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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한 강도의 죽음과 스데반의 죽음 그리고 참된 삶
은성아,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잘 믿고 있지?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함께 못 박힌 강도의 죽음과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해 보기로 하자.
강도(마 27:37-44; 눅 23:32-43)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37-44)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32-43)
스데반(행 6:3-7:60)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3-15)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4-60)
마태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양 옆에 달린 두 강도는 처음에는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욕하였다(마 27:44, 막 15:32). 그들은 행악자 즉 ‘나쁜 일을 행한 사람’ ‘범죄자’(딤후 2:9), ‘강도’라는 뜻이다. 물론 단순한 강도라기보다는 방금 전에 풀려난 바라바와 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에 대항하던 극우단체(셀롯당)의 일원이었을 수 있다(마 27:28, 막 15:27). 단순한 강도가 극형인 십자가 처형을 받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열심당원으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반란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으므로 강도라 불렸고, 결국 십자가형이란 극형까지 당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처음에 가운데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욕을 하였다. 과연 이런 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잘 소개하고 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을 제외하고 열두 사도 중에 스데반만큼 자세하게 기록한 분이 누가 있니? 그분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주님의 훌륭한 종으로 쓰임을 받고 있었다.
첫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로 임명이 되어서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구제로 인한 교회 안의 불만과 분열을 막아 주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었으니 진정한 자격을 갖춘 집사였다.
둘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
셋째는 여러 회당에서 사람들과 변론할 때에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으로 저들이 능히 당할 수가 없었다. 집사만 아니라 복음 전도자로서 훌륭하게 일하고 있었다. 이런 분이 왜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순교해야만 했단 말인가?
무엇이 강도를 변화시켰을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었다고 해야 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지만 아무런 불평이나 저주를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았을 때에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십자가가 세워졌을 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패를 보았다. 그는 관리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예수님을 다시 바라보며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어렴풋이 자기가 배웠던 구약성경도 생각하면서 정말 그가 메시야란 말인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 22:16)란 말씀이 저분에 대한 말씀이고,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라는 말씀이 저분을 가리킨 것인가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전한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고발을 당했고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는 자로 모함을 당했다. 대제사장은 이런 고발의 거짓 증언을 듣고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스데반은 심문하는 그들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다만 설교로써 대답했다. 부드럽게 시작한 그의 설교는 그들이 목이 곧은 백성, 할례를 받지 못한 백성, 성령을 거스른 백성, 의인을 잡아준 백성,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 등이라고 지적했고, 이러한 그의 외침은 저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마음에 찔림을 받은 그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 큰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스스로 깨달으면 눈물을 흘리고 밥을 안 먹고 자기를 돌아본다. 그러나 남이 지적하면 화를 내고 덤벼든다.”고 하였다. 그들은 죄를 보여준 스데반의 말을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고 돌을 던졌다.
강도는 마음에 큰 변화가 생겼다. 믿음이 생기고 회개를 보였다. 그래서 다른 강도에게 말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죄의 값을 받아야 마땅함을 인정하면서 예수님은 무죄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강도의 잘못을 꾸짖었다. 다음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이 시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멀리 도망갔다.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은 가까운 거리에서 꾸물거리고 있었고, 경건한 여인들은 멀리 서 있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군인들과 백성들은 모두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었다. 이러한 시간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강도가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이제 강도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보인 것이다. 이것이 구원을 받는 믿음을 가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스데반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들에게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행 7:55-56).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죽음 앞에 있는 스데반에게 하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고백하는데 여기에서 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가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체휼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는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외쳤고, 유대의 관원들과 백성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57-58절). 스데반은 매우 당황스러운 죽음을 죽어가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하였으며(56절),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였다(59절). 또한 그는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했다(60절).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강도에게 주신 예수님의 약속을 들어보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에게 이런 약속이 주어지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는 아침엔 마귀와 함께 식사했으나 점심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했으며, 저녁에는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식사했다. (찰스 스펄전. 『신약인물설교』.233.) 강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죽으신 후에 나라를 세우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는 큰 것을 기도하지 않고 오직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다. 강도는 살면서 세례도 받지 않았고, 성찬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교회에 등록한 일도 없지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은혜요, 선물이다.
스데반의 마지막 순간을 살펴보자.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그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서 자기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죄를 위하여 기도한 후에 마치 예수님께서 땅의 품에 안기어 잠드신 것처럼 잠들었다. 그는 부활의 날에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일어날 것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에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였기에 죽을 때에도 성령으로 충만했다. 그는 살아 있을 때에도 담대하고 평온하고 침착하였기에 돌에 맞아 죽을 때에도 그와 같았다. “자니라” 이는 얼마나 놀라운 평강과 축복과 안식의 말씀인가? 그의 이름은 “면류관”의 뜻이라고 한다. 여기서 요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우리는 모두 강도와 같이 오직 예수님을 의지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죄인들이다. 우리가 가진 것도, 행한 것도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일 뿐이다. 그리고 강도는 약속을 받은 이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이다. 우리도 구원을 받은 후에 무엇을 한 것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가 있을까? 주님 앞에서는 어떤 선한 것도 허물과 부족뿐이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십자가만 의지해야 하는 우리이지 않겠는가?
여러 가지가 필요한 시대와 장소에서 남다른 은사를 받아 봉사한 스데반을 보면서 교회를 시작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르시고 일하게 하심을 본다. 특히 그의 말씀 사역은 조금도 타협도 없이 죽음을 각오하고 본질을 밝히 드러냄으로 틀림없이 사울이라는 청년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순교는 사울이 회개하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또 한 명의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는 말씀의 주인공이다.
강도의 죽음과 구원에 대해 생각하며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3-15)
스데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며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 12:4-5)
바울 사도는 셋째 하늘 곧 낙원의 경험을 하고 살았다.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낙원의 삶을 맛보며 살고 있고, 장차 충만하고 극치에 이를 완성된 천국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부지런히 구원의 일을 하고 계심을 본다.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에도 한 명의 강도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스데반 같은 주님의 충성된 일꾼을 사용하여서 구원의 일을 계속하신다. 강도는 구원을 얻고도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낙원에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해 주셨다. 스데반은 평생 주님을 위하여 충성과 봉사를 바친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이 땅의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께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처럼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다. 얼마나 영광스런 죽음인가. 예수님과 함께한다는 것이 은혜요, 생명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죽음도 생명이다. 이 은혜는 아무리 큰 죄인도 받을 수 있고, 아무리 충성된 의인도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어야만 한다. 오직 감사로, 오직 찬송으로 받으며 경배와 영광을 돌릴 따름이다.
* 우리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강도의 죽음과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데반의 죽음과 같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