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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
가을의 노래
깊은 밤 풀벌레 소리와 나뿐이로다
시냇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어두움을 저어 시냇물처럼 저렇게 떨며
흐느끼는 풀벌레 소리……
쓸쓸한 마음을 몰고 간다
빗방울처럼 이었는 슬픔의 나라
후원(後園)을 돌아가며 잦아지게 운다
오로지 하나의 길 위
뉘가 밤을 절망(絶望)이라 하였나
말긋말긋 푸른 별들의 눈짓
풀잎에 바람
살아 있기에
밤이 오고
동이 트고
하루가 오가는 다시 가을밤
외로운 그림자는 서성거린다
찬 이슬밭엔 찬 이슬에 젖고
언덕에 오르면 언덕
허전한 수풀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등불을 죽이고 침실(寢室)에 누워
호젓한 꿈 태양(太陽)처럼 지닌다
허술한
허술한
풀벌레와 그림자와 가을밤.
싸락눈, 삼애사, 1969
감새
감새
감꽃 속에 살아라
주렁주렁
감꽃 달고
곤두박질 살아라
동네 아이들
동네서 팽이 치듯
동네 아이들
동네서 구슬 치듯
감꽃
노을 속에 살아라
머뭇머뭇 살아라
감꽃 마슬의
외따른 번지 위해
감꽃 마슬의
조각보 하늘 위해
그림 없는
액자 속에 살아라
감꽃
주렁주렁 달고
감새,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강아지풀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驛) 구
내(構內) 모퉁이 어메는 노
오란 아베도 노란 화
물(貨物)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
마른 침목(枕木)은 싫어 삐
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
리는 동네로 다시 이
사 간다. 다 두고 이
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喪輿) 소
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아지풀, 민음사, 1975
건들 장마
건들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白髮)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싸락눈, 삼애사, 1969
겨울산(山)
나는 소금
좌판(坐板) 위 주발이다
장날 폭설이다
지게 목발이다
헤쳐도 헤쳐도
산(山), 고드름의
저문 산(山)
새발 심지의
등잔(燈盞).
아지풀, 민음사, 1975
고추잠자리
비잉 비잉 돈다
어릴 때 하늘이
물빛 대싸리 위에만
뜨던 고추잠자리떼
하늘이
알몸에 고여
빙빙빙 돈다
부질없는 이 오후(午後)의 열(熱)
늦은 시간(時間)이 내의(內衣)를 적신다.
싸락눈, 삼애사, 1969
곰팡이
진실(眞實)은
진실(眞實)은
지금 잠자는 곰팡이뿐이다
지금 잠자는 곰팡이뿐이다
누룩 속에서
광 속에서
명정(酩酊)만을 위해
오오직
어둠 속에서
……
거꾸로 매달려
먼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구절초(九節草)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귀울림
호박잎
하눌타리 자락
짓이기고
황소떼 몰린
물구나무 선
동구(洞口)
(아삼한 곡성(哭聲))
아, 추수도 끝난
가을 한철
저물녘
논배미
물꼬에 뜬
우렁 껍질의
귀울림.
아지풀, 민음사, 1975
그늘이 흐르듯
오월(五月)은,
초록
비 젖어
허전한
SPELL
가슴에,
밀려
일찍
없었던 맘.
물에
그늘이 흐르듯
흐르는 그리움,
아 오월(五月)은
외로운
SPELL,
비로 엮는
가슴.
생각다 생각해
부식(腐蝕)하는
영상(映像).
싸락눈, 삼애사, 1969
그 봄비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아지풀, 민음사, 1975
낙차(落差)
꼬이고 꼬인 등(藤)나무 등걸
깨진 고령토 화분(花盆)
삿갓머리 씌운 배추 움
떠받친 빨랫줄
지연(紙鳶)낚던 손
빛 바랜 숙근초(宿根草)
서릿발 내린 사면(斜面)
복판에 이마 부비며 피는 마을 사람들
저수지(貯水池)의 물안개
비탈에 지던 낙차(落差)
아지풀, 민음사, 1975
둘레
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들판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래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아지풀, 민음사, 1975
땅
나 하나
나 하나뿐 생각했을 때
멀리 끝까지 달려갔다 무너져 돌아온다
어슴푸레 등피(燈皮)처럼 흐리는 황혼(黃昏)
나 하나
나 하나만도 아니랬을 때
머리 위에
은하
우러러 항시 나는 엎드려 우는 건가
언제까지나 작별(作別)을 아니 생각할 수는 없고
다시 기다리는 위치(位置)에선 오늘이 서려
아득히 어긋남을 이어오는 고요한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지워
찬연히 쏟아지는 빛을 주워 모은다.
싸락눈, 삼애사, 1969
먹감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먼 바다
마을로 기우는
언덕, 머흐는
구름에
낮게 낮게
지붕밑 드리우는
종소리에
돛을 올려라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마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모일(某日)
□ 1
쌀 씻는 소리에
눈물 머금는 미명(未明)
봉선화야
기껍던 일
그 저런 일.
□ 2
노랗게 물든 미루나무 길섶 먼
고향길 해야 지는가
아버지
어머니
같은 사람들
느릿느릿 뒷짐 지르고 가는
모과(木瓜)빛 물든 길섶을 해야 지는가
□ 3
들깨 냄새가 나는 울안
골마루 끝에 매미 울음 스몄는가
목을 늘여
먹던 금계랍의 쓴 맛.
싸락눈, 삼애사, 1969
물기 머금 풍경 2
반쯤 들창 열고 본다.
드문드문 상고머리 솔밭
넘어가는 누런 해
반쯤만 본다.
잉잉 우는 전신주
귀퉁이에 매달린 연 꼬리
아슬히 비낀 소년의 꿈도
반의 반쯤만 본다.
비가 올 것인가.
눈이 올 것이다.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미닫이에 얼비쳐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버드나무 길
맘 천근 시름겨울 때
천근 맘 시름겨울 때
마른 논에 고인 물
보러 가자.
고인 물에 얼비치는
쑥부쟁이
염소 한 마리
몇 점의 구름
홍안(紅顔)의 소년(少年) 같이
보러 가자.
함지박 아낙네 지나가고
어지러이 메까치 우짖는 버드나무
길.
마른 논에 고인 물.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별리(別離)
노을 속에 손을 들고 있었다, 도라지빛.
―그리고 아무말도 없었다.
손 끝에 방울새는 울고 있었다.
아지풀, 민음사, 1975
불도둑
하늘가에
내리는
황소떼를 보다
흐르는 흐르는
피보래의
눈물을 보다
불도둑
흉벽(胸壁)에
울리는 채찍
―산 자(者)의 권리는 너무 많구나.
아지풀, 민음사, 1975
불티
가을에 피는 꽃
겨울에도 핀다
할매가 지피고 돌
이가 지피고 노을
이 지피는 쇠죽가
마 아궁이, 아궁이
불 시새우는 불티
같은 사랑. 사랑사
겨울에 피는 가을
사르비아!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산견(散見)
해종일 보리 타는
밀 타는 바람
논귀마다 글썽
개구리 울음
아 숲이 없는 산(山)에 와
뻐꾹새 울음
낙타(駱駝)의 등 기복(起伏) 이는 구릉(丘陵)
먼 오디빛 망각(忘却).
싸락눈, 삼애사, 1968
삼동(三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불빛이여 늦은 저녁
상(床) 치우는 달그락 소리여 비우고 씻는 그릇 소리여
어디선가 가랑잎 지는 소리여 밤이여 섧은 잔(盞)이여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새어나는 아슴한 불빛이여.
싸락눈, 삼애사, 1969
상치꽃 아욱꽃
상치꽃은
상치 대궁만큼 웃네.
아욱꽃은
아욱 대궁만큼
잔 한잔 비우고
잔 비우고
배꼽
내놓고 웃네.
이끼 낀
돌담
아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다는
시인의 이름
잊었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샘터
샘바닥에
걸린 하현(下弦)
얼음을 뜨네
살얼음 속에
동동 비치는 두부며
콩나물
삼십원어치 아침
동전(銅錢) 몇 닢의 출범(出帆)
― 지느러미의 무게
구숫한 하루
아깃한 하루
쪽박으로
뜨네.
아지풀, 민음사, 1975
서산(西山)&
상칫단
아욱단 씻는
개구리 울음 오리(五里) 안팎에
보릿짚
호밀짚 씹는
일락서산(日落西山)에 개구리 울음.
아지풀, 민음사, 1975
소감(小感)
한뼘데기 논밭이라 할 일도 없어, 흥부도 흥얼흥얼 문풍지 바르면 흥부네 문턱은 햇살이 한말.
파랭이꽃 몇 송이 아무렇게 따서 문고리 문살에 무늬 놓으면 흥부네 몽당비 햇살이 열 말.
아지풀, 민음사, 1975
소나기
누웠는 사람보다 앉았는 사람 앉았는 사람보다 섰는 사람 섰는 사람보다 걷는 사람 혼자 걷는 사람보다 송아지 두, 세 마리 앞세우고 소나기에 쫓기는 사람.
아지풀, 민음사, 1975
쇠죽가마
솔개 그림자
스치는
행정(杏亭) 마슬
그대
팔꿈치로
그리는
소금쟁이
잠자리 아재비
물방개
지우고 지우고
그대
발꿈치로
그리는
엉겅퀴
도깨비 바늘
괭이풀
지우고 지우고
오 그대
가장 뜨거운
입김으로
그리는
쇠죽가마
불씨
하나뿐인 젊음
하나뿐인 노래.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시락죽
바닥 난 통파
움 속의 강설(降雪)
꼭두새벽부터
강설(降雪)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목수건(木手巾).
아지풀, 민음사, 1975
앵두, 살구꽃 피면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보리바람에
고뿔 들릴세라
황새목 둘러주던
외할머니 목수건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엉겅퀴
잎새를 따 물고 돌아서잔다
이토록 갈피없이 흔들리는 옷자락
몇 발자국 안에서 그날
엷은 웃음살마저 번져도
그리운 이 지금은 너무 멀리 있다
어쩌면 오직 너 하나만을 위해
기운 피곤이 보랏빛 흥분이 되어
슬리는 저 능선
함부로 폈다
목놓아 진다.
싸락눈, 삼애사, 1969
연시(軟柿)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柿)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아지풀, 민음사, 1975
연지빛 반달형(型)
미풍 사운대는 반달형(型) 터널을 만들자. 찔레넝쿨 터널을. 모내기 다랑이에 비치던 얼굴, 찔레.
폐수(廢水)가 흐르는 길, 하루 삼부교대의 여공(女工)들이 봇물 쏟아지듯 쏟아져 나오는 시멘트 담벼락.
밋밋한 담벼락 아니라, 유리쪽 가시철망 아니라, 삼삼한 찔레넝쿨 터널을 만들자, 오솔길인 양.
산머루같이 까만 눈, 더러는 핏기 가신 볼, 갈래머리 단발머리도 섞인 하루 삼부교대의 암펄들아
너희들 고향은 어디? 뻐꾹 뻐꾹 소리 따라 감꽃 지는 곳, 감자알은 아직 애리고 오디 또한 잎에 가려 떨떠름한
슬픔도 꿈인 양 흐르는 너희들, 고향 하늘 보이도록. 목덜미, 발꿈치에도 찔레 향기 묻히도록.
연지빛 반달형(型) 터널을 만들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열사흘
부엉이
은모래
한 짐 부리고
부헝 부헝
부여 무량사
부우헝
열사흘
부엉이
은모래
두 짐 부리고
부헝 부헝
서해 외연도
부우헝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엽서(葉書)&
들판에
차오르는
배추
보러 가리
길이
언덕
넘는 것
가다가
단풍
미류(美柳)나무버섯 따라가리.
싸락눈, 삼애사, 1969
오류동(五柳洞)의 동전(銅錢)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坐板)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 밑 조롱(鳥籠)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輪廻)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五柳洞)의 동전(銅錢).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요령
보리 깜부기
점점이
익는
갈기머리
늙은
등성
까치집 하나,
아스라이 둘
우러러
흰 수염이
불어예는
풀피리 끝
환(幻)이
풀리는 쌍무지개
솟구치는 상무 상무 잿불 꼬리 감기는 열두발 상무
가난이 푸르게
눈자위마다
밀리는
상둣군 요령(鈴)
아지풀, 민음사, 1975
울안
탱자울에 스치는 새떼
기왓골에 마른 풀
놋대야의 진눈깨비
일찍 횃대에 오른 레그호온
이웃집 아이 불러들이는 소리
해 지기 전 불 켠 울안.
아지풀, 민음사, 1975
울타리 밖
머리가 마늘쪽같이 생긴 고향의 소녀(少女)와
한여름을 알몸으로 사는 고향의 소년(少年)과
같이 낯이 설어도 사랑스러운 들길이 있다
그 길에 아지랑이가 피듯 태양이 타듯
제비가 날 듯 길을 따라 물이 흐르듯 그렇게
그렇게
천연(天然)히
울타리 밖에도 화초(花草)를 심는 마을이 있다
오래오래 잔광(殘光)이 부신 마을이 있다
밤이면 더 많이 별이 뜨는 마을이 있다.
싸락눈, 삼애사, 1969
월훈(月暈)
첩첩 산중(山中)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뚝, 그 너머 강(江)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老人)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우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老人)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유우(流寓) 1
강아지 밥 주고 나니 머리 위 반딧불 떴어라 시비(柴扉) 닫고 멍석머리 모깃불 놓으면 깜박깜박 저만큼 또 반딧불 초롱.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유우(流寓) 2
잿마루
어느 굽이
눈이라도
오는가
유난히 밝은
자작나무 밑둥
물푸레나무
일각(一角)
오오 고삐에
서리는 서리는
황소의
입김
황황히
흩어지는
새떼의
행방(行方)
잿마루
삼십리
눈이라도
오는가.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은버들 몇 잎
스치는 한점 바람에도 갈피 없이 설레는 은버들 몇 잎을 따서 물에 띄우면 언제나 고향은 토담의 달무리. 콩꽃에 맺히는 콩꼬투리랑 절로 벙그는 목화다래랑. 아아 잔물결 잔물결 치듯 속절없이 설레는 강가 은버들.
□ *
아우야, 휘청휘청 서(西)녘 바람 따르면 상수리숲 상수리 아람 불가.
아우야, 휘청휘청 동(東)녘 바람 따르면 밤나무숲 밤송이 아람 불가.
비치는 쌈짓골, 비치는 비녀산(山). 아침 이슬 털면 아람 불가. 아롱다롱 가을에 아우야.
□ *
귀뚜라미 정강이 시린 백로(白露).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음화(陰畵)
몽당연필이 촘촘 그리는 낙엽, 서리, 서릿발의 입김. 땅재주 넘는 난장이. 불방망이 돌아 접시의 낙하(落下). 말발굽 소리. 촘촘 창틀에 그리는 새, 홍시, 홍시의 꼭지. 어려라. 콧등이 하얀 원숭이.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자화상(自畵像) 3
살아 무엇하리
살아서 무엇하리
죽어
죽어 또한 무엇하리
겨울 꽝꽝나무
꽝꽝나무 열매
울타리 밑의
인연
진한 허망일랑
자욱자욱 묻고
`소한(小寒)에서
대한(大寒)사이'
가출(家出)하고 싶어라
싶어라.
먼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잔(盞)
가을은 어린 나무에도 단풍 들어
뜰에 산사자(山査子) 우연듯 붉은데
벗이여 남실남실 넘치는 잔
해후(邂逅)도 별리(別離)도 더불어 멀어졌는데
종이, 종이 울린다 시이소처럼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장대비
밖은 억수 같은 장대비
빗속에서 누군가 날
목놓아 부르는 소리에
한쪽 신발을 찾다 찾다
심야의 늪
목까지 빠져
허우적 허우적이다
지푸라기 한 올 들고
꿈을 깨다, 깨다.
상금(尙今)도 밖은
장대 같은 억수비
귓전에 맴도는
목놓은 소리
오오 이런 시간에 난
우, 우니라
상아(象牙)빛 채찍.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싸락눈, 삼애사, 1969
저물녘
지렁이 울음에
비스듬 문살에
반딧불 달자.
추풍령(秋風嶺) 넘는
아랫녘 체장수
쳇바퀴에도 달자,
가을 듣는
당나귀 갈기에도.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점 하나
꿈꾸는
아가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잠자는
아빠 눈 밑에 깨알
점 하나
샘가,
확독에
백년이 흘러
섬돌에 맨드라미
피는 날
맨드라미 꽃판에
깨알점
한 됫박
눈물받이 눈물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접분(接分)
청(靑)참외
속살과 속살의
아삼한 접분(接分)
그 가슴
동저고릿 바람으로
붉은 산(山)
오내리며
돌밭에
피던 아지랭이
상투잡이
머슴들
오오, 이제는
배나무
빈 가지에
걸리는 기러기.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제비꽃 2
수숫대 앙상한 육․이오의 하늘. 어쩌다 남루(襤褸)를 걸치고 내 먹이 위해, 반라(半裸)의 거리 변두리에 주둔한 미군부대의 차단한 병동(病棟), 한낱 사역부로 있을 때. 하루는 저물녘 동부전선에선가 후송해 온 나어린 이국병사(異國兵士). 그의 얄팍한 수첩(手帖) 갈피에서 본, 접힌 나비 모양의 꽃이파리 한 잎. 수줍은 듯 살포시 펼쳐보이든 떨리던 손의 꽃이파리 한 잎. 어쩌면 따를 가르는 포화 속에서도 그가 그린 건 한 점 풀꽃였던가. 어쩌면 자욱히 화약 냄새 걷히는 황토밭에서 문득 누이를 보았는가. 한 포기 제비꽃에 어린 날의 추억도. 흡사 하늘이 하나이듯. 그날의 차단한 병동(病棟), 흐릿한 야전침대 머리의 한 줄기 불빛, 연보라의 미소(微笑).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제비꽃&
부리 바알간 장 속의 새, 동트면 환상의 베틀 올라 금사(金絲), 은사(銀絲) 올올이 비단올만 뽑아냈지요, 오묘한 오묘한 가락으로.
난데없이 하루는 잉앗대는 동강, 깃털은 잉앗줄 부챗살에 튕겨 흩어지고 흩어지고, 천길 벼랑에 떨어지고, 영롱한 달빛도 다시 횃대에 걸리지 않았지요.
달밤의 생쥐, 허청바닥 찍찍 담벼락 긋더니, 포도나무 뿌리로 치닫더니, 자주 비누쪽 없어지더니.
아, 오늘은 대나뭇살 새장 걷힌 자리, 흰 제비꽃 놓였습니다.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종(鍾)소리
봄바람 속에 종(鍾)이 울리나니
꽃잎이 지나니
봄바람 속에 뫼에 올라 뫼를 나려
봄바람 속에 소나무밭으로 갔나니
소나무밭에서 기다렸나니
소나무밭엔 아무도 없었나니
봄바람 속에 종(鍾)이 울리나니
옛날도 지나니
싸락눈, 삼애사, 1969
참매미
어디선가
원목(原木) 켜는 소리
석양(夕陽)에
원목(原木) 켜는 소리
같은
참매미
오동나무
잎새에나
스몄는가
골마루
끝에나
스몄는가
누님의
반짇고리
골무만한
참매미.
백발의 꽃대궁, 문학예술사, 1980
천(千)의 산(山)
댕댕이 넝쿨,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 잔등에 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자르는
먼 삼십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 있네
빗물 고인 천(千)의 산(山)
겹겹이네.
아지풀, 민음사, 1975
첫눈&
눈이 온다 눈이 온다
담 너머 두세두세
마당가 마당개
담 너머로 컹컹
도깨비 가는지
`한숨만 참자'
낮도깨비 가는지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추일(秋日)
나직한
담
꽈리 부네요
귀에
가득
갈바람 이네요
흩어지는 흩어지는
기적(汽笛)
꽃씨뿐이네요.
싸락눈, 삼애사, 1969
취락(聚落)
감나무 밑 풋보
리 이삭이 비
치는 물병 점
심(點心) 광주리 밭
매러 간 고무신
둘레를 다지는
쑥국새 잦은목
반지름에 돋는
물집 썩은 뿌
리 두지면 흩
내리는 흰 개
미의 취락(聚落) 달
팽이 꽁무니에
팽팽한 낮이슬.
아지풀, 민음사, 1975
탁배기(濁盃器)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굴렁쇠 아이들의 달.
자치기 아이들의 달.
땅뺏기 아이들의 달.
공깃돌 아이들의 달.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달아, 달아
어느덧
반백(半白)이 된 달아.
수염이 까슬한 달아.
탁배기(濁盃器) 속 달아.
아지풀, 민음사, 1975
하관(下棺)&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뒹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下棺)
선상(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아지풀, 민음사, 1975
학(鶴)의 낙루(落淚)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일년 열두달 머뭇머뭇 골목을 누비며
삼백 예순날 머뭇머뭇 집집을 누비며
오오, 안스러운 시대(時代)의
마른 학(鶴)의 낙루(落淚)
슬픔은 모른다는 듯
기쁨은 모른다는 듯
구름 밖을 솟구쳐 날고
날다가
세상 억울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구차함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괴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세상 외로움을 하얀 무명올로 가리우자
먼 바다, 창작과비평사, 1984
한식(寒食)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철쭉꽃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부엉새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나그네 홀로 듣고 있다
계곡(溪谷)에 흐르는 물소리를
계곡(溪谷)이 홀로 듣고 있다
싸락눈, 삼애사, 1969
할매
손톱 발톱
하나만
깎고
연지 곤지
하나만
찍고
할매
안개 같은
울 할매
보리잠자리
밀잠자리 날개
옷 입고
풀줄기에
말려
늪가에
앉은
꽃의
그림자
같은 메꽃.
아지풀, 민음사, 1975
해바라기 단장(斷章)
해바라기 꽃판을
응시한다
삼베올로
삼베올로 꽃판에
잡히는 허망(虛妄)의
물집을 응시한다
한 잔(盞)
백주(白酒)에
무우오라기를
씹으며
세계(世界)의 끝까지
보일 듯한 날.
아지풀, 민음사, 1975
황토(黃土)길
낙엽(落葉) 진 오동나무 밑에서
우러러보는 비늘구름
한 권(卷) 책(冊)도 없이
저무는
황토(黃土)길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갔을까
맨 처음 이 길로 누가 넘어왔을까
쓸쓸한 흥분이 묻혀 있는 길
부서진 봉화대(烽火臺) 보이는 길
그날사 미음들레꽃은 피었으리
해바라기만큼한
푸른 별은 또 미음들레 송이 위에서
꽃등처럼 주렁주렁 돋아났으리
푸르다 못해 검던 밤하늘
빗방울처럼 부서지며 꽃등처럼
밝아오던 그 하늘
그날의 그날 별을 본 사람은
얼마나 놀랐으며 부시었으리
사면에 들리는 위엄(威嚴)도 없고
강(江) 언덕 갈대닢도 흔들리지 않았고
다만 먼 화산(火山) 터지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귀 대이고 있었으리
땅에 귀 대이고 있었으리.
싸락눈, 삼애사, 1969
첫댓글 제목만 읽어도 그리움에 눈물이 날것 같습니다
버드나우길 황토길 해바라기
구절초 골무만한 참매미 종소리 청참외 지렁이울음
장대비 은버들 몇잎~~~
옛생각이 마구마구 떠오릅니다^^
좋은 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