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빛, 숨은 뜻 / 신현식
영화 「밀양」을 지인들과 함께 보았다. 영화관을 나와 감상평을 들어 보니 의외로 불만들이 많았다. 그들은 라스트 신에서 뭔가 더 있어야 했는데 싱겁게 끝났다는 것이다.
영화 「밀양」은 남편을 잃은 ‘전도연’이 서울을 버리고 어린 아들과 함께 시골로 내려온다. 시골 노총각 ‘송강호’가 따라 다니지만 관심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유괴를 당하여 살해 된다.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잃은 전도연은 절규한다. 방황하는 그녀를 이웃의 교인들이 교회로 인도한다.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살인범을 용서해 주기 위해 교도소를 방문한다.
교도소의 범인은 밝은 얼굴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전도연은 아연실색하여 돌아온다. 혼란에 빠진 그녀는 발악을 하고 마침내 자살에 실패하고 정신병원에 입원치료를 받는다.
퇴원하는 날, 마중 나간 송강호가 그녀를 데리고 온다. 집에 온 전도연은 스스로 머리 커트를 하려 한다. 마당에 작은 거울을 세우려하나 여의치가 않다. 송강호가 거울을 받쳐준다. 전도연의 잘린 머리칼이 하수구에 떨어지고 그 하수구에 한가닥 햇빛이 비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문제의 라스트 신에는 네 개의 장치가 있었다. 거울을 받쳐주는 송강호, 잘린 머리칼, 햇빛, 하수구가 그것이다.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건성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깊은 의미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사람의 머리칼이나 햇빛은 다 고귀한 것들이다. 그것이 더러운 하수구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고귀한 것들이 하수구에 떨어지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또 한 가닥의 빛은 막다른 하수구에 있을 수 있다는 해석도 된다. 감독이 타이틀인 ‘밀양’을 ‘빽빽한 빛’이 아니라 ‘숨은 빛’으로 해석한 것도 그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라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비약도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탄에 빠진 전도연이 안정을 찾기 위해 다니지 않던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가. 교회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라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에 면회를 갔다.
그런데 살인범은 자신은 벌써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전도연은 피해 당사자인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을 수 있느냐며 ‘고통도 용서도 하나님이 준다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며 하나님을 부정하며 뛰쳐나왔다.
혼란과 무력감에 빠진 전도연은 칼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다. 정신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은 전도연이 퇴원하여 머리를 자르려 한다. 여자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대 머리를 자르는 심리가 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송강호가 얼른 거울을 들어준다. 그렇게도 쌀쌀맞게 굴던 전도연은 송강호의 배려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인다. 왜 태도를 바꾼 것일까.
전도연은 보이는 것만 믿는다며 큰소리치다 아들마저 죽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줄곧 하나님만 찾아다니니 자기를 도우려고 불철주야 쫓아 다니는 송강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살인범에게 기만당하고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고 나서야 하수구에 비치는 빛처럼 거울을 들고 서 있는 송강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영화 「밀양」은 교회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너희는 이 고통 받는 여자에게 진정한 구원을 줄 수 있는가?' 라는 화두를 던진 영화였다.
한 가닥의 숨은 빛이란 송강호라고 보아야 한다. 처참하게 부서질 대로 부서진 전도연을 구원해 줄 사람은 딱 하나, 그녀를 끝까지 따라 와준 송강호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만이 진정한 구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의 라스트 신은 개방적 결미로 인해 이해하기 힘들데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시(詩)처럼 곱씹으며 음미해야만 그 진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근래에 보기 드문 명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