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터에서 / 신현식
강물이 여울져 흐른다. 물을 만나자 동행한 친구가 승용차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낚싯대를 꺼낸다. 낚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친구가 그냥 지나치겠는가.
동기 중 한 친구가 전원주택을 장만했다하여 둘러보러 가는 길이다. 마침 그 집은 작은 강이 흐르고 있는 풍광이 멋스러운 강변이다. 집 구경은 뒷전이고 친구들은 우르르 낚싯대부터 펼친다.
젊었을 적에는 나도 낚시를 다녔다. 하지만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중년엔 낚시를 거의 잊고 지냈다. 그런데 낚시를 다시 하게 된 것은 대구 근교에 농장을 장만한 다음부터였다. 농장 바로 옆이 저수지였기 때문이다. 연(蓮)이 많은 저수지는 멋진 낚시터였다. 그렇다고 가자마자 낚싯대를 드리우지는 않았다. 낚시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농장 관리인의 끊임없는 권유 때문이었다.
농장에는 관리인을 두고 있었다. 그 관리인은 낚시광으로 마누라 속을 꽤나 썩이는 사람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보수도 얼마 되지 않는 내 농장에 눌러 있겠다고 했다.
한두 달이 지나자 관리인은 저수지의 연을 쳐내어 작은 구멍을 내어 놓았다. 그런 곳에서의 낚시를 ‘구멍치기’라며 내게 낚시를 권했다. 어차피 농장에 가는 길에 잠시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작은 낚싯대를 하나 장만했다.
노랗게 익은 살구가 뚝뚝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에서 연꽃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낚시용 의자에 깊숙이 파묻혀 저수지 건너의 초록 들판을, 우뚝 솟은 팔공산을 바라보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다. 그러나 무릉도원도 고기가 잡히지 않자 시들해졌다.
그러자 관리인이 낚시의 요령을 일러 주었다. 그 후로는 살구만한 붕어를 낚았고, 채비를 중층낚시로 바꾸었다. 중층낚시는 채비와 찌의 부력이 딱 맞아떨어지도록 하여 고기가 조금만 건드려도 찌가 움찔거렸다. 고기와 보이지 않는 승강이를 벌이며 스릴을 만끽했다. 낚싯대도 고급으로 바꾸고 주말마다 농장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대물을 노리게 되었다. 큰 고기는 밤에 만난다고 관리인이 귀뜸했다. 농장에는 전원주택이 있어서 밤 낚시에 더 없이 좋았다. 밤낚시로 아이의 손바닥만 한 붕어가 솔솔 잡혔다. 고기 잡는 재미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 끓여 먹는 라면과 커피 맛에 깊이 빠져 들었다.
낚시에 재미를 붙이자 민물 새우를 미끼로 쓰면 대물이 온다고 관리인이 꼬드겼다. 과연 미끼를 새우로 바꾸자 준척들이 걸려들었다. 나는 일주일 내내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 밤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살구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찌의 발광체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낚싯대를 펴놓고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슬슬 어신이 오기 시작했다. 찌의 불빛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던 찌가 갑자기 물 위로 불쑥 솟구치더니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낚싯대를 잡아챴다. 손에 묵직한 떨림이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낚싯줄은 팽팽하다 못해 가야금 소리가 났다. 틀림없는 월척이었다. 수상스키를 타듯 한참동안 고기와 씨름을 해야 했다. 건져낸 붕어의 비늘은 금빛으로 번쩍였다. 어찌나 예쁘던지 입을 맞추었다. 미끼를 달아서 던지면 물고, 던지면 물었다. 낚이는 것은 모두 월척이었다. 불과 한 두 시간 만에 이십여 수를 낚았으니 쉴 틈이 없었다.
그런 조과(釣果)가 있은 것은 다 관리인 덕분이다. 관리인은 고기를 유인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꾸몄다. 오전에는 황토 흙을, 오후에는 밑밥을 낚시터 구멍에다 뿌려 두었다.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나도 그와 진배없었다.
밤낚시를 더 즐기기 위해 찌를 개조 하였다. 고기가 미끼를 물면 찌가 물 위로 솟구친다. 이때 물속에 있던 발광체가 물 위로 올라오니 캄캄하던 주위가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것은 마치 불꽃놀이를 하는 듯했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더 즐기고 싶었다. 시중의 찌톱은 발광체 하나 밖에 넣지 못한다. 나는 찌톱에 두 개가 들어가도록 개조를 하였다. 그래서 고기가 물면 올라오는 찌가 동해 바다의 일출을 보는 듯했다.
어느덧 낚싯대도, 찌도 최고급 카본으로 바꾸었다. 그런 낚시는 계속 되었고 머리속에는 솟구치는 발광체의 불빛과 가야금 소리와 퍼덕이는 월척의 붕어 밖에 없었다. 겨울이면 내내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해 봄이었다. 명당이 있다는 지인의 말에 솔깃하여 따라나섰다. 먼 길을 달려 가시덤불을 헤치며 저수지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월척이 몇 수 올라왔다. 일행들은 생애 최고의 조과라며 난리법석이었지만 나는 시들했다. 내가 만났던 붕어들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후, 여러 명당을 가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연꽃들이 수를 놓고, 노란 살구가 뚝뚝 떨어지며, 팔뚝만한 붕어가 금빛 비늘을 번쩍이며 올라오는 곳은 내 전용 낚시터밖에 없었다.
그러자 열락(悅樂)의 늪에 빠져있는 내가 보였다. 섬뜩한 생각에 낚싯대를 잡는 것이 주저되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얼마지 않아 농장 옆의 저수지마저 메워져 버렸고, 차츰 낚시와 멀어졌다.
친구들은 집 구경이고 뭐고 낚싯대를 하나씩 나누어 펴놓고 앉는다. 하지만 나는 그저 멀거니 서서 구경만 한다. 낚싯대를 섣불리 잡지 않는 것은 월척을 이십여 수나 낚았던 그 때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선인들 말씀에 “하지 말아야 알 것이 소년등과(少年登科)라” 하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