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펄스베이(Repulse Bay)의 여인/ 신현식
의외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그곳을 방문한 고객으로부터 오래 전에 홍콩에서 만났던 그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홍콩의 한 교포 여인이 가이드를 시작으로 여행사를 인수하고 지금은 중국에 골프장을 세 개나 가진 큰 사업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십대 초반이었을 때, 산업시찰단에 끼어 동남아 여러 나라를 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홍콩이었다. 황혼 무렵에 카이탁 공항에 내리니 코트라 직원들과 여행사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뜻밖에 미모의 아가씨였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에 타이트한 감색 정장차림의 매혹적인 커리어 우먼이었다.
이튿날은 산업 현장을 돌아보고, 다음날부터는 관광을 나섰다. 질문이 많은 나는 버스의 맨 앞자리 가이드 옆에 앉기를 잘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시내 관광과 해상공원을 둘러본 후 산정(山頂)의 빅토리아파크에 올랐다가 리펄스베이를 향해 내려갔다.
꼬불꼬불한 산길은 30분 정도를 내려가야 했다. 차창 밖으로 알파벳 U자 모양의 아름다운 리펄스베이가 한눈에 들어왔다. 푸른 만(灣)을 보는 순간 감회가 새로웠다. 그곳이 바로 영화 「모정(慕情)」의 촬영지이기 대문이었다.
리펄스베이는 신문이나 책에서 많이 소개된 곳이다. 외국 관광객들은 이 촬영지를 보기 위해 홍콩에 온다고도 한다. 그러나 가이드는 버스가 해변에 닿도록 소개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며 가이드에게 「모정」이라는 영화를 모르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 영화 보았느냐고 되물었다.
영화 「모정」은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이었다. 두 남녀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고, 남자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종군 기자로 파견 되고 여자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애절한 로맨스 영화였다.
영화의 종반부는 ‘제니퍼 존스’가 매일 같이 그들이 즐겨 찾았던 병원 뒤의 언덕에 올라 리펄스베이를 내려다본다. 그 남자가 타고 돌아올 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주제곡이 울려 퍼진다. 올드 팬들은 애처롭고 아름다운 그 장면을 잊지 않고 있다.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받은 주제곡은 ‘사랑은 아름다워’라는 곡으로 시작부터 강하고 높은 음이어서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맛이 있다. 그래서 그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학창시절에 여학생들 앞에서 불러 봤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클래식한 분위기여서 따분할 수도 있지만 노래실력이 신통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변 관광지를 둘러보는 사이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모를 따라 홍콩에 오게 된 사연에서 언젠가는 여행사의 오너가 되는 게 꿈이라는 이야기도 했다. 대화를 오래하다 보니 뜻이 맞아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녀도 「모정」을 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왜 소개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한국 관광객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 소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도 좋지만 주제곡이 너무 좋아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수백 번 노래를 연습한 시시콜콜 얘기까지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이번에는 리펄스베이를 뒤로하고 되돌아가야 했다. 버스가 오르막을 한참 오를 때쯤 가이드가 일어서서 영화 「모정」의 촬영지가 이곳이라는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 버스에 영화 「모정」의 주제곡 ‘사랑은 아름다워’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 한분 계십니다. 우리 그분을 모셔서 멋진 노래를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요?”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제대로 한 번 불러보지 못한 노래가 아니던가? 노래의 현장 바로 그 곳에서 한번 불러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싶었다. 마이크를 잡고 일어서니 창밖으로 햇빛 쏟아지는 푸른 리펄스베이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고, ‘윌리엄 홀든’과 ‘제니퍼 존스’의 수영하는 모습이 비쳐졌다.
나는 바로 영화 속의 ‘윌리엄 홀든’이 되었고 그녀는 ‘제니퍼 존스’가 되었다. ‘윌리엄 홀든’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홍콩에 올 수 없는 처지이다. ‘제니퍼 존스’는 언덕 위에서 푸른 바다만 바라보며 기다릴 것이다. 창밖의 리펄스베이에 ‘Love is many splendored thing’의 전주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사랑은 아름다워라- /봄빛 머금은 / 4월의 장미여 / 꿈꾸듯 다가온 그대 / 내 삶의 모든 것 / 포근히 감싸 주던 그대 / 바람 부는 언덕에서 / 그대 품에 안겨 / 나눈던 입맞춤 / 한없이 가슴 부풀었던 / 그대 굼의 속삭임 / 아- 아름다운 사랑이여
노래가 끝나자 버스 안의 일행들이 환호해 주었다. 그녀도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다음부터는 영화 「모정」은 물론이요 주제곡을 멋있게 부른 로맨티스트까지 잊지 않고 소개하겠다고 했다. 다시 홍콩에 오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며 명함까지 건네 주었다.
해방감을 만끽한 여행자의 일탈이었을까. 잠시 실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윌리엄 홀든’처럼 다시 홍콩에 가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삼십여 년이 지난 오늘 홍콩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분이 말하는 성공한 사업가는 포부가 야무졌던 그녀가 틀림없을 것이다.
첫댓글 모정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노래 들으면서 제니퍼 존스가 홀로 바람부는 언덕에 있는 모습이 짠하네요.
좋은 수필 감상하고 덕분에 '사랑은 아름다워러라 주제곡' 까지 잘 듣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