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여 사는 인류는 시대정신을 믿고 그에 따라 질서를 이루며 살아간다. 인류 최초의 시대정신은 신에 대한 이야기, 즉 신화였다. 신화는 고대 사회의 믿음과 질서, 문화적 욕구를 반영한다. 그러다 기원전 900년부터 석가나 노자, 예수 등 소위 깨달은 자들에 의해 종교가 생겨나 신화를 대체했다. 근대 이후 종교는 다시 이성과 과학에 시대정신을 내주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없어도 이성의 힘, 그리고 과학은 믿는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노동의 주체가 인간에서 로봇으로 바뀌면서 감수성을 가진 인간은 새로운 문화적 욕구를 갖게 된다. 신의 명령도, 과학(보편성)도 아닌, 자기만의 특수성을 발휘하여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미학을 “인간에게 내재된 미(美)의식을 통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학문”(Mind Navigation)이라 정의한다면, 미학과 미의식이야말로 자아실현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틴 카노이라는 학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식민지 기간 동안 지배국에 의해 주입된 교육의 영향으로 인해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예속 상태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자기 고유의 감수성을 외부의 시각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니 자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의 것은 우리 고유의 ‘문화의지’로만 이해할 수 있다. ‘문화의지’란 한 민족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꽃피우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 식물의 씨앗들은 제각각 자신의 특수한 열매를 맺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지역마다 다른 지식과 문화적 열매 역시 각각의 특수한 문화의지를 통해 해석해야 한다.
서양의 문화의지가 분화(分化)라면, 중국의 그것은 동화(同化)다. 서양은 같거나 다른 모든 것들을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때까지 꼼꼼히 분류해서 살펴본다. 서양의 이런 문화의지는 좌뇌와 이성의 발달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이분법과 우열의 구분이라는 부작용을 낳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의 동화(同化)는, 같거나 다른 것들을 느슨하지만 하나의 큰 테두리로 묶는 통합 의지를 중시한다. 이런 문화의지는 수많은 소수 민족을 한족 중심으로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일본의 문화의지는 응축(凝縮)이다. 서로 다른 것들을 혼연일체로 합치는 것이다. 이는 갈등을 회피하고, 친절을 강조하면서 조직을 중요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한국의 문화의지는 ‘접화’(接化)로 이해할 수 있다. 접화는 중국의 동화, 일본의 응축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최치원의 난랑비서문에 나온 접화라는 말은, “어울리지만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각 구성원의 대립을 인정하되, 큰 틀로 묶어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서양의 분화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가 미국의 성조기이고, 중국의 동화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가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라면, 응축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일본의 일장기다. 그리고 접화를 잘 보여주는 이미지는 우리나라의 태극기라고 볼 수 있다.
K-미학, 즉 ‘한국의 미학’이라는 개념은 원래 없었다. 1920년대 야나기라는 일본인 학자가 쓴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에세이 정도가 하나 있었고, 국내 학자들은 그 일본인의 관점에 근거해서 우리 고유의 미술을 이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야나기의 책으로는 도자기와 민화의 해석만 가능했고, 그 외 다른 한국적인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서양의 미학(美學)이 수입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감수성을 서양의 관점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국의 미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금과 같은 한류 열풍을 예측할 수 없었던 2010년 무렵이었다. 본래 서양의 현대미술을 전공했고, 현대미술을 공부하다 보니 현대철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는데, 현대철학에서 서양 예술의 종말이 느껴졌던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서양 예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 문화의 중심이 동양으로, 그리고 한국으로 건너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회사를 그만두고 5년 동안 ‘한국의 미학’에 대한 연구에 매달렸다.
내가 접화라는 문화의지로 해석한 한국의 미의식은 다음의 네 가지다. 첫째, 신명(神明)이다. 신명은 신성한 생명력을 일으켜 어려움을 이겨내고 맺힌 한과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달리 흥이 많고 춤과 노래를 좋아하며, 다른 기독교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벽기도를 다니는 것도 신명에서 우러나오는 접신(接神)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구불구불하고 역동적인 곡선의 장식품, 이중섭의 ‘소’에 드러난 미의식 등도 한국인의 신명 의식을 반영한다. 둘째, 해학이다. 해학은 부조리한 차별의식을 희롱하고, 지혜롭게 웃음으로 화합하는 미의식이다. 무섭거나 혐오스럽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양반과 도깨비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해학이 잘 드러난다. 셋째는 소박이다. 소박은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기교를 넘어서는 자연친화적인 미의식이다. 요란하지 않은 기와집이나 단순하고 투박한 도자기에서 우리 민족의 소박미를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넷째로 평온이다. 평온은 세속적 풍파나 희로애락의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현존(現存)을 통해 고요한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명상적인 미의식이다. 과거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인식하면서 의식을 깨어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가사유상을 비롯해 적막하고 고요한 박수근의 작품과 다양한 한국화, 사진, 조각품들에서 ‘현존’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네 가지 미의식은 한국인의 DNA에만 존재한다. 오로지 돈과 물질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됨으로써 자초한 현대 한국 사회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 문화의 DNA를 알리기 위해, 즉 문화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열심히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첫댓글 그날 강의를 듣지 못해서 무척 아쉽지만, 후기만 읽어도 'K미학의 비전'이 보이는 것 같네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