치게 유도하여 함성의 데시벨이 100에 미치지 못하면 무대가 열리지 않도록 했다. 첫 번째 시도의 데시벨은 85였다. 당연히 무대가 열리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에는 곧바로 100을 넘겼다. 무대가 열렸다. 무대의 조명과 영상은 생동감을 더해 박진감이 넘쳤다.
처음 부른 노래는 ‘땡벌’이다. 첫 곡부터 관객을 사로잡았다. 이어서 연속으로 ‘물레방아 도는데’ ‘잡초’ ‘가라지’ ‘무시로’ ‘낙엽이 가는 길’의 노래가 이어졌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무대배경은 시네마스코프 입체 영화 장면처럼 변했다. 화면은 노랫말에 어울리는 영상이 변화무쌍하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땡벌’ ‘물레방아도는데’ ‘잡초’와 같이 흥겨운 노래에는 관악이 반주의 주음을 이룬 반면에 ‘가라지’ ‘무시로’ ‘낙엽이 가는 길’과 같은 서정적인 노래에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주음이 되어 하모니를 이루었다.
‘18세 순이’를 부를 때는 백댄서 16명과 어울려 연출하는 장면이 뮤지컬을 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영화주제가 ‘사랑’을 부를 때는 실제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나훈아 자신과 정윤희가 출연하여 사랑하는 장면을 발췌하여 상영하였다. 노래가 끝나고 극적이었던 영화장면을 정지 화면으로 보여 주면서 위트 있는 해학적인 말을 던져 관객을 웃도록 했다. 이어서 ‘홍시’를 불렀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을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이야기했는데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들의 사람들은 모두 공감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야인생활 11년과 110여명의 스텝이 고생을 함으로써 이런 무대가 꾸며지는데 대한 고마움도 피력했다.
이어서 잠적을 끝내고 컴백한 후에 취입한 노래 ‘아이라예’ ‘남자의 일생’을 불렀다.
그 노래가 끝난 후에 마술로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악보가 새겨진 책을 펼치니 비둘기 두 마리가 나와 날아갔다. 그 중의 한 마리는 꼬리에 영상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객석 위를 빙 돌아 조명을 비추는 영상 기사에게 날아갔다. 관객들의 호응을 얻기에 충분한 극적 장면이었다. 그런데 리번을 달았던 비둘기는 드론의 기술을 접목한 인공 비둘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홀로그램 기법을 적용한 마술을 했는데 그 속에서 기타가 나타났다. 그 기타를 직접 치며 ‘진주 처녀’ ‘동백아가씨’ ‘갈무리’ ‘그대 그리고 나’를 불렀다. 이 때 목소리만으로 기교를 부렸는데 그 노래 소리가 보통 가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감미로운 음성으로 음정을 높였다가 낮췄다가 세게 했다가 여리게 했다가 바이브레이션을 넣은 상태에서 목소리를 꺾다가 바이브레이션을 뺀 상태에서 목소리를 꺾는 등 자유자재로 소리를 희롱하며 노래를 불러 관객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잠시 후 무대가 바뀌고 의상을 갈아입은 뒤에 ‘백세인생’ ‘공’ 노래를 불렀다. 이것 또한 뮤지컬을 보는 느낌이었다.
무대의 마지막은 관객과 호응을 할 수 있는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 ‘청춘을 돌려다오’ ‘울긴 왜 울어’ ‘머나먼 고향’ ‘고향 역’ ‘고장 난 벽시계’ ‘영영’ ‘자네’를 연속으로 불렀는데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끝 노래는 출연진이 모두 나와서 ‘징글벨’을 부르면서 매조지 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여운은 한동안 공연장에 가득한 채 맴돌았다.
19일 날 古文眞寶(고문진보) 강의 시간에 이창호 선생께서 도연맹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강의를 마친 후 덧붙여 이렇게 이야기 했다.
중국 고전 중에서 참으로 잘 지어진 보물 같은 글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정수만 모아 편찬한 책이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古文眞寶(고문진보)다.
이 책의 글 외에 명문이 기록된 책이 또 있는데 책의 이름이 古文寶止(고문보지)이다. 이 책의 글만 읽으면 더 이상 명문 책은 볼 필요 없이 그쳐도 된다는 책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글자 止(그칠지)에 의미심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인용한다면 나훈아 콘서트를 본 사람이라면 이젠 다른 가수의 콘서트는 볼 필요가 없다. 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을까?
아무튼 나훈아 콘서트는 지금까지 내가 본 콘서트 중에서 단연 갑이었다. 기획이 빈틈없고, 무대 영상이 3차원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디지털로 통제하고, 음향기기의 성능이 좋아 작은 울림의 하나 까지도 느낄 수 있고, 가수의 노래가 특출하고, 화술로서 관객의 감정을 마음대로 휘젓는 무대 매너를 갖고 있다. 이런 공연을 접하기란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된다면 시니어들이 한번 쯤 관람해 보는 것이 좋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