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장미 / 신현식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천변 둔치를 따라 붉은 장미가 길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해가 질 무렵인데 둔치는 그 장미들로 인해 불이라도 난 듯 환하다. 11월에 웬 장미란 말인가.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장미라면 4월과 5월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그런데 상강이 지난 11월 중순에 장미가 만발한 것이다. 더구나 강원도에는 어제 폭설이 내렸다고 하지 않던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활작 핀 꽃은 분명한 장미다.
오후 늦게 신천 둔치로 산책을 나섰다. 강원도의 눈바람이 예까지 불어오는지 살얼음이 낄 정도로 날씨는 쌀쌀했다. 그래서 두툼한 파카 안에 가디건을 하나 더 껴입었다. 산책로로 향하는 길에는 노랗게 물든 가로수 은행잎들이 뒹굴었다.날씨 탓도 있었지만 그것들로 인해 몸과 마음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둔치를 따라 얼마간 올라가다가 의외의 만발한 장미를 만난 것이다. 하도 신기하여 장미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울적하던 마음이 차츰 밝아졌다.
둔치의 그 장미들은 4월과 5월에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꽃들은 모두 시들었고얼마지 않아 무릎 높이의 밑둥만 남겨 놓은 채 위족의 가지들은 싹둑 잘려 나갔다. 꽃이 없는
장미덩굴은 흡사 과수원의 탱자울타리 같아 썰렁하기만 했다. 그 후 여름 내내 변변한 꽃 한번 피우지 않았으니 아예 장미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그랬던 장미가 오늘 붉은 꽃을 활짝 피운 것이다. 11월이라 그런지 장미의 밑둥은 푸석푸석하게 말라 있다. 아마 제 명을 다하여 가는 길이리라. 그런 장미가 어떻게 꽃을 피웠을까. 파삭하게 말라가는 밑둥의 묵은 가지에서 움을 틔워 새 가지가 하나 둘 뻗어 나왔고 그 가지 끝에 화려한 꽃을 피워낸 것이다.
붉은 장미의 꽃말은 열정이다. 장미는 꽃말답게 저 나름으로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얼어붙은 땅에서 물을 빨아들여 물관과 체관의 끝까지 보내어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 것이다. 처연한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하다. 한낱 식물도 저렇게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는구나 싶다.
오늘 오전에도 병원에 다녀왔다. 요즘 들어 무릎이 말썽을 부렸다. 계단을 오를 때는 제법 시큰거렸고 어떤 때는 걸음을 멈칫거리게 되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며칠 전, 무거운 것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더니 더 심해진 것 같다. 할 수 없이 병원에 갔더니 퇴행성관절염이라 했다. 나이가 들면 다 그러하니 병과 더불어 살 준비나 하라고 병원장인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우스갯소리였지만 왠지 서글펐다.
마음이 심란한 것은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병원 출입이 잦다. 걸핏하면 치과에 가야하고, 어깨가 아니면 허리가 삐걱거려 병원을 찾는다. 몸이 전과 같지 않음이 확실하다. 유연성만해도 그렇다. 노인들이 버스에 올라 뒤뚱거리는 것을 이제는 이해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어디 몸만 그런가. 마음도 마찬가지다. 용기가 나지 않으니 매사에 자신이 없다. 어떤 일에서나 뒤로 물러나게 되고, 늘 하던 일도 주춤거리게 된다. 모든 일이 내 마음 같지 않게 돌아가는 듯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마음은 더욱 초조해 지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다. 사는 게 이런 것이 아닌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자꾸만 심란해 진다. 특히나 바람이라도 불어 나뭇잎들이 우수수 지는 날은 더욱 그렇다. 오늘도 그런 마음을 달래려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장미는 5월 그때의 모습과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새빨간 장미는 노을을 받아 더욱 붉다.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듯한 장미를 바라보노라니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장미에 비하여 내 생각이 너무나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장미를 얼굴에 끌어 당겨본다. 고혹적인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그러자 뜨거운 기운이 내 몸에 전해진다. 그 순간, 나도 이 장미처럼 온 힘을 다하여 새 가지를 뻗어 붉은 꽃을 피워야 한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