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 신현식
봉창
어렸을 적, 우리 집 뒤편으론 좁은 골목이 있었다. 골목은 큰길과 연해 있지 않아 사람들의 왕래가 뜸했다. 그 으슥한 골목을 청춘 남녀들이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땅거미가 깔리는 저녁 무렵이면 골목길은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나는 소곤거리는 소리에 이끌려 까치발을 하고 방 뒤켠의 작은 창을 기웃거렸다.
동네 친구의 집에는 들창이 있었다. 그 들창은 창의 아래쪽을 들어 올려 막대기로 받쳐 놓는 창이었다. 방바닥에서 조금 올라간 자리의 창인지라 앉아서도 밖을 내다 볼 수 있었다. 집 뒤편으로는 담장이 없어서 보리밭이 훤히 보였다. 우리 꼬마들은 창 앞에 엎드려 집 뒤편의 파도처럼 일렁이는 보리밭을 내다보곤 했다.
흙벽돌집이었던 외가의 건너 방에도 작은 창이 있었다. 그 창은 채광만을 위한 창으로 한지를 겹으로 발라 두툼했었다. 흩뿌리는 비에 견디라고 들기름까지 먹여 놓아 창은 노르스름했다.
어느 겨울방학이었다. 사촌들과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녘,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그 창이었다. 다뜻한 이불 밑에서 바라 본 봉창. 아침 햇살을 받아 오렌지색으로 밝아 오던 그 창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은은함을 무엇에 비유하랴.
산장의 창
농장을 하나 장만했을 때였다. 이웃에 멋진 산장이 있다기에 구경을 갔었다. 작은 동산으로 된 산장은 온통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산장은 대문에서 한참이나 올라간 언덕배기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이 얼마나 크던지 건물 전체가 거실 같았다.
그런데 큰 거실보다 더 눈길이 간 것은 거실 남쪽으로 탁 트인 전망이었다. 남쪽의 벽 전체가 통유리로 된 커다란 창이었다. 파격이었다. 서 있어도 앉아 있어서도 누워 있어도, 그 거실에서는 산장 아래에 펼쳐진 푸른 숲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그 창 앞에 서서 TV에서 본 나카소네 수상의 산장이 떠올랐다. 시골의 농가를 사들여 수리했다는 그 산장은 심산유곡에 은둔거사가 기거하는 집 같았다.
산장이 산 중턱에 있어서 방 안에서도 넓게 펼쳐진 차밭이 한 눈에 들어왔다. 비가 오는 날엔 자욱한 안개가 한 폭의 그림처럼 산허리를 휘어 감았다. ‘나카소네’는 그 곳에서 ‘레이건’과 ‘고르비’와 회담을 했었다.
눈 아래 펼쳐지는 대추밭을 바라보며 나도 그런 언덕 위의 산장이 있으면 했다. 만약 산장을 갖게 된다면 남쪽으로 욕실을 내리라. 전면을 커더란 통유리로 한다면 따뜻한 욕조 속에서 창 밖의 설경을 즐길 수 있으리라.
북창(北窓)
우체국에 근무하던 때였다. 내가 앉은 자리는 2층의 북쪽 창가였는데 고개를 들면 휑한 공원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공원에는 떨고 있는 나무들과 바람에 쫓기는 마른 잎들뿐이었다. 인적 없는 그늘진 공원. 나는 그 스산한 공원을 내려다보며 그 사람이 멀리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불었다. 닳아서 헐거워진 창문이 덜커덩거리며 선을 타고 가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지우려는 듯 몹시도 애를 썼다. 몸부림치던 그 창문 소리는 오래 동안 내 귓가를 맴돌았다.
마른 잎들이 방황하는 그 공원과 떨고 있는 창을 잊으려 나는 복도 끝에 있는 서고(書庫)를 드나들었다. 나만의 공간인 그 서고는 남형으로 햇볕이 잘 들었고, 인적 없는 산사(山寺)처럼 고요했다. 하루에 한 두 번 밖에 가지 않던 그곳에서 종일을 보내곤 했다.
서고엔 오후의 햇살이 말갛게 내리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은 도열한 서가(書架) 사이로 빗금을 그으며 내렸다. 그 햇살 속에는 미세한 먼지들이 떠다녔다. 나는 창가에 기대어 그 햇살 속의 작은 입자들을 멀뚱히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팥죽처럼 끓어오르는 마음이 서서히 가라 앉았고 시린 가슴도 조금씩 따스해져 왔다.
잊으려 했지만 애련의 파편들이 그 햇살 속의 알갱이들처럼 한 동안 내 머리 속을 부유했다. 그래서 북쪽으로 난 창엔 내 젊었을 적의 시린 애상이 서려있다.
객창(客窓)
밤 비행기에는 낭만이 있다. 어두움은 불필요한 것들을 삼키는 것일까. 밤에는 질주하는 비행기의 속도감도 굉음도 무디어진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창밖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버릇이 있다. 불빛이 반짝이는 시가지의 정경이 더 없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카이탁 공항도, 나리타 고항의 불빛도 아름다웠지만 오래 전에 보았던 칠레의 산티아고 공항의 불빛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긴 여정 탓에 정이 들었음일까. 반짝이는 네온 불빛들이 마치 “아디오스! 아디오스!”라고 눈물 그렁거리며 손을 흔드는 듯했다.
출장지에서의 아침 시간은 상상 외로 더디게 간다. 샤워를 하고 TV를 보고 아침 식사를 마쳐도 언제나 시각은 이르다. 아무리 늦장을 부려 봐도 그렇다. 아침 일찍 상대방을 방문할 수도 없으니 빈 시간을 오롯이 혼자 채워야 한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가 1층의 커피숍으로 내려간다. 시간이 너무 많으니 커피도 아껴 마신다. 신문도 아껴 뒤적인다. 그러다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거리엔 출근하느라 바삐 걸어가는 행인들뿐이다.
창안의 나는 몸을 비틀고 있는데 밖의 행인들은 종종걸음으로 출근을 서두르고 있다. 그 순간, 저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젖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객창 안의 이방인이라는 소외감이 엄습한다.
지옥의 창
창문이 없는 집도 있다. 「몬테크리스트 백작」, 「벤허」, 「빠삐용」이 갇혔던 곳은 하나 같이 창문이 없는 암흑의 감옥이었다. 그런 곳은 죄가 무겁고 난폭한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라 한다.
그런데 창은 있지만 지옥 같은 감옥이 있다. ‘숀 코네리’ 주연의 영화 「더 록」에 나왔던 알카트레스 섬의 감옥이 바로 그 곳이다. 샌프란시스코 앞바다가 보이는 그 감옥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금문교와 네온이 반짝이는 도시를 보면서 수감생활을 한다. 감옥에서 바다 건너의 휘황찬란한 도시를 보았을 때를 상상해 보라. 천국이 빤히 보이는 지옥의 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지옥의 창은 ‘데이비드 린’이 감독한 영화 「닥터 지바고」에도 있었다. 전차를 타고 가던 ‘지바고’가 길을 걷는 ‘라라’를 발견한다. 얼마나 애타게 찾는 ‘라라’였던가. ‘지바고’는 창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부른다. 그러나 전차 밖에서는 그 소리가 들릴 리 없다. ‘라라’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앞만 보고 걷는다. ‘지바고’는 창을 두드리며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지만 마찬가지다.
지병이 있던 ‘지바고’는 마침내 기침이 발작하고 각혈까지 한다. 그러나 전차는 ‘지바고’의 절박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지런히 가고만 있다. 겨우 기침을 진정시킨 ‘지바고’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달려가지만 ‘라라’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열리지 않는 창, 나갈 수 없고, 손도 닿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지옥의 창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애증(愛憎)의 창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비 내리는 장면이 많다. ‘록 허드슨’은 최전선에 배치된 군인이었고 ‘제니퍼 존스’는 야전병원의 간호사였다. 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전장의 군인은 수시로 이동해야 하기에 두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생과 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장의 애틋한 사랑. 두 사람이 이별의 키스를 나눌 때엔 늘 창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에 부딪혀 흐르는 빗물은 두 남녀의 눈물이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창도 있었다. ‘이브 몽탕’과 ‘아누크 에메’, ‘캔디스 버겐’이 나왔던 「파리의 정사」라는 영화였다. 중년의 ‘이브 몽탕’은 방송국의 프로듀서였다. 그는 젊은 여배우 ‘캔디스 버겐’과 불륜에 빠진다. 자연, 부부 사이는 멀어졌고 마침내 별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영원히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캔디스 버겐’은 떠나고 ‘이브 몽탕’은 혼자가 된다.
연말의 어느 날 밤, 파티가 열리는 별장에서 전처 ‘아누크 에메’와 우연히 마주치지만 두 사람은 소원할 뿐이다. 시끌벅적한 파티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이브 몽탕’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별장을 나선다.
밖에는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이브 몽탕’은 자신의 승용차 앞 유리창에 쌓인 눈을 손으로 걷어 낸다.
눈이 걷힌 승용차 속에는 놀랍게도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다소곳이 운전석 옆에 앉은 여인은 그의 아내 ‘아누크 에메’였다. 미움도 창속에서는 따뜻한 사랑으로 피어날 듯.
깨어지는 창
서부영화에서는 깨어지는 창이 많이 나온다. ‘존 포드’, ‘하워드 혹스’, ‘존 스타제스’ 같은 감독이 만든 서부극에 많이 나온다.
난투극이 벌어진 선술집, 맞아서 나둥그러지는 사내들이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곤 했다. 거구의 사나이 ‘존 웨인’에게 걸렸다하면 영락없이 유리창이 박살났다. 서부극엔 총소리와 함께 둥둥둥 북소리와 말발굽소리가 있어서 좋았지만 무엇보다 ‘쨍그랑’하는 유리창의 파열음이 있어서 좋았다.
이에 반해 창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다. 하늘의 달이 어찌하여 붉은 달이 되었을까. ‘찰스 브론스’이 나왔던 「레드 문」 에서의 창은 핏빛으로 물든 끔찍한 창이었다.
외딴집으로 침입자들이 몰려온다. 침입자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창뿐이다. ‘찰스 브론슨’은 필사적으로 창을 사수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싸움은 날이 밝아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반가운 손님만 오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지 않은 침입자도 오고 있다.
첫댓글 다양한 창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주인공들의 이름과 속의 창을 어찌 그렇게
기억하고 계시는 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