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나는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사랑을 살기로 선택하며 절합니다.
옛날 옛적에 어느 시골 동네에 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박씨는 대대로 상인 집안의 인물로, 날 때부터 집안에 쌓인 재산이 아주 많았다. 거기에 가문 대대로 내려온 상인의 노하우가 있어 돈 버는 재주 역시 거의 기예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박씨는 가진 건 한 보따리일지라도 베풀기란 쌀 한 톨 아까워하는 마음씨이기도 했다.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시주 받으러 오는 중에게 쌀 한 그릇 내주고도 뒤로는 “저 도둑놈의 자식들”이라 말하고, 자기 집 앞 마당 쓸고 있는 노비를 보다가도 “뭐 훔쳐 갈 거 없나 힐끔거리기라도 하느냐”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웃 간의 의는 고사하고, 당최 사람을 믿지 못하는 양반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박씨였던 것이다.
박씨의 지독한 구두쇠 심보는 이미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에서 가장 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쌀 한 톨 나눠주지 않던 박씨를 이미 벼르고 또 벼르던 와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재물이 너무나도 아까웠던 박씨가 ㄷ기어이 자신의 땅에서 농사 짓는 농부들에게 주던 쌀 양을 줄여버린 것이었다. 슬슬 날씨도 쌀쌀해지던 시기, 새 겨울을 준비하던 농부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박씨 나리, 이런 법이 어디 있소! 일은 똑같이 시키면서 쌀은 덜 주겠다니, 우리는 도대체 뭘 먹고 살란 말이오?!”
“거 남의 땅에서 일하는 자들이 말이 참 많구려. 아닌 말로 내가 너희들을 써주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뭘 먹고 산단 말이냐? 더 들을 것 없으니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그렇게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농사지어 연명하던 농부들은 이번 일로 인해 온 가족이 굶게 생긴 상황이었다. 반면에 박씨는 돈 나가는 구멍 줄였다고 좋다구나 하고 있으니, 농부들 분이 삭히다 못해 결국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고, 또 일이 벌어지게 된다. 박씨는 어느날과 마찬가지로 상인 업무를 이어가던 와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급한 행색으로 아랫놈 하나가 대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영 좋지 않은 아랫놈의 표정이 불길한 징조를 안 마당으로 가져오는 듯했다.
“나리, 큰일났습니다요.”
“거 무슨 일인데 그리 난리법석을 떠는 거냐.”
“슬슬 절기가 한로에 접어들면서 곡식을 수확해야 할 시기인데, 갑자기 농부들이 단체로 일을 가만둬 버렸습니다요.”
박씨는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만 버럭 소리지르고 말았다.
“뭐라?! 농부들이 일을 그만둬?”
“예 그렀습니다요. 이대로 가다가는 이번 농사는 수확을 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요.”
“뭐 이런…. 당장 농부들을 불러들여라!”
그러나 농부들은 갈하는 박씨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되려 박씨가 강하게 말할수록 농부들도 강경하게 농사를 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었다. 결국 박씨는 농부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농부들 역시 농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이번 겨울을 제대로 보낼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지난 나날에 박씨에게 쌓이고 쌓인 분을 이번 일로 한 번에 터트리는 것이었기에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박씨는 작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다, 되려 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 자신이 업신 여기던 농부들에게 크게 한 방 맞은 것이었다.
결국 박씨는 고집을 꺾고 농부들에게 정당한 양의 쌀을 주면서 곡식을 수확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농부들도 박씨가 먼저 고집을 꺾으니, 박씨의 말을 들어주었고 마침내 올 한 해 곡식을 무사히 수확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이후, 구두쇠 박씨는 더 이상 돈을 아끼기 위해 이웃에게 마음을 덜 쓰는 일을 없도록 하였다고 한다.
44. 나는 다른 사람의 가치 기준에 나를 맞추지 않고 오직 나로 살 것을 선택하며 절합니다.
“저의 좌우명은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입니다.”
이 말은 내가 중학교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나의 좌우명에 대해 물으셨을 때 했던 말이다.
맹모삼천지교.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이 주변 환경에 따라 다르게 자란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는 아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서당 주변으로 이사를 가자, 마침내 아들이 공부를 해서 학식 높은 선비로 잘 자라났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몹시 좋아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자주 다투시다가 끝내 이혼하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의 양육권을 두고 마지막으로 다투셨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다툼으로는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끝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의중을 물었다.
“윤수야, 너는 아빠가 좋니, 엄마가 좋니?” 어느 집안의 어느 부모님이라도 자신의 자녀에게 흔히 물어볼 만한 질문. 그러나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나는 이 물음이 그런 단순하고도 가벼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문제는 인식해도 답을 구할 만큼 똑똑하지는 못했던 나는, 결국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둘 다 좋아요.”
이 말을 들은 부모님은 본인들이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기에 잠시 당황하였다. 그러고는 문득 서로를 바라보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띄우는 것이었다. 헛웃음. 그러나 이때의 나는 이 말을 알지 못하였고, 그랬기에 그들이 지은 표정을 단순히 미소로만 생각하고서 받아들였다. 당시의 나는 단지 그 모습이 아주 보기에 좋았었다.
이후 부모님은 절차대로 이혼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 아버지가 마주치는 일은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두 분 모두와 연을 끊지 않고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다. 덕분에 이혼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음에도 나는 또레 친구들과 크게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나의 신조였다. 언제나 나에게 주어진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가 가르키는 답을 따라 살아가는 것. 이는 나이가 차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을 알게 되고 나선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로 스스로의 좌우명으로 삼게 되었다.
단지 이 말 한 마디가 세상의 이치를 꿰뚫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세상에서는 만사 불변의 법칙이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 나에게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그 무언가를 알아채는데 아주 비범한 능력이 있었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윤수야. 너는 참 좋은 아들이란다.”
“너만큼 잘 맞는 친구는 처음이야!”
“윤수만큼 훌륭한 학생은 본 적이 없다.”
“야, 같이 놀자!”
“윤수씨 정말 매력 있으시네요.”
“이건 너한테만 해주는 얘기야.”
부모님이 이혼하고 들어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어렵지 않았다. 대학교도, 군대도, 직장도, 연애도, 결혼생활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 남들이 흔히 어렵다고 말하는 공부나 군대, 결혼 같은 것은 내게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그 테마 안에 마련되어 있는 어려움이었을 뿐,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이 모든 인생의 과정들이 어렵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언젠가 이런 나를 와장창 부숴버릴 예상치 못한 현실이 덜컥 나를 찾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그런 일은 없었다.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점차 세상이 내게 던지는 일들에 긴장하거나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회사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즈음에는 완전히 경시하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에게는 좋은 아들이었고, 친구들에게는 좋은 친구였고, 형 누나들에게는 좋은 동생이었으며, 후배에게는 좋은 선배였다. 또 연인에게는 좋은 남자친구였고, 직장상사에게는 좋은 부하직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있어서 항상 좋은 사람이었다.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고, 솔직히 나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한 평생을 살다 보니, 이제는 덤덤해진 일들을 세상은 내게 자꾸만 던져왔다. 누군가와 부부의 연을 맺어서 나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아이를 배었다. 첫째가 태어나고 둘째, 셋째까지. 나는 총 세 명에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또 직장에서는 나름 훌륭한 실적을 내며 승진을 계속했다. 어느샌가 회사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내가 몸담은 회사에 대한 애정 역시 생겨났다. 또한 직장 내 사람들과도 좋은 인연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친구들과는 아쉽지 않을 정도로 종종 얼굴 보며 평소 담아두던 이야기들을 꺼내기도 하고, 또 들어주기도 했다. 다른 좋은 인연들도 많았지만, 살다 보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역시 오랜 친구들하고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예정된 불행 역시 존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부터 그리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셨기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요양원에 들어가 생활하시다가 조용히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홀로 댁에서 지내시다 넘어져서 그만 머리를 다쳐 급사하셨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이별이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인연과의 사별은 역시나 마음 아팠다.
이후, 나는 자라나는 자녀들을 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살았고, 그렇게 언제와 같이 살고 또 살다 보니 어느새 나이가 환갑을 넘게 되었다. 그리 성대한 잔치를 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들끼리 조촐한 환갑 잔치를 열었다. 어느새 자녀들은 모두 각자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이 아주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나는 자리였다. 새삼 내 나이가 60이나 되었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지만, 자녀들과 함께 작은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다.
그러다 문득 작가 일 하는 세 자녀 중 막내 지한이가 내게 물었다.
“우리 아빠 나이가 벌써 60이네. 아빠. 아빠는 인생을 60년이나 살고 보니까 어떤 것 같아?”
굉장히 막연한 질문이었다. 질문을 던진 지한이 역시 어떤 명확한 대답을 구하고자 물은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 번 애써보았다. 내가 지난 세월을 살고 보니 어떠했는지, 한 바퀴 돌고 보니 인생은 어떤 건지 말해주고 싶었다.
“맹모삼천지교지. 인생은 항상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가르키는 답이 있으니까.”
“에게. 그거 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잖아.”
막내 지한이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지한이도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제 삶을 꾸려가는 중이었음에도, 여전히 애 같은 모습이 남아있었다. 나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고, 가족들 모두 따라 웃었다. 그렇게 다 같이 웃고 있던 와중, 나는 문득 헛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면, 난 어머니와 아버지 중에 어머니를 더 좋아했었지.’
윤수는 홀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