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집단( 김소원)
지병으로 인해 삶을 마무리하게 된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에게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아내와 자식도 없었고 친인척도 전혀 없었다. 자신의 사후 처리에 관해 생각하던 남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를 변호사에게 맡기고 사망했다.
변호사는 남자의 친구들에게 부고를 보내고 새벽 일찍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수십 명의 친구들이 남자의 부고를 받았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는 단 4명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죽은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귀찮았고, 게다가 눈치 볼 가족 없이 홀로 살다 죽었으니 다들 안가도 되는 장례식이라 여긴 것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변호사는 4명의 친구 앞에서 남자가 남긴 유언장을 꺼내 읽었다. '나의 전 재산은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가끔씩 좋은 글과 예화를 보내주는 ‘따뜻한 하루’에서 얼마 전에 보내준 이야기다. 이 글을 읽고 글 속의 남자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직계 가족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언젠가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학자들에 의하면 보통의 한 사람은 평생 150명 정도의 사람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들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나도 아무런 부담 없이 커피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다. 그리고 이 150명 안에 ‘공감집단’이라는 또 다른 집단이 있는데 이 집단의 숫자는 대략 10명~15명 정도이다. 이 공감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슴 깊이 슬퍼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들이다.
공감집단에 속하는 사람을 우리가 소위 ‘친구’ 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 때 과연 나의 죽음을 슬퍼하며 장례식에 참석할 친구가 10명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가도 사람의 마음은 모르는 것이라 내가 죽고 난 후 나는 친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냥 지인이었을지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긴 내 죽고 나면 누가 장례식에 오고 안 오고가 뭐가 중요한 일일 것인가.
평안할 때에는 사람을 잘 알 수 없다. 삶에 고난이 오거나 어려움이 닥치거나 혹은 상대방이 부러워할 만한 삶의 변화가 생겼을 때 돌아오는 친구의 반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얼마 전 내가 아는 한 지인이 첫사랑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 그 첫사랑은 사업에 성공한 사람으로 지인은 주변인들의 부러움을 한 눈에 샀다. 그런데 그 사실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을 때 친구의 반응은 ‘축하한다’가 아니라 ‘또 결혼을 하냐?’는 비아냥이었단다. 친구가 좋은 사람 만나 행복을 찾았다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여자의 시기심은 오랜 친구를 잃게 했다.
내가 아는 바로는 여자들의 시기심은 친구, 동료, 가족 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나이 불문, 대상 불문의 감정으로 안다.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시기심을 억누르고라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이 친구 아닌가.
나는 그 일로 지인이 친구를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누가 나와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친구가 행복해지고 잘되면 기뻐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기심에 눈이 멀어 말과 눈빛이 곱게 나가지 않는 심보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도 자신의 공감집단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혹 몇몇이 공감집단 안에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 진정한 친구가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하버드대학 의과대학 정신과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하는지 알기 위해 75년간 남성 724명의 인생을 추적해 연구해 왔다. 연구 결과 행복은 부(富)나 성공, 명예, 혹은 열심히 노력하는 데 있지 않았고 바로 '좋은 인간관계' 즉, 건강한 공감집단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친구의 태도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원만한 공감집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첫댓글 건강한 진실한 공감집단, 쉽지않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