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 지우기 / 신현식
뜨겁게 달아오른 한낮의 지열이 숨을 틀어막았다. 폭염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양도소득세 신고를 위한 서류를 제출하고 세무사 사무실에서 막 나오는 길이었다. 공장으로 쓰던 땅을 반듯하게 만드느라 분할하여 팔기도 하고 주변의 땅을 사기도 하여 내어야 할 세금 또한 복잡했다. 오늘 그 서류를 마무리 한 것이다. 그런데 후련해야 할 가슴은 어쩐 일인지 계속 뻐근했다.
아침부터 왼쪽 가슴이 묵직했었다. 그러다 말겠지 하고 찜통 더위에도 볼일을 보러 다녔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에서 없어져야 할 통증인데 가라앉지 않았다. 불안이 전신을 엄습했다.
심장은 예전부터 좋지 않았다. 심근경색으로 응급실에 갔던 적도 있었다. 정도가 심하지 않아 일 년여 약물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 그런데 그대와 비슷한 전조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남은 볼일을 접고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차창에 스치는 시가지 풍경만큼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죽어도 여한은 없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첫 수필집을 내고 나니 다 한 양 뿌듯했었다. 그래서 큰소리 쳤는데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이 병은 순식간에 가기 때문이다.
집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 갔다. 집에가도 아무도 없다. 아내는 어제 수련회에 갔다. 그러니 집에 가는 것도 능사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도대체 이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순간 가는 길에 있는 대학병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곳에 친구가 있으니 상의를 하면 될 것 같았다. 방향을 그쪽으로 돌렸다.
교수실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안내 데스크에 물어보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친구는 학회에 참석하느라 해외출장 중이라 했다. 모든 것이 원위치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죽음이 바로 코앞에 온 듯했다. 정원(庭園)으로 나와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세상에 큰 보탬을 주지 못했지만 크게 욕먹을 짓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다지 추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면 하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얼기설기 얽힌 땅문제도 해결되었으니 특별한 것은 없다. 아들의 혼사가 남았지만, 나 없다고 짝을 만나지 못한다는 법도 없다. 좋은 수필 한 편 남기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건 욕심이다. 그렇다면 꼭 해야 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다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마음 한 구석이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필집의 원고가 더오른 것이다. 두 번째 작품집을 위해 원고를 저장 중이다. 내가 가고 나면 식구들이 책은 펴내 줄 것이다. 문제는 몇 편의 파작(破作)이 있다는 것이다. 쓸 때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형편없지 않은가. 지워야지 하면서도 그걸 여태 지우지 못한 것이다. 그것이 책으로 나온다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한다.
또 하나는 싱거운 친구가 보내온 메일이다. 어느 여배우의 나신인데 지우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들을 지워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없다. 어쨌거나 지금 해야 할 일은 응급실로 가서 접수를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의사는 응급실에 온 이유를 묻더니 곧바로 혈압을 재고 심전도 검사를 했다. 다행히 검사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가슴의 통증은 여전했지만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시간을 두고 다시 검사를 해야 하니 침대에 누워 있으라 했가.
많은 환자들이 들이닥쳤다. 피를 쏟고 화급을 다투는 환자도 있었다. 응급실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침대에 누워 있으려니 꼼짝없는 중환자였다. 제발 집으로 돌아가 파일을 지울 수 있게 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얼마 있으려니 내 옆자리에 한 환자가 들어왔다. 그 환자도 나와 증상이 비슷했다. 계속되는 고온 현상으로 순환기 환자가 많았다. 그는 보름 전에도 같은 증상으로 왔다고 했다. 심전도 검사에 이상이 나타났지만 혈관 조영 촬영에서는 이상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 안정을 취한 후 퇴원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또 통증이 있어서 이렇게 왔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는 안심이 되었다. 심전도 검사에 이상이 나타났는데도 조영촬영에 나오지 않았다면 심전도 검사에 나타나지 않은 나는 아예 조영 촬영이 필요가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너무 더웠고 신경을 많이 써서 심장이 일시적으로 트러블을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담당 의사 소견을 들어야 하기에 기다렸다.
두어 시간 기다린 후 다시 검사를 했고, 역시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담당의사는 내 생각과 흡사한 진단을 내리며 이상이 있으면 응급실로 오라며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자정이 가가운 시각, 병원을 막 나서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오지 말라 했건만 걱정이 되었던지 먼 곳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종일토록 신경을 곤두서게 했던 그 파일들을 바로 지워 버렸다. 가슴은 계속 뻐근했지만 파일을 지워서일가,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첫댓글 정리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선생님 수필을 읽으면서 문득 해야겠구나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