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장례를 다 마치고 난 지엄화상의 제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종남산 지상사 화엄종의 후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소승 도성이 감히 여러 사형, 사제님들께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지요.”
“스승의 제자된 저희들은 마땅히 스승의 유훈을 받들고 따르는 것이 도리인 줄로 아옵니다.”
“그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감히 소승 도성이 말씀드리거니와 저희 스승께서는 오직 해동국 신라에서 오신 의상스님의 법력을 인가하신 줄로 아옵니다.”
“아, 아닙니다. 지엄화상께서는 소승의 법력을 인가하신 것이 아니셨고••••••.”
그러나 중국승 도성이 의상스님의 말을 막았다.
“겸손의 말씀은 삼가해 주십시오. 저희 스승께서는 분명 의상스님이 지으신 화엄일승법계도를 점검하시고 확연히 인가하신 후에 옳을 의자, 지닐 지자, 의지(義持)라는 법호까지 내리신 줄로 아옵니다.“
”물론, 스승께서 소승에게 의지라는 법호를 내려 주신 것은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허나 소승에게만 법호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라 여기 앉아 있는 이 법장스님에게도 글월 문자, 지닐 지자, 문지(文持)라는 법호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자 법장이 말했다.
”예, 하오시면 소승 법장도 감히 한 말씀 올리고자 하오니 여러사형들께서는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 하시게.”
“감사하옵니다. 방금 의상스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스승께 옵서 소승에게 문지라는 법호를 내려 주신 것은 사실이옵니다마는••••••.”
법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상스님이 서둘러 말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승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해동의 화엄은 의상에게 맡기고, 중국의 화엄은 법장에게 맡긴다.’ 그러니, 이 종남산 지상사의 화엄가문은 마땅히 법장이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 아니옵니다. 스승께서는 덧붙여 소승에게 이르시기를 ‘법장이 너는 아직 나이도 어리려니와 법 또한 덜 익었으니 의상을 마땅히 스승으로 삼으라’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법장의 말에 주위는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도성이 죽비로 딱!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 자, 의상스님의 말씀도 잘 들었고, 법장의 말도 잘 들었으니 이제 우리들의 뜻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소승 의상이 잠시 한 말씀만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지요.“
”여러 사형님, 사제님들이 잘 아시다시피 소승은 이 나라 중국 태생이 아니오라 바다 건너 해동국 신라에서 온 신라 백성입니다. 그런데 감히 어찌 중국의 화엄종의 가문을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법장이 다시 한마디 했다.
”아니옵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불가에서는 국경의 차별, 빈부귀천의 차별, 학식의 차별도 없다 하셨거니와 달마선사 께서도 서역국의 왕자이셨지만 우리 중국으로 오셔서 선 종의 첫조상이 되셨습니다.“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소승 의상은 마땅히 지엄스님의 분부를 받들어 해동국 신라로 돌아가 그 땅에 화엄의 도리를 전하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니 그리 알아주십시오.“
다시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도성이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자, 자, 그러시면 이렇게 하도록 하십시다. 스승께서 분부하신대로 해동의 화엄은 의상스님이 맡으시고 우리 중국의 화엄은 장차 법장이 맡도록 할 것이로되, 법장의 학문이 깊어지고 법력이 익을 때까지 의상스님이 전심전력 지도하여 주시기를 부탁하십시다.“
”과연 좋은 방안이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다.“
모두들 이구동성 그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의상스님은 이때부터 지상사 대중들로부터 대사님으로 추앙받으며 화엄의 도리를 후학들에게 펼치게 되었다.
하루는 법장이 의상대사를 찾았다.
”소승 법장, 의상대사님께 간청드리올 일이 있사오니 허락하여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시던가?“
”아무쪼록 대사님께서는 이 지상사에 오래 머물러 계시면서 소승의 법력을 키워주십시오.“
”이것 보시게, 법장.“
”예, 대사님.“
”나는 지엄스님의 3년 시묘가 끝나면 마땅히 신라로 돌아가야 할 것이야.“
”하오시면 앞으로 3년만 더 머무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해동국 신라에 반드시 화엄의 뿌리를 내리라는 스님의 분부가 계셨으니 나는 3년 후에는 돌아갈 것이야. 그러니 그대는 그 안에 화엄의 도리를 깨달아 마쳐야 할 것이야.“
”예, 대사님. 명심하여 열심히 참구하겠습니다.“
의상대사는 중국 불교 화엄종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종남 산 지상사에서 지엄화상이 떠난 자리를 지키며 화엄경의 진리를 기라성같은 중국 승려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법장이 물었다.
”대사님, 화엄경의 도리를 한 말씀으로 이르신다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나는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네.“
”이름에 집착한다 하시면••••••?“
”물과 바람, 나무와 풀을 고립된 것으로 차별하면 이것은 망상인게야.“
”홀로 있는 것으로 구별하고 차별하면 망상이라는 말씀이시옵니까?“
”산천초목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저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것이 있어야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어야 이것이 있으니••••••.
일중일체 다중일이요, 일즉일체 다즉일이야.“
”일중일체 다중일이요, 일즉일체 다즉일이라 하시면••••••?“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 있으니,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말이지.“
”••••••소승은 아직 법눈이 밝지 못한지라 무슨 말씀이신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는 한나절동안 숨을 쉬지 아니하고 살 수 있겠는가?“
”아, 아니옵니다. 한나절은 커녕 잠시도 숨을 쉬지 아니하고는 살 수가 없사읍니다.“
”허면 그대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살 수가 있겠는가?“
”살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열흘이고 한 달이고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살 수가 있겠는가?“
”살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허면 그대는 일 년이고 이 년이고 햇빛을 구경하지 아니하고 살 수가 있겠는가?“
“살 수가 없겠습니다.”
“숨 쉬지 아니하면 살 수 없고, 먹지 아니하면 살 수 없고, 마시지 아니하면 살 수 없고, 그러면 대체 그대는 무슨 덕택으로 살고 있는고?”
“••••••바람을 숨쉬니 바람의 덕이요, 음식을 먹으니 음식의 덕이요••••••.”
“음식은 어디 한 가지던가?”
“아, 아니옵니다. 수십 가지, 아니 수백 가지에 이를 것이옵니다.“
”곡식들의 덕택, 채소들의 덕택, 그걸 낱낱이 다 헤아리자면 어느 것 하나도 관련되지 아니 하는 게 없어.“
”••••••과연 그런 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대사님.”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저 홀로 똑똑해서 서 있는 게 아니니, 어느 것 하나도 구별하고 차별하고 소홀히 해서는 아니되는 법이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온 우주만물이 다 평등하고 소중하고 값지 다고 하신 게야.”
“비유를 들어 더 자세히 일러 주십시오, 대사님.”
“허면 내가 그대에게 물을 것이야.”
“예, 대사님.”
의상대사는 찻잔을 들어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찻잔을 탁자에 천천히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찻잔은 내가 만들었던가?”
“아, 아니옵니다.”
“허면 이 찻잔은 찻잔이 되기 전에는 본래 무엇이었던고?”
“••••••이•••••• 찻잔은 본래는 흙이었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그 흙을 어떤 사람이 파내어 물을 부어 빚어서 모양을 만든 다음에 어떻게 했던고?”
“예, 그릇 굽는 가마에 넣고 불을 지펴 구웠을 것이옵니다.”
“그전에 유약을 발랐을 것이야.”
“예, 그랬을 것이옵니다.”
“이 찻잔 하나도 저 혼자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흙과 물과 틀과 유약, 거기에 불을 지필 나무와 사람의 손과 발과 지혜와 땀이 어우러져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야.”
“그, 그렇사옵니다.”
“흙을 따로 떼어내면 과연 이 찻잔이 있겠는가?”
“••••••없을 것이옵니다.”
“유약을 빼고나면 이 찻잔이 이루어졌겠는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물이 없이 이 찻잔이 빚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빚어질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사람의 손과 발과 모양을 만들어내는 지혜가 없었더라면 과연이 찻잔은 빚어질 수 있었겠는가?”
“빚어지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여기 놓인 이 찻잔 하나도 그러하거늘 다른 것은 일러 무엇하겠는가?”
“하오시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연관되어 얽혀 있다는 그런 말씀이시온지요?
”흙을 빼고 나면 찻잔이 없고, 물을 빼고 나면 찻잔 또한 없네.
모양도 없고 유약도 없고
나무도 없고 불도 없으면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찻잔을 빚을꼬.
한 잔의 작설차 마시면서도
흙의 고마움을 잊지 마시게.
이름 모를 도공도 잊지 마시게.
물도 고맙고, 불도 고맙고,
한 포기 차나무도 고맙기 그지 없네.
그대는 이제 아시겠는가
부처님이 이르신 화엄법문을.“
의상대사가 이렇게 시를 지어 읊자, 법장은 두 눈을 반짝이며 감격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사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고승열전 의상대사 마음을 비우시게 온갖 근심 사라지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