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별곡(南溪別曲) / 신현식
허리가 지근지근 저려온다. 풀을 한나절이나 뽑았더니 몸이 먼저 알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한식날이면 늘 부모님 산소에 들러 이렇게 풀을 뽑는다. 잠시 허리를 펴고 산 아래의 공원을 굽어본다. 공원에는 벚꽃이 만발하여 화사하기 그지없다. 벚꽃 그늘에는 몇몇 상춘객들이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곳은 경북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에 위치한 ‘시묘산’인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종중의 산으로 부모님과 윗대 어른들이 모두 이곳에 계신다.
지금 서 있는 부모님 산소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저수지가 저만치 보이고, 흘러 넘치는 물은 남쪽 계곡을 따라 면소재지의 중심부로 흐른다. 풍광으로나 지세로나 명당임에 틀림없다.
이곳에 계시는 가장 윗대의 할아버지는 ‘통제사공(統制使公) 신유 장군’이시다. 할아버지는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신숭겸)’의 23세손이시고, 나의 10대조이시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인 ‘숭무사(崇武祠)’는 ‘신유 장군 유적지’로 경상북도 문화제 38호로 지정되어있다.
‘통제사공’께서는 이곳 약목에서 태어나셔서 인조 23년(1645)에 무과에 등과하셨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시작하여 두루 무직을 거쳐 함경북도 병마우후(兵馬虞後)로 있을 때 효종 임금님의 명에 의하여 200여 명의 조총병을 이끌고 멀고도 먼 흑룡강까지 출병하셨다.
그 당시, 청나라는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의 침탈에 패전을 거듭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러시아군 270명을 사살하고 수십 척의 전함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셨다. 그에 반하여 휘하의 전사자는 단 7명뿐이었으니 혁혁한 전과였고, 할아버지의 출병이 단군 이래 첫 파병이 되는 셈이다. 할아버지는 이 전투를 「북정록」이라는 난중일기로 남기셨다.
효종은 이제 청나라도 우리를 만만히 보지 않을 거라며 기뻐하셨고, 할아버지는 이 공으로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되셨다.
할아버지는 후일 황해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를 두루 거쳐 포도대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셨다.
그 할아버지의 둘째 아드님이 ‘남계공(南溪公)’으로 나의 9대 조이시다. 할아버지는 부친과 종형(정주목사)이 관직에 나아가셨기에 과거에 급제를 했지만 자신마저 관직으로 나아갈 수 없다며 고향을 지키셨다.
‘남계공’ 할아버지는 어느 분보다 가문에 공이 많으신 분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국토가 초토화 되어 조상의 묘소 또한 소실된 적이 있었다. 이것을 안타까워하시던 할아버지는 경기도까지 도보로 가서 몇 달을 헤맨 끝에 가문의 파조이신 ‘제정공(齊靖公)’의 묘소를 찾으신 분이시다.
할아버지가 약목 중심지의 지명인 ‘남계(南溪)’ 를 시호로 받으신 것을 보면 그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아드님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고 그 이후로는 모두 성균관 진사에 머무르고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내 증조부께서는 ‘봉강’이라는 택호를 쓰셨는데 약목종중의 종무를 오랫동안 보셨다. 성격이 호방하시고 풍류가 대단한 분이셨다. 증조부께서는 내가 대여섯 살 즈음에 돌아가셨으니 장수를 한 셈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나를 지종손이라며 무척 아끼셨다. 내가 가면 늘 무릎에 앉히고 벽장에서 곶감과 사탕을 내어 주시고 꼭 겸상을 차리라고 하셨다.
증조부는 슬하에 삼남 이녀를 두셨는데 삼형제가 모두 인물이 출중하셨다. 그 중 나의 조부님은 두뇌도 명석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문물에 일찌감치 눈을 뜨고 글을 익혀 고향을 떠나오셨다. 홀홀단신 김천으로 나오셔서 누에고치 검사와 수매를 하시어 재산을 일구셨다고 한다.
조부님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김천에 자그마한 집을 한 칸 마련하고 고향의 식솔들을 모두 불러 들였다고 한다. 조모께서는 살아생전에 늘 조부의 공을 말씀하셨다.
“너희 조부가 종조부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이만큼 집안을 일으키지는 못했을 거다.”
종조부들은 도시로 나와 기술을 익히고 각 방면으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셨다. 그러니까 조부님은 몰락하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신 개척자인 셈이다. 그러나 조부께서는 어린 자식들(이남일녀)을 두고 그만 병사 하시고 말았다.
부친은 어려서 상을 당했으므로 숙부님 밑에서 성장을 했다. 초등교육을 마치고 진학하려 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한 동안 방황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은 늘 자신을 거두어 주신 숙부님께 감사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조모님은 서운함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을 잃자, 잡안 살림의 주도권을 종조모님께 넘겨야 했기에 자식의 방황을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으니 어찌 서운함이 없었겠는가.
조실부모한 부친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기술을 익혀 생활전선으로 나아가야 했다. 워낙 성실 근면하셨기에 우리 오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남들보다 뒤쳐지지 않게 가르치셨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에서 흙을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어 밭을 일구신 셈이다.
땀을 닦고 다시 풀을 뽑는다. 이 산소는 부모님과 종숙님 내외분을 나란히 모시고자 조성해 놓았던 자리였다. 원래는 봉분을 세우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원하신 대로 화장을 하여 평장을 했다. 평지에 널따랗게 잔디를 깔아 놓으니 공원처럼 아늑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조성을 하니 자연도 훼손하지 않고 주위 경관과도 잘 어우러진다. 뿐인가, 관리도 수월할 뿐더러 흩어진 자손들도 때때로 날을 잡아 소풍을 즐기다 간다.
이 묘소를 만들고 나서는 마음이 든든하고 편안했다. 내가 올 곳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섭리대로 이곳에 오겠지만 후일 조상님들을 만나 뵈올 면목은 없다. 사람이 못나 가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친께서 일구신 밭에 그저 씨만 뿌린 꼴이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이루지 못한 업은 자손들이 이루리라 믿는다.
누구나 가야하는 곳, 이왕이면 꽃이 바다를 이루는 곳이라면 좋을 것이다. 바로 이 남계(南溪)가 그곳이 아닌가 한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공원을 뒤덮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훌륭한 조상님들과 함께 쉬게 되니 이 또한 영광이 아닌가.
산에는 조상님들의 강한 기운이, 남계(南溪)에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를 것이다. 공원에는 개화 만발할 것이고, 인적(人跡) 또한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화기 만당하고 수려한 경관 속에서 새소리, 바람소리, 구름과 벗하며 한유(閑遊)하리라.
첫댓글
교수님의 가문이 대단하시네요. 저희들은 영천 경산 부산을 떠돌다 대구로 오다 보니 유대인처럼 방랑객 신세가
되었습니다. 문중산이 영천 자양에 있긴 하지만 제가 갈 곳은 없어 아쉬움이 많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한국 수필 문단의 거장으로 용학도서관에서 많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니 충분히 조상님을
뵐 자격이 있습니다. 가문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부러운 집안을 접하내요.
귀공자 같으신 외모에서 풍기는 여유로움을 더하시는군요.
부모님들의 부지런한 수고로움의 엷매를 맛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묘사된 평화로운 시골을 그리게 해 주셨내요
왕대밭이로군요. 튼실한 뿌리를
잘 관리하시느라 희생도 마다않는
열정에 존중과 행복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