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처음으로 방송대 교재 한 권을 샀다. '옛 수필의 세계'가 무척 재미있는 것 같아 구입한 것이다. 일부 읽어 보니 옛 선인들의 깊은 정신세계에 무척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어제는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이 쓴 '도산잡영 병기'라는 글을 읽었다. 이황이 환로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자신의 심성을 수양하고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서원이 도산서원이다. 이 서원이 세워진 곳의 풍경과 건물들의 용처와 이름들이 나온다. 글을 읽으니 은퇴 후에 삶이 여유롭다면 도산서원처럼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집을 짓고 세상과 교류하되 세상사에 얽매임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치솟았다. 1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현업에 있을 때, 안동에 출장을 간 김에 도산서원을 들렀던 일이 있었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그곳을 다녀 온 후 글을 한 편 남겼다. 오늘 그 글의 내용을 살펴보니 현재 나의 생각과는 매우 달랐다. 당시 유학에 매우 비판적인 나의 시각이 글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었다. 아래의 글은 2015년 12월에 '도산서원을 들르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지난 화요일 문상 갈 일이 생겨 안동을 다녀왔다. 서해대교 통제 탓인지 고속도로가 몹시 복잡했다. 대략 4시간 정도 달려 잠깐의 문상을 마치자 말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도산서원을 찾아나섰다. 성소병원에서 조회를 해보니 대략 20km 남짓이라 용기를 냈다. 과거 안동을 몇 번 간 일이 있었지만 시간에 쫓겨 하회마을, 병산서원 정도였다.
구불구불 난 길을 따라 찾아가니 도산서원이 나타난다. 주차요금이 이천원, 도산서원 입장료가 1500원, 봄이나 여름, 가을이었다면 안동호를 타고 들어가는 도로가 참 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 초입이라 한산했다.
대만에서 관광을 왔다는 할머니들에게 사진 한 컷을 부탁했다. 유교가 중국에서 전래되었으니 아마 그들 마음 속에 문화적 우월감이 작용했으리라는 생각도 얼핏 들어 말을 붙여보고자 했으나 짧은 영어 실력이라 포기하고 말았다.
퇴계 이황이 지었다는 도산 서원, 그리고 유물 전시관에 들어가 퇴계 이황의 사적을 살펴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초기에는 처세를 위한 도덕적 가르침에서 당, 송대를 거치면서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논제가 덧붙여져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고 종교의 위치까지 오른 유학. 퇴계 이황의 사단칠정론은 아마도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한 치열한 논쟁의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주자학(성리학)이 고려 중기에 중국에서 넘어와 불교를 토대로 한 부패한 고려 귀족 사회를 붕괴시키고 조선의 통치 이념이 되어 이조사회를 500년이나 지탱하는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여있으면 썩는 게 자연의 이치일까? 어떤 사상이든, 종교든 간에 기득권에 안주하여 절대화되면 사회 발전에 커다란 암적 존재가 되어 그 사회의 많은 구성원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주는 암적 존재가 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인가 보다.
조선 사회의 통치 기반이 된, 도덕에 바탕을 둔 성리학은 지나친 공리공론과 형식적 도덕주의의 폐단은 뒤로 하더라도 강고한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만들어냈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여성에 대한 심한 차별을 만들어 이조 사회를 우리 역사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사회로 만들었다. 실질이나 실용보다는 명분에 집착한 공리공론의 도덕주의와 형식주의, 그리고 강고한 신분질서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로 전락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구나 이 성리학을 배우고 가르쳤던 양반 계급은 국가로부터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그 의무는 다 하지 않아 조선 중기에는 국가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수난을 당했고 이조 말에는 발전된 서구 문물을 배척하여 근대화에 실패했다. 또한 유교적 사대의식은 동학운동 때 외세를 불러들여 식민 지배의 단초를 제공했다. 가난, 식민지배, 그리고 남북분단의 비극의 뿌리가 어쩌면 이 성리학에 기반한 통치체계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아이쿠, 이러다 저녁 퇴근길에 집으로 가는 도로가 막힐 것을 우려해 나는 그곳을 황망하게 나섰다.
* (이 글은 10여 년 전 안동에 문상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도산서원을 구경하러 갔다가 쓴 글이다. 이제 다시 살펴보니 이황 선생의 작품이나 글을 보고 감상문을 쓴 게 아니라 성리학을 격하게 비판하는 글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남긴 공리공론의 유산으로 내가 처절한 가난을 겪었고, 또 우리나라가 겪었던 약소국의 비애가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위 사진은 안동호이다. <도산잡영 병기 >에서 묘사한 도산의 형세가 일부 사진에 나타나 있다.
첫댓글 도산서원을 다녀와서 쓴 글을 읽었습니다.
저도 2024년 4월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광명실 (서고) 설명을 들으면서 신기해 했었는데요, 동광명실과 서광명실 두군데로 나뉘어져 있었고 광명이란 말이 책을 읽으면 눈이 번쩍 뜨인다는 말인가. 라며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표님의 젊은 날의 모습이 멋지시네요.
역시 미남은 세월이 가도 미남...ㅎ
좋은 글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모처럼 들어와서 보니 혜윰꼴이 정겹습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글로 만나니 무척 반갑습니다. 그 당시 들렀을 때는 해설사가 안 보였어요. 그래서 제대로 설명을 못 들은 것이 아쉬웠어요. 국문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을 접하면서 그분들이 추구했던 정신셰계나 이상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지요. 어쩌면 학문을 좋아하고 무척 배우려고 노력한 그분들의 DNA와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가난과 문맹을 떨치고 빠르게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피식민지였다는 열등감과 가난이라는 유산을 남긴 유학이 무척 싫었죠.
구영명 선배님의 도산서원 기행문 잘 읽었습니다. 글솜씨가 보통이 아니셔서 수필에 응모하면 대상감입니다. 선배님이 쓰시는 글을 읽어보면 글을 깔금하고 정확한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느낀점을, 읽는 사람의 눈앞에 그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사실적으로 본인의 느낌을 정확하게 써서 감동을 주는 글이었습니다. 선배님이 쓰시는 글은 어느 교수님 못지 않게 훌륭하십니다. 그럼에도 항상 겸손하며 앞에 나서지 않는 점이 더욱 품격이 있어 보였습니다.
저는 도산서원에 한번도 못 가봤지만 구영명 선배님이 쓰신 글만 보고도 그곳을 다녀온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어의 달인이신 선배님! 모르는 것 없이 국문학과의 모든것을 를 꿰뚫고 계시는 명석한 두뇌를 존경합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국문학과의 깃발처럼 늘 빛나시길 바랍니다. 양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멋지십니다. ^^
졸필을 두고 너무 칭찬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ㅎㅎ. 감사합니다. 힘든 과정도 거의 끝나가고 있군요. 이제 마지막 한 학기만 지나면 졸업과 해방이라는 기쁨을 맛보겠죠. 상희 학우님의 학업을 응원합니다.
네, 선배님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