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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3 삶-오색찬란한 작은 신화
세 번째 질문의 대상은 선택한 제재를 매체로 인간 세계를 향해 던지는 구심적 질문으로서
“그렇다면”에 해당한다. “모든 인간이 제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묻다 보면, 작가는
어느새 대상과 우주와 인간이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유기적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새의 울음은 내겐 뭔가, 촛불의 빛이 내게 무엇을 비추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작가는 내재화하는 독특한 인식 방법과 안목을 획득하게 된다.
세번째 질문은 대상과 인간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보는 작용이라고 하겠다.
탁월한 상상으로 사물의 근원과 전체 우주를 향한 투시가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소우주인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 신화적 근원성을 찾지 못한다면 상상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소재와 대상이
전하는 가치는 작가 자신의 신화와 연관을 맺고 상호 의미를 주고받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므로 작가에 내재하는 상상력은 대상을 매체로 우주의 신화와 작가의 작은 신화를
연결하는 관점을 찾아내는 X-레이와 같은 투시경의 역할을 한다.
한발 두발 숲길을 따라 걷는데 앞 산등성이에서 ‘솨아아’ 소리를 내며 불어오는 바람소리(현상1)에 발을 멈추었다.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오장을 타고 흘러드는 시원한 소리는 심한 갈증을 풀어내 준 샘물 (투시1)같았다. 그 맑은 바람에 취해 정신을 잃고 있는데 또다시 초록색 잎새 사이에서 마른 침엽수 잎이 우수수 (현상2)떨어져 내렸다. 소나무는 이른 봄 내 머리에다 풋 익었던 인생의 낙엽(투시2)을 고스란히 떨구어 주었다. 그 밑 넓은 공간은 마른 갈비가 고르게 펼쳐져 있어 보료를 깔아놓은 듯 했다. 두 사람은 달려가 그 자리에 벌떡 누웠다.
눈앞의 빽빽한 초록 숲 사이로 간간이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녹색의 파노라마 속에 휩쓸려 쾌적하고 상쾌한 솔바람 소리를 드는 행복감은 말하지 않아도 전류가 되었다.(교감) 사랑의 눈빛이 푸르름 안에 번졌다. (관상)
-박종숙「소리1」
화자는 숲길과 바람소리와 침엽수 잎의 자연현상을 통해 자신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삶의 계단에
다다르는 지를 계속하여 자문한다. 숲길을 지나가는 바람과 나뭇잎을 투시하면서 화자는 이것을
촉감이나 시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영감으로 “그러면 그들은 내게 무엇인가?”라고 내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바람을 영감과 생명의 원형으로 인지하여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과
삶을 연결하는 입체적 시선을 얻게 된다. 숲속에 간간이 비치는 햇살과 솔바람 소리에서 행복을
느끼는 화자는 타자 중심의 실존을 인식하며 이때 자연과 인간 사이의 이루어지는 관계는
보은(報恩)이다. 보은을 통하여 인간은 자연주의와 생태주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실존성을 얻는다.
즉, ‘나는 바람으로 산다’라는 주제문처럼 화자는 나뭇잎과 솔바람에서 인간과 자연간의 생태적
상관성을 찾아내었다. 박종숙의 숲은 이로써 우주의 원리를 건져내는 투망이면서 자아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는 투사물이 된다.
화자는 우주가 부단하게 질문을 던지는 물음을 적극적으로 포착하여 얻고자 하는 답을 찾았다.
그리고 “숲 속에 들어가면 서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마른 갈비 위에 눕는다.”는 행위처럼 숲에 대한
경배와 귀의라는 원초적 삶이 생성된다. 대상의 대상화라는 인식과정은 작가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질문이며 여기서부터 문학적 주제가 싹트고 철학적
인식이 열매로 맺는 상상이 가동된다.
칩 둘 : 만다라를 그리는 언어화가
로그 인: 언어의 춤과 마술
수필문은 날줄과 씨줄로 이어지는 옷감처럼 내용과 형식간의 결속으로 엮어진다.
형식은 다시 구조와 기법으로 나누어진다. 문장구조는 음절, 단어, 구, 문장, 단락 등이며
기법은 직유, 은유, 풍유 등의 수사학을 말한다. 그러므로 좋은 문장이 되려면 외적 요소인
구조와 내적 요소인 기법이 상호 결속력을 지녀야한다.
구조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의 수필단락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음절, 단어, 구, 문장이라는
각 요소간의 비중이 안배되어 균형미를 이루어야 수필단락의 자격을 지닌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3.3.3 원칙이 요구된다.
첫 3은 수필문이 서두와 전개부와 결미로 나누어져야한다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구획을 지칭한다.
서두는 배경 설정, 분위기 조성, 주제를 암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전개부는 서두에서 암시된 내용을 펼쳐내는 부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세 개의 내용군이 바람직하며 설명과 묘사를 통해 주제와
소재가 엮어지는 무대에 해당한다. 결미는 전개부에서 펼쳐진 내용을 요약, 재정리하고 비전제시와
가치평가의 기능을 담당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내용 구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승전결이나 5단계도 가능하지만 문장수련을 시작하는
경우 3단 구획이 가장 효과적인 구분이 된다.
클릭 1: 단락문 구조의 3원칙
두 번째 3은 전개부에 적용된다. 전개부의 일반적인 경우는 세 개의 내용군으로 구성되며
그 아래에 2-4개의 단락을 배열시킨다는 점에서 단락이 몇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독립 단위라면
내용군은 연합 단락이다.
전개부는 주제와 소재가 날줄 씨줄로 엉키면서 경험적 사실, 느낌이나 생각, 현상에 대한 관찰과
인식 등 작가의 지적, 정적, 의지적 인지세계가 무한대로 펼쳐진다. 수필은 무제한 펼칠 수 없기
때문에 세 개의 서술내용이 가장 바람직하며, 만일 두 개의 내용군만 배치하면 작가의 주의와
주장이 충분하게 뒷받침되지 못할 뿐더러 독자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4개 이상의 내용군으로 펼쳐지면 과부하가 걸려서 주제의식을 응집시키지 못하고 독자는
각각의 단락은 도입문장과 뒷받침문장과 마무리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도입문은 해당
단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겠다는 첫 문장이므로 짧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명시적인 내용을 담으면서
앞 단락의 끝 문장과 유기적 호응을 이루어야한다. 도입문에 이어 내용이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뒷받침 문장들은 설명, 해설, 보완, 인용, 재설명, 열거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호간에는 호응,
대조, 정립, 평행, 보완, 반증, 순차 등의 결속으로 이어진다. 뒷받침 문장을 엮을 때 문장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장단이 있어야 음성적 리듬과 시각적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마무리 문장은 단락에서 서술하는 내용이 끝났다는 신호를 주면서 다음 단락의 내용을
암시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한다.
덧붙이면 하나의 단락은 적어도 세 문장 이상으로 구성하며 단락끼리의 장단도 필요하다.
단조로운 길이는 수필을 읽는 재미를 빼앗기 쉽다. 체험과 느낌의 배열에 있어서 설명과
느낌의 서술이 불균형을 이루면 주제가 의미화 되지 못하고 제재의 양적 균형이 깨어지면서
보고문이거나 관념의 글이 되어버린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내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다.
-손광성의 <달팽이>의 일부
윗글은 전개부에 속한 한 단락을 인용하여 단락이 어떤 구조를 지녀야 함을 설명한다. 단락에도 도입문과 전개문과 마무리 문장이 있다. 도입문과 마무리문장은 달빛 배경을 그려낸다. 그 다음 문장은 달팽이의 몸짓에 초점을 맞추고, 이어 목, 입, 눈, 자세를 열거와 직유와 대비의 수사법으로 보충 보완, 상술한다. 그런 다음 움직이나 소리 없는 달팽이의 모습으로 침묵의 수용과 무저항을 의미화한 다음 달빛 달팽이로 회귀하고 있다. 마무리 문장에서 “조그만 몸”으로 달팽이의 소시민적 양상을 제시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락구조도 전체 수필문의 구조처럼 3단계로 구성된다.
클릭 2 : 단락문 내용의 3 원칙
수필은 구성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핵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 개의 핵심어를 말하는데 핵심어는
단락의 내용을 압축하면서 내용을 이어주는 허브(핵)에 해당한다. 세 개의 중심어가 단락 내에서
적절하게 안배되어야 내용이 구체성과 균형감과 안정감을 지니게 된다. 가령 얼굴을 묘사한다면
한 단락 안에서 눈, 코, 귀, 입, 점, 안색, 표정, 얼굴형 등을 모두 그려내기보다는 윤곽, 안색, 표정
세 가지만 그려내는데 그때 윤곽, 안색, 표정이 세 개의 중심어가 된다. 인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려면 묘사와 서술의 균형이 필요하고 그 진정성은 중심어의 배열, 전개부의
예시문, 나아가 결미로 이루는 내적 질서가 필요해진다.
어느 날,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보게 되었다.// 죽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끝까지 달리는 독종을 보았다.
저 늙은 말이 미쳤나보다. 저러다 쓰러지겠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놀라웠고 감격스러웠다.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눈물나도록 서럽게 달려 나가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 신현길 <어느 경주마 이야기>의 일부
인용한 단락은 외적 구조에서는 도입/전개/결미로 되고 내용에서는 늙은 경주마가
우리 자신임을 인식해가는 추이를 나타난다. 위 단락의 전개부를 이루는 핵심어는 “늙은 말, 눈물, 희망”이다. 세 개의 핵심어가 말과 인간을 묶고 있다. 작가는 그 말의 모습을 구구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늙은 말을 보고 감격하는 관중의 눈물로 말이 질주하는 모습과 말에서 전이되는
인간의 희망을 그려낸다. “삶이란 외부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임을 인식하면
우리는 “자신의 과거전적과 지녀온 습관과 기술”이라는 적에 대항한다. 이것이 경마대회에서
항상 꼴찌를 할지라도 어느 코스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말의 교혼이다. 희망을 늙은 꼴찌말에서
찾아낸 낯선 시선이 돋보이는 단락이라고 하겠다.
클릭 3: 단락문 수사의 3원칙
마지막 3은 문장 표현에서의 수사적 기법을 말한다. 수필문에서는 직설적인 설명이나 해설보다는
주제를 함축적이고 은근하게 표현할 때 더욱 진실성과 여운을 가지게 된다. 직유, 인유, 은유, 이미지,
반어, 역설, 의성, 의인화 등의 많은 수사방법이 있지만 한 단락 내에서 구사되는 비유법의 유형은
세 개 미만으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용이나 열거나 묘사의 수사학은 심리학적으로 독자에게
안정감과 신뢰성을 주는 반면에 수사학이 가미되지 못한 문장은 단순한 해설문이나 설명문,
또는 보고문에 그쳐버린다. 반대로 한 단락이나 한 문장 안에서 지나치게 비유법이 사용되면
논리가 흐려져 가벼운 미문이 되거나 감상적인 문장이 되어버린다. 수필이 시적 표현을 지닌다고
하더라고 주제성이라는 산문정신을 해쳐서는 안 되며 적절하게 안배된 수사의 미학이 갖추어져야
시성과 산문성을 지니게 된다.
달맞이꽃은 해질녘에 핀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뜰에 나가면 수런수런 여기저기서 꽃들이 문을 연다.(의성법) 투명한 빛깔을 보고 있으면 그 얼까지도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박꽃처럼 저녁에 피는 꽃(직유)이라 그런지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여름내 나는 어둠이 내리는 뜰에서 한참씩을 서성거렸다. 그 애들이 없었더라면 여름의 내 뜰은 자못 삭막했겠다(의인법)/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마른 바람이 불어오자 꽃들은 앙상한 줄기에다 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추어갔다. 오늘 아침 마지막 꽃대를 거두어주었다.
-법정「빈뜰」일부
<빈뜰>은 시적 비유법을 다수 도입하고 있다. 의인법을 기본으로 의성법, 직유, 은유 등 시각,
청각 이미지를 도입하여 어찌 보면 수필문의 담백미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목인「빈뜰」이 암시하듯 무소유와 자연에 대한 자비심에 호소하는 제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시적
비유법의 도입은 불가피하다. 그렇더라도 미문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지의 도입이 청각,
시각으로 체계화되어 있고 이것이 화자의 애경정신과 상호 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칩 셋 : 문자도(文字圖)를 관측하라
로그 인: 언어의 측량사
좋은 수필의 요건은 재발견이다. 소재의 재발견, 의미의 재발견, 문장의 재발견, 그리고 사유의
재발견이다. 그중에서 “삶의 의미나 가치를 재발견케 하는 것이면 가장 좋은 수필이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이 어떤 글인가를 모르면 수필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고,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면 수필처럼
어려운 글이 없다는 근원(近園)의 말처럼 문학성을 지닌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선과
진실의 극점을 지향해야한다는 요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좋은 수필은 그러한 의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명문도 많고, 명작을 남긴 작가도 많다. 그러나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
더 큰 감동을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수준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에 해당한다. 좋은 시란 결국 언어를 절제한 양식인 것처럼 산문도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함축적이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이처럼 참으로 좋은
글은 많은 언사를 빌리지 않고서도 독자의 상상력을 발현(發現)시키는 경제적인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필은 쉽게 읽힐 수 있어야한다. 쉽게 읽는다는 가독성은 쉽게 써도 좋다는
묵시적 허용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쉽게 읽기위해서는 작가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묶고, 엮고, 펼쳐내야 한다. 허투루 쓰인 글은 읽기가 어려우며, 난해한 글은 정신적 피와 땀이
배어있지 않다는 변명에 불과하다.
문학은 인간의 사람을 기반으로 하는 의미망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글은 유기체로서 상관성과 결속성을 지녀야하고
이런 조건을 갖춘 문자도만이 문학의 걸개가 된다. 주제를 선택하면 주제에 적합한 제재와
언어가 정해지며 나아가 주제, 제재, 문장, 경험, 독자, 작가라는 제요소가 언어로 결속되어야
이데아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주제와 소재와 문장 구조가 서로 의탁하여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듯
수필은 무형식이 아니라 유 형식과 홑 형식의 글이다. 그리고 홑 형식이란 작품 하나하나가
그것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맞춤 형식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문학적 언어는 일상적 언어나 과학적 언어와 달리 인간의 체험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기호이다. 코울리지가 시는 “가장 훌륭한 단어들이 가장 훌륭한
순서로 나열된 것”이라고 한 말도 문학은 최적의 언어와 최적의 문맥을 지닌 도형(圖形)이어야한다는
뜻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지켜보면 각각의 별자리는 하나의 전설과 신화와 이야기를
지닌 작품으로서 우주는 작가가 해석하여야만 하는 거대한 문자로가 된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수필가는 문장의 디자이너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1) 형상과 인식의 결속
문학은 언어예술로서 형상화하고 인식을 도모하는 정신적 활동이다.
문학적 언어는 형상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일상어와 실용적인 표현과 구별되며,
인식작용이라는 점에서는 서투른 말장난이나 지식 습득과 구별된다.
형상이란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지만, 형상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살아가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안도감과 즐거움과 모험심을 갖게 한다.
형상만이 중요하다면 수필은 문자놀이에 불과하다. 인식은 무지의 땅에 덮인 진실을 찾아내는 행위다.
인식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무의미했던 대상에서 참된 무엇을 발견할 때의 즐거움과 보람을 말한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글이 문학과 거리가 먼 까닭은 형상화를 통한 인식의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찰 대웅전의 지붕에 우뚝 솟은 망새기와를 상목수로 여기거나, 연못의 백련 봉오리를
우주의 소리를 증폭시키는 마이크로 간주하거나, 바닥에 떨어진 흰 밥풀을 수도승으로 바라보는 것은
망새와 목수, 연꽃 봉오리와 마이크, 식탁에 오롯하게 놓인 밥풀과 벌판에 선 수도자의 원형적 일치를
인식한 결과이다. 이처럼 문학은 탈사실적 인식으로서 체험을 요구하므로 문학의 미학은 형상화와
인식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데 있다.
나무의 언어를 모르는 나는 까슬한 등허리를 가만히 쓸어준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감. 답답하다. 동네 공원의 할머니처럼 쿵쿵 부딪쳐본다. 몸이란 때로 말이 통하지 않은 것들끼리의 해결책이기도 하지 않던가.
“내 체온을 느껴봐. 따뜻하지 않아?”
나는 맹렬히 육탄공격을 한다. 등줄기를 바삭 들이대며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다시 부딪친다.// 이래도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냐고, 않을 테냐고, 숲이 울리도록 생떼를 써 보는 것이다
- 최민자의 <존재는 외로움을 탄다>의 일부
최민자가 바라보는 나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가가 하소연하고 소통하려는 대상이다.
작가는 고독하므로, 나무도 고립되어 있으므로 고독을 공유하는 존재간의 벽을 깨려는 작가의 몸짓이
적나라하게 그려질 수 있다. 작가에게 나무는 소외된 자연물이 아니라 타자를 내면으로 끌어들여
일체가 되려는 욕망의 대상체가 된다.
즉 나무는 소통의 대상으로서 최민자가 인식한 나무다. 그 나무는 타 작가의 나무와 다르다.
사계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소재로 선택된 나무나, 인고나 고독의 상징체로 간주된 다른 작가의
나무와는 소재 선정에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문학은 형상과 인식이라는 두 요소가
조화롭게 통일된 구조를 지녀야함을 시사한다.
2) 제재와 주제의 결속
수필은 문자로 이루어진 영적 소통 수단이다. 수필은 작가와 제재가 서로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작가와 독자가 정서적 심미적 교감을 나누고, 독자와 제재가 다시 서로의 존재성을 재확인하는 작업이다. 이때 수필어는 일상어와 달리 긴장미와 상징성을 지니므로 묘사, 설명, 서술이라는 실용적 소통과
차이가 있다. 수필이 문학성을 지니려면 사물에 지닌 고유한 속성으로 제재와 주제의 유기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본격수필, 고급수필, 문학수필로 나아가는 하나의 조건이다. 주제를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재를 투시하는 전략화가 요구된다. 그 전략은 적절한 소재를 선정하는 분별성,
소재와 주제를 일치시키는 적절성, 그리고 소재와 주제를 잇는 적절한 표현을 고르는 일치성을
전제로 한다. 창작은 목적 지향적 언어행위임으로 제재와 주제를 접근시키는 전략이 불가피해진다.
제재와 주제의 상관성에서 주의할 점은 사물을 얼마나 “낯설게 보는가”이다. 낯설게하기는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로서 주제의식을 신선하게 만들어준다.
오창익의 대표작 <북창>을 살펴보면 제재인 북창은 북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는 물상이며,
목성균의 <명태>는 아버지의 꼿꼿한 선비다운 품성을 반영하며, 윤재천의 <구름카페>는
작가의 문학적 꿈과 서구적 문학관을 상징하는 구조물에 해당한다. 참신한 시각, 남다른 의미부여,
화자와 사물간의 특수 관계를 설정하려면 일제일재(一題一材)이어야 한다.
제재의 동질화는 사물과 작가가 영적 교감을 나누고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로서 상호교감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수필가의 경험과 정서가 녹아내릴 때 소재의 인간화가 이루어지면
이 때 독자는 수필가와 정서적, 지적, 심미적 일체를 이루게 된다.
스승이 아이들 사이를 한 바퀴 휙 둘러본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나보다. 덤덤한 표정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리에서 벗어나 산 속 옹달샘을 보며 부지런히 스케치하는 소년이 보인다. 스승은 손짓으로 그를 불러 그린 그림을 펴보라고 한다. 수줍은 듯 혹은 자신이 없는 듯 겨우 펼쳐 보이는 그림 속에는 동자승이 물동이를 지고 산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스승은 무릎을 탁! 쳤다. 오늘 화동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곳의 보임’이 화폭 속에 가득 담겨져 있지 않은가. 스승은 소년이 그린 ‘숨어 있는 절’ 그림을 아이들 앞에 아무 설명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하루의 사생 수업을 마친다.
- 구활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
위 단락이 일부 보여주고 있는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에 함축된 주제는 보이지 않되 보이는
공(空)과 유(有)의 관계이며 소재는 어느 동자승이 그린 ‘물동이를 지고 가는 그림’이다.
절을 그리라는 스승의 주문에 따라 다른 아이들은 절을 그리지만 이 소년을 물동이를 지고 산길로 가는
모습을 그린다. 동자승이 물을 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자신이 거하고 있는 암자다.
즉, 스승이 주문한 주제가 숨어있고 화폭을 외연시키면 자연스럽게 절이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주제가 추상의 대상이라면 소재는 구상의 대상으로서 양자간의 유기성이 강할수록
문장의 함축성과 충격적 전파력이 높아진다.
3)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의 결속
수필의 완성여부는 결속의 정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결속에는 외적 결속과 내적 결속이 있다.
외적 요소는 작품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점으로서 수필을 이루는 제재, 주제, 문장, 상상,
작가간의 응집력을 말한다. 반면에 내적 요소는 작품을 구성하는 구조의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수필문을 이루는 단어, 구, 절, 문장, 단락, 의미부 사이의 유기적인 체제를 말한다.
수필문의 문장은 단순히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내적 연관성을 지닌 유기적 총체라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인가, 아닌가를 느끼기는 쉬우나 왜 그런가를 분석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실제 어느 작품이든 결속성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결속력을 지니는가 인데 수필을 이루는
각 요소는 전체의 일부로서 균형을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주제와 제재, 제재와 의미, 대주제와
종속주제, 단락과 단락, 비유와 소재간의 균형과 질서와 결속이 이루어지면서 위에서 언급한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가 호응할 때 문학성과 예술성을 지닌 수필이 완성된다.
침구실에 같이 불려 들어갔다. 빨쪽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뽀얀 맨발이 보인다. 초등학생 계집애마냥 발도 작다. 고슴도치가 된 스님과 내가 의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다. 커튼을 넘어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린다. 커튼 밑으로 법당 향내가 솔솔 넘어오는 것 같다. 통증을 참는 심호흡인가? 아파도 혼자, 서글퍼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절대 고독, 거기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연민인가? 이따금씩 호요- 한숨짓는 소리가 들린다. 무소뿔처럼 홀로 가야 할 구도의 길, 평생 잿빛 버선 속에 감추고 살아가야 할 저 발가락에다 불현듯 주홍빛 꽃물을 들여 주고 싶다. 문득 남산 오막살이 토담 아래 지천으로 피어있던 봉숭아꽃이 떠오른다.
-안병태의 <여승(女僧)>의 일부
이 글의 외적 요소는 주제에서는 고독과 해탈, 제재는 침구실, 문장은 설명과 사유와 묘사로
구분되어 있다. 내적 요소는 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주홍빛 봉숭아꽃과 뽀얀 맨발,
통증을 참는 심호흡과 호요- 한숨짓는 소리가 속세와 탈속의 세계를 반영하며 “스님과 내가 의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침대” 에 누운 인연은 함께 하되 아픔은 홀로 견딜 수밖에 절대고독의 주제와 결속한다. 이러한 내외적 결속을 통해 작가는 성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여승에 대한 애처로움을 “남산 오막살이
토담 아래 지천으로 핀 주홍빛 봉숭아로 발가락에 꽃물”로 표현한다.
작가는 그 여승을 봉숭아물을 들여 주고 싶은 여동생으로 인식하여 에로티시즘에 혹하려는 독자를
세속적 연상이라는 함정에서 구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