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이 화엄 도리에 달통했음을 확인한 지엄화상은 크게 기뻐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참으로 그 칭찬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허허허어••••••. 내 이제야 내 문하에서 화엄의 오묘한 도리를 깊은 데까지 밝혀낸 그대를 만났으니 이는 참으로 부처님이 은덕이요, 조사님의 은공일세.”
“아니옵니다, 스님. 소승 아직 화엄의 묘리를 다 알지 못하옵니다.”
“아닐세, 그대는 이제 그만하면 이 중국에서는 가히 화엄의 도리를 아는 데 당할 자가 없을 것이야.”
“아니옵니다, 스님. 스님께서 그토록 과찬의 말씀을 내리시니 소승은 참으로 얼굴을 들기가 심히 민망스럽사옵니다.”
“이것 보게, 의상.”
“예, 스님.”
“화엄의 이치와 도리를 그만큼 달통했으니 이제 그대가 아는 화엄의 도리를 글로 작성해서 보여 주시게.”
“아니옵니다, 스님. 소승은 아직 공부가 익지 아니했으니 말미를 더 주시옵소서.“
”정녕 그대가 깨달은 바를 나에게 보여주지 아느하겠는가?”
“죄송하옵니다, 스님. 하오나 때가 되면 반드시 글로 적어 스님께 바쳐 올리겠사옵니다.”
의상스님은 스승 지엄화상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물러나온뒤, 다시 화엄의 도리를 더욱더 열심히 참구하여 한 점의 의심 없이 남김없이 다 배워 마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의상스님은 화엄경을 펴놓고 법계를 관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선인(仙人)을 만났다.
“이것 보시게, 의상!
이제 그대는 그대가 배우고 깨달은 바를 반드시 저술하여 중생들에게 베풀어 줌이 마땅할 것이니 지체하지 말게!”
이렇게 두 번 세 번 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의상스님은 그 후로도 꿈을 꾸었는데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꿈에 나타나서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을 십여 제 주는가 하면 그 후에 또 꿈을 꾸니 이번에는 푸른 옷을 입은 청의동자가 나타나서 화엄의 도리를 나타내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상스님이 세 번이나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때 의상스님은 세 번이나 이상한 꿈을 꾸고나서 스승인 지엄화상께 이 사실을 자세하게 여쭈었다.
“그래, 그대가 그렇듯 세 번이나 꿈을 꾸었더란 말이지?”
“그렇사옵니다.”
“나는 그런 신령스러운 꿈을 꼭 한번 꾼 일이 있었네. 그런데 그대는 세 번이나 꾸었으니 이는 그대가 배우고 깨달은 화엄의 도리를 반드시 저술하여 세상에 전하라는 부처님의 분부이시네. 그러니 속히 시행토록 해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스님. 하오면 스님의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의상스님은 더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그동한 배우고 깨달은 화엄의 도리를 글로 지어 대승장 열 권을 엮어서 지엄화상께 올렸다.
지엄화상은 의상스님이 엮은 대승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세세히 살펴보았다.
“그래,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구먼. 헌데 말일세, 의상.”
”예, 스님.“
“그대가 지은 글을 자세히 드려다 보니••••••.”
”예, 스님.“
“뜻은 매우 깊고 가상타 하겠으나 말이 좀 옹색하다 할 것이야.”
“••••••말이 옹색하다 하오시면••••••?”
“군더더기 말이 섞여있다는 것이니 다시 한 번 다듬어 보도록 하시게.”
“예, 스님 분부대로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의상스님은 대승장 열 권을 들고 물러나와 한동안 방안에 틀어 박혀 화엄경의 오묘한 도리를 글로 다시 써서 지엄화상에게 올렸다.
이를 본 스승 지엄화상은 매우 기뻐하며 제자를 데리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이것 보시게.”
“예, 스님.”
“그대가 지은 이 글이 부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글은 이 촛불에 태워도 타지 아니할 것이야.”
의상스님은 스승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예에? 아니 하오시면 소승이 지은 이 글을 불에 태우신단 말씀 이시옵니까?”
“자, 두고 보세라.”
지엄화상은 제자 의상이 지은 글을 촛불에 태우는 것이었다.
의상스님은 그만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의상스님이 글을 쓴 종이를 지엄화상이 촛불에 태웠으나 의상스님이 쓴 글 가운데 이백 열 자는 끝까지 타지 않는 것이었다.
지엄화상이 부처님 전에 엎드렸다.
“오! 부처님, 감사하옵니다. 의상이 쓴 글 가운데 이백 열 자를 인가해 주셨으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의상스님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스님, 대체 어찌된 일이온지요?”
“타고 남은 이 이백 열 자로 다시 게송을 지어 만들도록 하시 게!”
의상스님은 끝까지 불에 타지 아니하고 남은 글자 이백 열 자를 수습하여 며칠 동안 문을 걸어 잠근채 이백 열 자를 다시 배열하여 오묘한 화엄경의 도리를 삼십 구의 게송으로 엮고, 이 게송을 도표로 배열하였다.
바로 이 게송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저 유명한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가 되었다.
의상스님이 드디어 완성한 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스승인 지엄화상께 올리니 지엄화상은 이 오묘한 법계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래, 타고 남은 이백 열 자로 이 법계도를 만들었단 말이신가?”
“그러하옵니다.”
“그러면 이 한가운데 모신 이 법자로부터 시작해서 왼쪽으로 읽는단 말이렷다?”
“그렇사옵니다.”
“어디 그대가 직접 한 번 읽어 보시게.”
“예.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보십시오.
법성원융 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 무명무상 절일체.”
“허허, 그러니까 이렇게 네모 반듯한 그림 안에 왼쪽으로 읽고, 아래로 읽고, 이렇게 빙글 빙글 돌아가면서 이백열 자를 다 읽게 되어 있네 그려.”
“그렇사옵니다.”
“이것 보시게, 의상.”
“예, 스님.”
“여기 이 법계도에 적은대로 그대가 한 번 읊어 보시게.”
“••••••예, 분부 따르겠사옵니다.
”법의 성품 둥글둥글
두 모습 없어
티끌조차 꼼짝없이
본래 고요하네.
이름도 형상도
다 끊었으니
부딪쳐서 알아야지
다른 도리 없네.
그 진리 매우 깊고
미묘할세라
제자리 안 지키고
인연 따라서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이니
작은 티끌 속에
세계를 삼켰네.“
의상스님이 화엄일승법계도에 적힌대로 게송을 읊으니 스승이신 지엄화상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잊고 그저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허허허허•••••• 허허허허••••••.“
“고정하십시오, 스님••••••.”
”그래, 그래••••••. 숨겨진 화엄의 오묘한 도리를 그대가 깊이 찾아내고 끌어내었으니 그대는 참으로 스승인 나보다 한 걸음 앞섰다 할 것이야.“
“아니옵니다, 스님.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아니야, 이 사람아! 그대가 지은 이 화엄일승법계도야말로 광활하고 웅대한 화엄교리를 간결하면서도 일체를 망라했으니 이는 곧 화엄도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입문임과 동시에 결문을 이룬 것이라 할 것이야.”
“스님, 참으로 지나치신 칭찬이시옵니다.”
“내 이제 종남산 지상사에 머문 도리를 마쳤다 할 것이니 그대가 내 짐을 벗겨 주었네.”
의상스님은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게된 연유를 이렇게 밝혀놓고 있다.
”무릇 오성인(悟性人)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일정한 처방이 없고 병에 따라 약을 쓰는 응기 수병하는 것이 동일하지 아니하다.
따라서 미혹한 사람은 남기신 말씀을 기록한 글자에만 치우치다보니, 알아야할 근본을 잃고 만다.
그리하여 화엄교학의 이치와 가르침에 근거하여 짧은 곡선으로된 시를 지어 이름에만 집착하고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이름 없는 참다운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련다.
이 시를 읽는 법은 가운데 있는 법(法)자로 시작하여 굴곡을 돌아가며 나중에는 부처 불(佛)자로 끝나게 된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아니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화엄일승법계도의 지은이 이름을 기록하지 아니한다.“
이 유명한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가 완성된 날은 서기 668년 7월 보름이었다고 옛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석 달후인 시월 열아흐렛 날 지엄화상은 문득 제자들을 한자리 불러 앉혔다.
“다들 들어라.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고 가없는 시간이 한 생각이 니라.
이 소식을 알거든 일러 보아라.”
의상스님이 대답했다.
“••••••예, 연기법은 자성이 없사옵기에 작은 것이 작은 데 머물지 아니하고, 긴 것도 긴 데에 머물지 않사옵니다.“
”그래, 그래. 그렇고 말고••••••.
나는 이제 잠시 극락정토에 왕생했다가 다음에 연화장 세계에 유희할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따르라.“
”하오시면 스님께서는 법을 누구에게 부촉(付囑)하시렵니까?“
중국승려가 물었다.
”중국의 화엄은 법장에게 맡길 것이요, 해동국 화엄은 의상에게 맡긴다.“
”스님ㅡ. 스님, 스니임ㅡ.“
중국 불교 화엄종의 두번째 조상으로 추앙받던 지엄화상이 반야 원이라는 암자에서 열반에 들었으니, 이때가 서기로는 668년 시월 스무아흐렛 날의 일이었다.
의상스님을 비롯해서 중국 승려인 도성, 회제, 박진, 법장등 지엄 화상의 수많은 제자들이 지극정성으로 다비를 모시고 스승의 영골을 모아 탑비를 세워 그 안에 잘 모셨다.
‘고승열전 의상대사 마음을 비우시게 온갖 근심 사라지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