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통의 편지 / 신현식
내가 이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밉기까지 했다. 귀대하는 아들을 보낸 후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아들의 눈망울이 차창에 어른거렸다.
아들은 해병대에 지원했었다. 고생할 거라며 말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들은 칠 대 일의 관문을 뚫고 해병대에 가게 되었다며 오히려 좋아했었다.
훈련소에 입소한 아들이 집으로 온 것은 석 달간의 훈련과 교육을 마치고 하룻밤의 외출을 온 날이었다. 아들은 훈련 받았던 온갖 해괴한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었다. 교육을 받을 때에도 타군 이백 명을 저희들 열 명이 휘어잡았다는 이야기도 했었다. 씩씩한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아들은 배치 받은 최전방 부대로 다음 날 떠나갔다. 아들이 호락호락하지도 않거니와 지옥 훈련도 견뎠으니 별 어려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전방 부대로 간 지 열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는 아들이었다. 순간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밖 식당에서 회식하던 중에 몰래 전화를 한다고 했다. 무슨 일이기에 먹지도 않고 몰래 전화를 한단 말인가. 아들은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듯 말했다.
“아버지, 제발 다른 부대로 전출 좀 시켜주세요.”
의외의 말에 깜작 놀랐다. 졸병 시절은 다 그러니 견디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아들은 심각하게 말했다.
“아버지, 다른 부대로 가지 않으면 나 어떻게 될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말로만 듣던 군인들의 사고가 바로 내 일이 되었다. 어찌 이런 일이, 입이 순식간에 바싹 타 들어갔다.
아들에게 닥친 이 난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을 했다. 최선의 방법은 아들을 일단 안심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오냐, 내가 알아볼께. 아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나 시간이 걸릴테니 조금만 참아라.”
그렇게 달랜 후 전화를 끊었다.
아내와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손이 닿을 만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위로할 뿐이었다. 머릿속은 하얗게 바래어져 갔다. 모든 일상이 정지되고 밥도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며칠 후 다시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들은 전보다 상세한 이야기를 했다. 같이 배치 받아 간 동료가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가혹행위를 고발해 버렸다. 그 고발로 같은 내무반의 상병 셋과 일병 하나가 영창을 갔고 동료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다고 했다. 선임들은 자기 동료를 영창으로 보낸 졸병과 같이 배치 받아온, 거기다 성씨까지 같은 아들을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너희 기수는 훈련을 그렇게 받았나?”, “너희 성씨 가진 놈은 다 그러냐?”, “어디 고발할 테면 한번 해 봐라!” 가혹 행위는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몇 날 며칠 잠을 재우지 않는 것과 영하 이십 도나 되는 밤에 마르지 않은 축축한 내의를 입혀 보초를 서게 하는 것은 차라리 지옥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아들의 처지가 이해되었다. 기가 막혔다. 그러나 벗어날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얼마 있지 않으면 사 박 오 일의 휴가를 온다는 것이다. 나는 옳다구나 했다.
“힘을 쓰고 있으니 그때까지 참아 보아라.” 그렇게 달 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더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고 드디어 아들이 휴가를 왔다.
씩씩하던 모습은 간곳없고 기가 다 빠져 있었다. 완전 넋이 나간 아이였다. 아들로부터 사연을 들었다. 가혹 행위는 듣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쳐졌다. 안정을 시키고 푹 쉬게 했다. 아들도 악몽에서 벗어난 듯했다. 다음 날부터 친구들을 만나느라 아들은 고통을 잠시 잊은 듯 했다. 나는 내심 잘되어 간다 싶었다. 그런데 부대에 돌아갈 날이 다가오자 아들의 얼굴에는 차츰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른 부대로 옮기는 일을 자꾸만 물었다. 나는 잘되어 간다고 거짓말만 했다. 석 달 후면 정식 휴가를 나온다고 하니 그때까지만 견디라고 했다. 아들은 펄쩍 뛰었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고 했다. 그렇다면 한 달 안에 결과를 가지고 면회를 가겠다고 했다. 해병대는 면회도 타 군과 달리 엄격했다. 면회가 허용되는 날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다고 하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지구가 반 동강이 나더라도 그날은 결과를 가지고 면회를 가겠다고 했다.
휴가가 끝나고 부대에 복귀하는 날이 되었다. 개찰구로 들어가는 아들의 눈동자는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눈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했다.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는가.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는 부모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돈이든 백이든 있다면 무엇이든 다 동원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돈도 없고 백도 없다.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알량한 능력이란 글을 조금 긁적이는 것 밖에 더 있는가. 그 순간, 편지를 한번 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장에게, 사단장에게, 아니면 국방장관에게 그래도 안되면 대통령에게라도 편지를 써서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해 보자. 그러나 그보다 먼저 편지를 보낼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아들에게 용기를 가지라는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한 통의 편지를 아들에게 보내자. 편지를 읽는 순간이나마 고통을 잊을 것이고 용기를 찾게 된다면 성공이 아니겠는가.
아들을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에 차를 세웠다. 편지지와 봉투, 그리고 우표 서른 장을 한꺼번에 샀다.
사무실에 뛰어 들어온 나는 미친 듯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용기를 가지라는 내용으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곧바로 부쳤다. 아들은 사흘 후부터 매일 한 통씩의 편지를 받을 것이다. 편지를 읽는 동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용기를 가질 것이다. 편지를 부치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다음 날도 편지를 써서 부쳤다. 그날로부터 편지 쓰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매일 다른 내용으로 편지를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스물세 통의 편지를 쓰고 나니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흘 후에는 아들을 직접 만나니 편지는 없어도 되었다.
사흘 후, 아내와 함께 아들을 면회하러 나섰다. 비행기와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어렵사리 부대를 찾아 면회를 신청했다. 아들이 나올 때까지 위병들에게 아들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아들은 매일 한 통의 편지를 받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고 군 생활도 잘 한다고 했다. 한참 후에야 나온 아들은 예상외로 씩씩한 모습이었다. 멀리서 면회를 왔다고 외박을 허락받았다고 했다. 바닷가와 온천을 돌며 맛난 음식도 먹고 그 동안의 피로를 풀게 했다. 그날 잠자리에서 아들에게 넌지시 물었다.
“다른 곳으로 전출을 보내 줄까?”
내 말에 아들은 펄쩍 뛰었다.
“아버지 큰일 납니다. 다른 곳에 가면 졸병 생활 다시 해야합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마세요.”
스물세 통의 편지의 힘인지도 모르지만 아들은 이미 난관을 다 돌파해 있었다.
아들에게 그동안의 고생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살아가노라면 그보다 더한 고난과 맞닥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고생스러웠던 그때를 생각하면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