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는 1519년 중종의 주도로 조광조, 김식 등 신진 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귀양보낸 사건이다.
중종의 이름은 이역으로 18살 왕이 되기 전엔 진성대군으로 불렸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참지 못한 박원종과 성희안은 반정을 준비하고 반정을 일이키자 신수근과 임사홍을 빼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반정에 참여해 연산군이 쫓겨낸다.
후에 반정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부 공신이 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진성대군인 중종이 조선의 11대 왕으로 오르게 된다.
연산군 때는 왕권이 너무 강력해서 힘들었던 훈구파들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가 중에 만만한 한 사람을 골라 왕좌에 앉히려 했다. 그 사람이 중종이다.
중종은 38년 8개월의 재위 기간 동안 별로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사화가 한 번 있었다.
그것이 기묘년에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고 하여 기묘사화이다.
중종은 아는 것도 없고, 힘도 없고, 세력도 없는 상태로 아무것도 없이 왕에 올랐다.
그래서 항상 신하들의 눈치만 보며 살았다.
중종이 신하들의 눈치만 보니, 정치를 해 나갈 수 없어 한편으론 연산군을 몰아냈다고 좋아했지만, 백성들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관료들의 행패를 억누르던 연산군이 없어졌으니, 관료들은 더욱 행패를 부려 백성들은 힘들고, 심지어 중종반정에 참여 신하들이 엄청 많은데 그 사람들이 전부 공신이 되니, 그들에게 포상을 지급하느라 연산군의 사치 때문에 줄어들었던 국가 제정을 100명이 넘는 공신들에게 지급하니, 백성들의 세금을 그만큼 짜낸다.
그리고 연산군이 유배당하자, 관료들은 놀고먹고 자기만 하고, 일을 굉장히 대충했다.
얼마나 대충했냐면 중종 사후 중종실록을 편찬하려는데 사관들이 회의나 정사기록들을 제데로 정리해 놓지 않아 참고할 자료가 부족했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날마다 심해져 가는데 중종 초기 계속해서 가뭄, 홍수, 지진 등 기상이변이 연달아 일어나며 백성들은 오히려 연산군 때보다 살기 힘들어졌다고 생각할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해서 자기편으로 만든다.
사림들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때문에 힘을 잃었지만, 계속해서 열심히 과거를 보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 정암 조광조도 있었다.
훈구파들은 어느정도 다른 문화를 인정하긴 하지만 사림파들은 성리학 이외에 것들은 배척했다.
조광조는 불교, 도교같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아 불교, 도교 행세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고,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가 만든 예법서인 주자가례를 널리 반포하고, 성리학 어린이 율리책인 소학을 보급하자고 주장한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자신을 소학동자라 부를 만큼 소학에 진심이었는대, 조광조도 그 뜻을 이어받아 소학을 중요시 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자기편인 사림들이 없었다.
과거시험은 3년마다 열리고 33명밖에 합격을 못하니 조광조는 중종에게 추천을 통해 관리를 뽑자고 말한다.
처음엔 훈구파를 견제해야 한다는 뜻이 서로 맞아 중종은 허락했다.
그래서 조광조는 150명을 추천해 천거했는데, 그중 120명이 사림파였다.
이것이 추천을 이용한 천거제인 현랑과이다.
이렇게 하여 조광조는 세력을 키운다.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힘입어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고, 박팽년과 성삼문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등 여러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그리고 거짓 공훈으로 공신이 된 훈구파 사람들을 쳐내고자 위훈 삭제라는 개혁활동을 추진한다.
그래서 3/4에 해당하는 공신의 공적이 취소되었다.
이런 조광조의 개혁 때문에 힘들어진 남곤을 비롯한 훈구파들은 조광조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중종도 조광조를 죽이려 한다.
중종이 조광조를 싫어하게 된 이유 중 첫 번째는 조광조는 빠르게 개혁을 해 나갔지만, 너무 갑자기 나라가 변하다 보니, 조광조가 일하는 족족 문제가 생겨 정치적인 신뢰를 잃어버린다.
두 번째는 조광조가 왕의 과외를 시키는데, 중종을 잠도 재우지 않는다.
조광조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똑똑하던 사람이었는데, 반대로 중종은 세자 수업도 받지 않은 상태라서 학력 차이가 엄청났다.
그래서 답답한 조광조가 중종을 밤을 세워서라도 공부를 시켰다.
중종은 처음엔 조광조가 정말 열심히 가르쳐 주나 보다 했지만,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중종은 술도 못 마시고, 여자도 못 만나고, 잠도 못 자게 되어 슬슬 조광조가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다른 신하들과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조광조를 들였는데, 다른 신하들 마저 조광조 편을 둘어서 왕과 맞먹는 권력을 가져서 왕권에 도전한다. 라고 생각했다.
중종의 마음이 조광조에게서 멀어져 간 것을 눈치챈 남곤을 비롯한 훈구파는 한 나뭇잎에다 꿀로 주초위왕이라는 글자를 쓴다.
달릴 주(走)와 닮을 초(肖)를 합치면 나라 조(趙)가 되는데, 거기에 될 위(爲)와 임금 왕(王) 자를 더해 조씨가 왕이 된다. 라는 뜻이 나온다.
그래서 한나절 만에 벌레들이 글씨대로 나뭇잎을 파먹어서 자연적인 글씨가 만들어진다.
남곤는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를 시켜 이 잎새를 가지고 중종에게로 다가가 조광조가 역적이라는 것을 하늘이 예언했다며 조광조를 몰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종은 가장 가까운 신하였던 조광조를 유배 보낸 뒤 사약을 내리려는 데 이는 심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1개월 뒤에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중종실록에서도 “정이 부자처럼 가까울 터인데, 조금도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예전에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것 같다. ”라고 적혀있다.
조광조가 죽자, 사림들이 대거 쫓겨난다.
이것이 기묘사화다.
그리고 중종은 조광조가 실행했던 개혁들을 모두 원래대로 되돌리게 되었다.
중종은 평소 우유부단한 면이 많았는데 형이 연산군이라 그런지 누군가 왕위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조금이라도 들면 냉혹한 결단을 내렸다.
나중엔 조광조를 사형시킨 것이 후회되어 내쫓은 사림들을 다시 등용했다.
중종에게는 왕이 되기 전 단경 왕후라는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영의정이 반정을 반대했기에 그녀 역시 궁에서 쫓겨나 중종은 단경 왕후랑 강제로 이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종은 단경 왕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왕후가 사는 인왕산을 바라보는데 단경 왕후도 중종이 보고 나 잘살고 있다고 궁궐에서 입었던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펼쳐 놓고 치마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로 이 행동을 계속했다.
이것이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이다.
그러다 새 왕후였던 장경 왕후가 일찍 죽자 새로운 왕비가 필요했는데, 여기서 전 왕비였던 단경 왕후를 복위시키자. 라는 의견이 나왔지만, 중종은 단경 왕후의 가족은 복직시켜도 단경 왕후만큼은 멀리 살지 않았음에도 선물 하나 주지 않고, 끝끝내 복위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왕후 자리는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여성인 문정 왕후에게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