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술 / 신현식
잔에 가득한 술을 단숨에 들이킨다. 산 정상에서 마시는 이 술맛을 어찌 양귀비를 품는 것에 비견하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짜릿함과 시원함은 열락의 바다다. 힘들게 산을 오르는 까닭은 바로 이 맛 때문이다. 이 순간을 위해 막걸리를 냉동실에 열려서 온다. 어지간히 술을 좋아하지 않고서야 이러겠는가.
문단에 이름을 올렸던 여름이었다. 신인상 당선소감을 들고 집지사로 갔다. 사무실에는 마침 원로 시인 두 분이 계셨다. 축하를 받으며 그 분들이 학교 선배임을 알게 되었다. 대단한 공통분모를 찾아낸 양 부근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분들의 주법은 잔을 함께 들어 단숨에 마시는 것이었다. 고분고분 그분들의 주법에 따라 마셨고, 밤은 깊어만 갔다. 주인이 폐점을 알렸지만 그분들은 일어설 기미가 없었다. 단골손님에 대한 배려인지 주인은 옥상으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비치파라솔 아래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르익었다. 선배가 목청껏 부르는 가곡을 질세라 따라 불렀다. ‘성불사의 밤’에서 ‘푸치니’의 ‘별은 빛나건만’까지 불렀으니…….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술에 취할 겨를이 없었다. 술값을 치루기 위해 빈병을 세지 않아도 되었다. 주인은 아예 맥주 세 박스를 올려다 놓고 퇴근해 버렸기 때문이다. 만취한 두 분을 배웅한 것이 새벽 네 시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분들은 이곳 문단의 주성들이었다. 그때가 술을 가장 많이 마셨던 때였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녔으니 40때쯤 되었으리라. 이사를 하고 보니 동창들이 빤히 보이는 대각선상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이 두 친구가 주당들이었다. 철의 삼각지대라더니 주당 삼각지대가 생겨났다. 저녁마다 셋이서 만났다. 술집으로 퇴근을 하거나 밤이 이슥하면 집을 빠져나와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마신 술을 세어 무엇하랴.
여름휴가를 그들과 같이 갔었다. 가는 길에 아내들이 장을 보아왔다. 그런데 소주는 달랑 세 병뿐이었다. 세 사람 모두 혀를 찼다. 친구가 됫병 세 병을 다시 사 오자 아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휴가 간 야영지의 강 가운데에는 펑퍼짐한 돌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위해 퍼 놓은 주안상 같았다. 그곳에 버너를 올려놓고 삼겹살을 구웠다. 물속에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됫병 세 병을 마시고도 모자라 읍내까지 술을 사러 가야만 했었다.
싱싱하던 20대에는 오히려 술을 마시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구박을 받았다. 한 친구가 ‘술도 못 먹는 배냇병신’이라 빈정거렸다. 오기가 발동했다. 술이 세면 얼마나 센지 한번 겨뤄보자 달려들었다. 친구는 냉소를 지으며 날을 잡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마치 서부영화 「하이 눈」처럼 정오에 동촌 유원지의 술집에서 만났다. 막걸리 한 말(斗과) 대접 하나만 방에 들였다. 두 사람은 한 잔씩 돌려가며 마시기 시작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한 말들이 통을 다 비웠으나 서창(西窓)만 붉게 물들 뿐이었다. 친구가 어떻게든 승부를 내자 하기에, ‘좋을 대로!’라며 맞장구를 쳤다.
친구는 귀갓길에 늘어선 술집마다 들러 대포를 한 잔씩 비우는 것으로 결투를 끝내자고 했다. 그때는 선술집이 한 집 건너 한 집이었다. 동쪽 끝에서 시작한 결투가 도심에 닿으니 통금 사이렌이 울었다. 얼마나 마셨을까? 둘 다 비틀거리기는 했으나 한 번도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 후, 그 친구는 일체 술로 시비를 걸지 않았다. 술은 남들보다 좀 많이 마신 것 같다. 그런데 얼마 뒤 정신과 의사의 TV 대담을 보다 깜짝 놀랐다. 이처럼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자신이 ‘술이 세다’는 자기최면(自己催眠)에 걸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껏 마신 술이 죄다 최면에 걸려 마신 거란 말인가. 황당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다 마셔버린 술을. 그런데 최면도 이재(理財)나 양명(揚名)이 아니고 왜 하필이면 술이란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최면의 시발은 그 친구와의 술내기인 것 같다. 배냇병신이든 아니든 화를 꾹 눌러 삭이든지, 못 이기는척 져 주었으면 이렇게 답답한 몸매는 되지 않았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요즘은 많이 마시지 못한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고 안주가 좋아도 적정선을 넘기지 않는다. 산에 와서도 이렇게 막걸리 한 병만 비우고 간다.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것만도 어딘가. 이것도 ‘술에 약하다’라고 자꾸만 최면을 걸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요즘은 약해졌다.
첫댓글 그런 낭만적인 젊을 때가 있었다니
참 재미있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부디 건강 조심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