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학시절⓶-언어의 관념성과 무력함 (신영복)
징역 초년의 일입니다. 교도소에도 좀 편한 자리나,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없진 않습니다. 있었어요. 독방을 고집 한다거나, 또는 그런 것이 가능한 부서도 없지 않습니다. 저는 공장에 출역(出役)해서 작업반대에 소속되었습니다. 군대로 말하자면 말단 소총소대에 배치된 셈이었어요. 나보다 먼저 대전교도소에 내려와 있던 후배가 어렵게 어렵게 전한 이야기가 공장으로 출역하라는 것이었어요. 혹시나 다른 부서로 출역하게 될까봐 걱정을 했었나 봐요. 학교시절에 비록 관념적이기는 하지만 기층 민중들의 정서와 사고, 그 속에 묻혀있는 어떤 힘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어렵겠지만 말단으로 내려가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때 몇몇 사람들과 서로 그런 의논을 했습니다., 비록 룸펜 프로이긴 하지만 감옥은 민중공간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노동의욕이라든가 자부심이나 주체의식이 없는 무의식 군중이긴 하지만 그 속에 그래도 교실과 책 속에는 없는 상당한 분량의 민중적 현실이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저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맞닥뜨린 공장의 작업반대에서는 나를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냉랭하다는 뜻입니다.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셈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약 5년 동안 제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시실은 5년 이상 걸렸는지도 몰라요. 세상의 밑바닥에서 모멸 당하면서 살아온 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의 분류기준으로서는, 제가 비록 자기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자기들을 억압하고 모멸하던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어요.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인식이었고 내게는 매우 힘든 5년이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실에서, 책을 통해서, 수많은 이론과 논의를 통해서 간추린 지식이 현실의 벽에 부딪칠 때, 이런 경우에는 가장 먼저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언어를 버리는 것입니다. 언어가, 말이 얼마나 무력한 것이라는 것을 재빨리 깨닫는 일입니다. 언어는 현실에 있어서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언어는 현실적으로도 많은 경우에 오히려 진실을 감추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장하고, 변명하고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커튼처럼. 그래서 저는 현실의 벽 앞에서는 언어를 버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검증 받아야 한다는 각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교실과 책과 이론으로 배운 사람들이 갖는 공통적인 착각의 하나가 바로 언어로서 설득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소위 <먹물>이 부족한 사람일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잘 모르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장 출역이 없는 일요일은 하루종일 감방에서 지내야 되요. 특히 그 노인은 지겨워 죽을 지경이었나 봐요. 일단 책을 하나 잡았어요. 아침부터 시작해서 읽다가, 한잠 주무시다가, 점심 먹고 또 읽다가 주무시다 가를 반복하였어요. 책표지도 떨어져나간 낡은 <현대문학>이었어요. 그 현대문학의 수필 한 편을 하루종일 걸려서 읽었어요, 저는 그분이 주무실 때 얼른 읽었지요. 저녁에 제가 다가가서 독후감을 요청했지요. '독서'라는 말에 무척 미안해했어요. 한사코 사양하다가 딱 한 마디로 독후감을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 수필을 쓴 사람이 우리 나라의 유명한 여류 수필가였어요. 제가 이름은 여기서 대기가 불편하지요. 그 노인의 독후감은 이렇습니다. "자기(수필가)집 뜰이 좁아서 꽃을 못 심는대나 뭐 그런 걸 썼어!" 였어요. 못마땅하다는 투가 역력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내었습니다. 여러분들이나 우리같이 먹물 좀 든 사람들은 그 여류 문인이 펼치는 현란한 언어구사에 사로잡히게 마련이죠.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그것들이 무력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무식이 훨씬 더 날카로운 통찰력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총격이었습니다.
교실과 책을 통해서 습득한 논리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충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학시절>에 경계해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댓글 어떤 현란한 언어도 헌신의 삶 앞에선 무력할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