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Hasta la victoria siempre)
불굴의 혁명가 체 게바라
박구병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인간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를 위한 투쟁과 혁명이다!?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그들의 일부라고 느끼고 그들이 원하는 것, 그들이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나는 한 정부를 튼튼하게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전사이다. 미래? 사실 난 어디에 내 뼈를 묻게 될지 모른다. (1959년 1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I. 보헤미안에서 게릴라 전사로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1928-67). 아름다운 눈빛과 열정적인 혁명의지를 지닌 사나이 체 게바라의 본명이다. 체(che)는 에스파냐어로 친구, 벗을 뜻하며 호격(呼格)으로도 쓰인다.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었고, 무장투쟁을 통해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결국 1967년 10월 볼리비아의 산악 지대에서 체포, 사살된 천생 게릴라 전사였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게바라의 이론과 실천의 일치, 이타적인 자기희생과 대중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여'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McLaren: 3)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피살 이후 게바라는 보수적인 기존질서에 정면 도전한 1968년 서구 청년세대의 항거, 즉 오랫동안 잠잠하던 서구의 급진적 저항의식을 다시 일깨운 전범(典範)으로 환생했다. 서구 젊은이들의 흠모를 한껏 받은 몇몇 제3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게바라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1. 첫 여정: <<모터사이클 일기: 남아메리카 여행기>>
체 게바라는 1928년 6월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에서 태어났는데, 두 살 때부터 심한 기관지성 천식을 앓았다. 이 때문에 게바라는 194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로서의 삶을 준비했다. 하지만 스물 세 살 때 떠난 모터사이클 여행(1951년 12월-1952년 9월)은 그가 안락한 미래를 버리고 게릴라의 역정을 선택하는 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특히 페루의 광산지대에서 목격한 강제노동과 약 2주 동안 나환자촌에서 보낸 의료활동은 아르헨티나 중산층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그의 인식을 심화시켰다. 훗날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서 게바라는 이 여행이 자기 삶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다른 이들처럼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승리일 뿐이다. 나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돌아보면서 빈곤과 기아, 질병을 목격했는데, 그를 통해 유명한 학자가 되거나 중요한 의학적 기여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정 민중을 돕는 길이라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2. 헌신적인 혁명가의 탄생과 무장투쟁
게바라는 학업을 마치고 1953년 7월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볼리비아에선 1952년 혁명 이후 대중의 극심한 빈곤을 경감시키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혁명정부에게 실망을 느꼈다. 이로써 게바라는 페론주의와 볼리비아 혁명이라는 잘 알려진 두 가지 라틴아메리카의 개혁운동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Michaels, 24) 하지만 1953년 12월부터 게바라는 과테말라에서 ?민주청년동맹?에 가담하면서 새로운 인생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곧 그의 첫 번째 부인이 되는 페루의 좌파활동가 일다 가데아(Hilda Gadea)를 만나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깊이 탐독했고 1954년 6월 미국의 개입으로 중도좌파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an)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게바라는 분노에 찬 급진적 혁명가로 변신했다. 그는 ?양키 제국주의?를 비난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과두지배세력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Michaels: 25)
가데아와 함께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5년 7월 풀헨시오 바티스타 (Fulgencio Batista)의 친미 독재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그 동료들을 만났는데, 이 때 게바라는 의사 가운을 짙은 진한 올리브색 군복, 탄약통과 맞바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스트로는 쿠바 남동부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한 ?1953년 7월 26일 운동?의 지도자로서 당국에 체포된 뒤 ?역사는 나를 무죄로 선언하리라?(La historia me absolvera)는 유명한 최후 진술을 남긴 바 있었다.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동지가 된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80명의 게릴라 전사들과 함께 1956년 11월 25일 그란마(Granma) 호(號)를 타고 쿠바 해방을 위한 거보를 내딛었다.
II. 체 게바라와 쿠바혁명
1. 검은 베레모를 쓴 사나이의 <<게릴라 전쟁>>: 쿠바혁명의 두뇌
호기 있게 출발한 쿠바 해방의 길을 멀고도 험했다. 여러 명의 동료를 잃고 어렵사리 쿠바에 상륙한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동부의 마에스트라 산악지대에 무장투쟁의 거점(foco)을 마련하고 유격전술을 펼치는 동시에 의료와 교육 활동을 통해 서서히 농민층과 중간계급을 규합하려 했다. 1957년 2월 뉴욕타임스의 기자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hews)와 나눈 산중 인터뷰를 통해 저항세력은 국제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다. 사령관 체 게바라는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중부 라스 비야스 산악으로 진격하여 탁월한 전과를 올렸고 1958년 12월 산타클라라(Santa Clara)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바티스타 독재정권에 맞선 험난한 게릴라 전쟁은 1959년 1월 혁명 세력의 아바나 진입으로 끝을 맺었다.
이로써 아직 생존해 있는 카스트로 형제와 더불어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게릴라 지도자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무엇보다 기념비적인 저작 <<게릴라 전쟁>>(1960)을 통해 게바라는 당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재정권과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다. 이 교범에는 게릴라 전쟁의 본질과 기본 전략, 상황에 따른 전술 변화, 사회개혁가와 전사로서의 게릴라 대원의 태도와 조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게바라에 따르면 쿠바혁명은 아메리카 혁명의 진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했다. 첫째 대중 세력이 정규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 둘째 혁명을 위한 조건이 모두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봉기를 통해 혁명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셋째 자본주의적 발전의 낮은 단계에 있는 라틴아메리카에선 농촌 지역이 무장투쟁의 중요한 기반이라는 점이다. (Guevara, 1985: 47)
이렇듯 청년 게릴라 전사들이 이끈 쿠바혁명은 라틴아메리카의 저항운동에 가장 큰 영감을 불러일으킨 무장투쟁의 본보기였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본부 역할을 맡았듯이 쿠바는 ?반제국주의 혁명? 수출의 본거지가 되었다. 쿠바혁명은 1960년 일부 과테말라 군 장교들이 친미 정권에 맞서 향후 36년 간 기나긴 내전을 펼치는데 도화선을 제공했고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해방전선(1961)과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1979)의 결성에도 결정적인 자양분을 공급했다.
2. 새로운 쿠바의 건설
부패한 친미 독재자 바티스타를 축출한 뒤 혁명 세력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에 봉착했다. 새로운 쿠바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과연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혁명 정부는 첫 6개월 동안 재판을 통해 약 550명의 반혁명분자를 처단하고 토지개혁을 통해 외국인 소유를 금지하는 등 민족주의적 혁명의 면모를 과시했지만, 당초부터 '미국 반대'의 깃발을 치켜 든 것은 아니었다. 1959년 4월 최고 지도자 카스트로는 미국을 방문해서 아이젠하워와 닉슨 같은 고위층 인사들을 만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과 협정을 통해 1960년 중앙 계획기구(JUCEPLAN)를 창설하고 미국인 소유의 전기, 전화회사를 비롯한 여러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뚜렷한 냉전 대립 가운데 ?독수리 발톱? 아래에서 시도된 홀로 서기는 결국 사회주의 체제의 신속한 건설로 가닥이 잡혔다.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1960년 10월 아이젠하워 정부가 결정한 통상금지령(처음엔 식량과 의약품은 제외)은 혁명 쿠바에게 엄청난 시련을 던졌다. 1961년 1월 퇴임을 앞둔 아이젠하워는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1961년 4월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세력의 피그스 만(Bay of Pigs) 침공과 자칫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뻔한 1962년 10월 미사일 위기 등 일련의 숨가쁜 사건들이 펼쳐지면서 쿠바는 동?서 대립의 긴장이 흐르는 반미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게바라는 혁명 정부가 채 자리를 잡지 못한 시점에 전국농업개혁위원장(1959년 10월)과 중앙은행 총재(1959년 11월)라는 중책을 맡아 토지개혁과 농업자원 관리, 외환 보유고 통제, 은행과 기업의 국유화 등 주요 현안을 추진하면서 신속하게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미국의 무역 봉쇄 속에서 인민들이 겪게 될 경제적 곤경에 대해 설명한 뒤 1960년 10월 말부터 연말까지 에스파냐, 소련, 동유럽의 여러 나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순방하면서 혁명 쿠바의 생존에 필요한 신용 제공을 요청하고 설탕 수출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국과 단교한 뒤 1961년 2월 말 혁명 정부가 산업부를 창설했을 때 게바라는 그 책임자로서 여러 국영 기업을 관리하고, 산업화 4개년 계획을 지휘했다. (Taibo II: 319) 그는 무엇보다 ?설탕의 섬? 쿠바의 농업생산을 다변화하고 경공업을 육성하고자 했지만 미국의 봉쇄와 소련의 미흡한 지원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 중앙정보국의 한 요원에 따르면, 반(反)설탕 산업화 정책은 게바라의 ?최대 실패작?이었다. (Luther: 205) 어쩔 수 없이 혁명 정부는 1963년 다시 설탕 중심의 산업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1970년에 이르러 쿠바 정부는 결국 엄청난 목표량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으나 설탕 1,000만 톤 수확 운동(850만 톤 달성)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그동안 쿠바에서는 소규모 사업체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국유화가 이루어졌다.
게바라는 쿠바의 산업화에 대한 소련의 미온적 태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 일하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의 창출에 기여하지 못한 소련의 산업적 성공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했다. 게바라는 특히 물질적 보상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려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경제개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게바라의 이상은 다분히 그의 시대를 훨씬 앞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Michaels: 30-31) 흐루시초프가 실각한 후 1964년 11월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나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제도에 대해 반대한다. 그곳에선 가치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도 유고슬라비아의 자본주의화에 대해 경고했다. 흐루시초프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매우 흥미롭다고 말한 바 있으며 연구자를 파견하기도 했다.
사실 유고슬라비아의 흥미로운 일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훨씬 더 뚜렷하게 벌어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에선 수익이 나지 않는다고 공장 문을 닫는다. 집단 농업은 중단된 채 사적 토지소유제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은 그 선례를 따르려 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그 현실이란 서방 진영이 인민민주주의 체제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서방 진영에선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아니라 단지 피상적인 해답을 구할 뿐이기 때문인데, 그것은 시장을 강화하고, 가치의 법칙을 도입하고 물질적 동기를 자극하는 일이다.? 즉, 게바라는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 진영과의 경쟁에서 뒤쳐진 까닭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교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Castaneda: 270)
3. 자기희생의 화신 체 게바라: 사회주의 건설과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의 창출
게바라는 소련의 성공적인 산업화 전략이 ?제2의 미국 사회? 건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사회 전체를 위해 공헌하기보다는 이윤에 민감한 소련 인민들도 ?양키?와 다를 바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Michaels: 30) 그에 따르면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는 새로운 인간을 창출해야 한다. 1965년 그는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이라는 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경제적 강제와 물질적인 동기부여를 주요 수단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의 인간은 경제적 강제에 매이지 않을 것이고 대신 노동을 사회적 의무로 받아들일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형성을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공산주의적 교육, 자발적 노동, 사회적 의무로서의 직업 교육, 당의 모범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현실로서 물질적 장려를 완전히 반대하거나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그 역할은 부차적이고 점차 미미해질 것이다.? (Luther: 259)
임금 인상, 학교와 노조의 동원체제 정비, 의료혜택 확대, 문맹퇴치와 같은 혁명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쿠바 정부가 추진한 도덕적 장려 운동(1965)과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 캠페인(1966)은 사실상 게바라의 ?등록상표?였다. (Luther: 145) 이는 혁명투쟁에 참여했던 게릴라 전사들 사이에서 이미 자리잡은 영웅적인 자기 희생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칭송을 새로운 사회의 일상 활동에 적용하려는 것이었다. (Luther: 257) 게바라는 개인의 의식구조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적 심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가 새로운 사회체제와 인간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라고 보았다. (Petras: 15) 그리하여 그는 일상적 욕망이나 물질적 가치에서 벗어나 평등주의적 가치관과 상호존중에 기초한 책임감을 고취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게바라는 노력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구현에 앞장서고자 했다. 일요일에는 학교나 주택을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또한 서열과 위계를 철폐하려 노력했다. 지도자의 특권을 배격하고 관료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정당한 목표를 달성하려면 윤리적인 방법과 수단에 근거해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Petras: 17) 스스로에게 엄격한 윤리적 규율과 기준을 부과한 게바라는 게릴라전 도중에 만난 두 번째 부인 알레이다(Aleida March Torres)에게도 ?관용 승용차를 이용해선 안 된다, 버스를 타라?면서 쿠바의 여느 주부들처럼 내핍 생활에 적응하도록 권고했다. 게바라는 이곳 저곳 방문하면서 선물로 받은 각종 예술품과 전자제품들을 여러 지역의 청년 훈련 센터에 전달했다. 물론 그의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Castaneda: 236) 이렇듯 철저한 자기희생은 게바라에게 성자의 이미지를 선사하기도 했다. 반면 내핍생활과 동원체제에 부담을 느낀 여러 사람들은 탈출 행렬에 가세했다. 1959년 바티스타 정부 관계자 약 10,000명의 탈출을 기점으로 1960-62년에는 주로 전문직업인을 포함하여 약 25만 명의 중?상류층이 ?90마일 밖에 위치한? 미국으로 망명했고 1965-79년에는 무려 50만 명에 달하는 혁명 반대세력이나 경제적 궁핍에 지친 이들이 탈출 대열에 합류했다.
III. 다시 영웅적인 게릴라 전사로
1. 아프리카의 꿈: 체 게바라와 콩고의 혁명투쟁
게바라의 생애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대목은 아마도 안정적인 지위와 국제적인 명성을 뒤로 한 채 또다시 게릴라 전사의 길을 선택한 순간일 것이다. 성공한 혁명가 게바라는 왜 또다시 제3세계 투쟁의 현장, 콩고와 볼리비아의 게릴라 전쟁에 뛰어들었을까? 그의 말을 빌자면 제국주의적 침탈에 저항하는 ?제2, 제3, 아니 수많은 베트남?을 원했기 때문이다. (Dorfman: 114) 게바라는 자본주의의 팽창은 경제적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군사?사회적 현상이라고 인식했다. (Petras: 10) 그리하여 그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미시적 차원의 투쟁을 라틴아메리카, 나아가 제3세계 여러 곳에서 조직하고자 했던 것이다.
1964년 여름 고(故)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의 지지자들이 콩고의 중서부 지방에서 저항을 시작하자 게바라는 이를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파악했다. 그가 보기에 콩고의 수상 루뭄바의 피살과 모부투 장군의 등장은 미국과 옛 식민통치자의 개입이 빚어낸 결과였다. (Castaneda: 271) 1964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제19차 국제연합(UN) 총회에 쿠바 대표로 참석한 게바라는 예의 짙은 올리브색 군복을 입고 연단에 올라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꼭두각시 국가들을 비난했을 뿐 아니라 콩고의 사태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Casta?eda: 272, Luther: 185) 이를 통해 그는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연속혁명론)?을 연상시키는 혁명적 국제주의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Michaels: 34, Petras: 11) 그는 이미 전위 혁명가들은 매일매일 투쟁해야 하며 이는 전 세계에 걸쳐 혁명이 구축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하지만 더욱 직접적인 이유는 아무래도 소련과의 정책적 갈등 내지 카스트로와의 미묘한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Michaels: 31, 33) 앞서 지적한 대로 게바라는 물질적 보상을 골자로 한 소련의 경제개혁에 환멸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외교정책, 특히 미국과의 평화적 공존 전략과 라틴아메리카 게릴라 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지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게바라는 소련과 여타 혁명 세력 사이에는 자본주의 국가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게바라는 소련을 겨냥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무기를 판매용 물품의 하나로 봐서는 안 된다. 공동의 적을 겨누기 위해 그것이 필요한 나라에게 필요한 만큼 무상으로 공급해야 할 것이다.? (Michaels: 34) 1965년 2월 알제리에서 게바라는 소련이 ?서구 제국주의 세력과 암묵적으로 협력하면서? 제3세계를 착취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했는데, 소련 측도 그의 발언에 대해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Luther: 188)
이 사건은 게바라와 카스트로 사이에도 심각한 긴장을 야기한 듯 하다. 그 때문인지 쿠바 공산당의 지도자 블라스 로카는 게바라를 ?불화의 씨앗?이라고까지 말했다. (Michaels: 32) 게바라는 알제리 발언 직후 약 40시간에 걸쳐 카스트로와 만났는데, 지금까지도 이들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나중에 카스트로가 암시한 바에 따르면 게바라는 계속 혁명투쟁에 나서길 원했던 것 같다. 유추하건대 카스트로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혁명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다만 소련과 대립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게바라로선 카스트로의 불분명한 태도와 정치적 줄타기에 불만을 품었을 수도 있다. (Castaneda: 243) 최고 지도자 카스트로는 쿠바의 어디에서나 두드러진 존재였지만, 게바라는 현실적으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또 혁명의 동지 카스트로와는 결국 ?혼인도, 이혼도 아닌? 애매한 사이가 되어버렸음을 실감했고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Castaneda: 275) 어쨌든 마라톤 회합 끝에 산업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게바라는 이후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방랑의 혁명가 게바라는 쿠바인들에게 감사와 애정이 담긴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세상의 다른 나라? 콩고로 향했다. 그의 곁에는 약 150명 가량의 혁명수출의 역군들이 동행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 게바라는 쿠바 시민권을 반납하면서 쿠바와의 모든 법적 관계를 끊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혁명활동이 혹시 쿠바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염려에서 비롯되었다. 게바라는 빈곤과 압제의 땅 아프리카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었으나 곧 아프리카의 종족 간 분열과 갈등이 대단히 심각하기 때문에 통일된 투쟁 대오를 갖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1965년 4월부터 약 7개월 동안 게바라가 콩고에서 펼친 투쟁은 혼란스런 상황과 잘못된 작전, 로랑 카빌라(Laurent Kabila)가 이끄는 반란세력 내의 권력다툼, 말라리아와 각종 풍토병, 쿠바 전사들의 향수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Luther: 199)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게바라는 ?만일 내가 여기 없었더라면 이 아름다운 꿈은 이미 오래 전에 혼란 속에서 흩어져 버렸을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카스트로는 ?전멸을 피할 것?을 부탁했다.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게바라는 ?형제들을 용병의 손아귀에 놓아두고 수치스럽게 도망갈 수는 없다?고 밝혔지만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게바라는 탄자니아,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1966년 7월 극비리에 쿠바로 귀환했다. 완벽한 변장 덕분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2. 영원한 혁명가의 <<볼리비아 일기>>: 아메리카 대륙의 혁명을 위해
콩고에서 돌아온 게바라는 혁명투쟁의 근거지를 남아메리카의 볼리비아로 옮겼다. 무엇보다 볼리비아의 산악지대는 게릴라전에 알맞은 지형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인접국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고려할 때 내륙국가라는 점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달리 말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을 위한 전진기지로 손색이 없었다. 게바라는 평소 ?내 조국은 아메리카이다, 나는 쿠바 국민인 동시에 아르헨티나 인이며 누구보다 라틴아메리카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볼리비아에선 1964년부터 레네 바리엔토스(Rene Barrientos Ortuno)가 이끄는 군부정권이 득세했고 토착 저항세력이 미약하나마 이에 대해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었다.
우루과이, 페루, 볼리비아 인으로 위장한 게바라와 약 스무 명의 수행원들은 1966년 11월 초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에 게릴라 훈련시설을 세워 향후 장기적인 투쟁전략을 모색하는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본거지로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볼리비아 공산당은 소련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게바라의 활동을 크게 반기지 않았다. 공산당 총서기 마리오 몽헤(Mario Monje)는 심지어 게바라에게 볼리비아를 게릴라 투쟁의 중심지로 삼지 말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그저 게바라의 제1순위 혁명 후보국 아르헨티나로 가는 통로 역할만을 인정할 태세였다. (Castaneda: 244, Luther: 208) 그러나 게바라에겐 무기와 게릴라 전사, 지지세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게바라는 다시 한번 혁명을 꿈꾸는 게릴라 전사로서 헌신하면서 11개월 동안 자신의 경험을 소상히 기록했다. 1966년 11월 7일부터 살해되기 이틀 전인 1967년 10월 7일까지 기록한 이 <<볼리비아 일기>>는 볼리비아 군과의 전투나 심리전뿐만 아니라 산악지대 농민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노력, 비밀아지트의 건설, 대원들 사이의 갈등도 담고 있다. (고영일: 296) 일기 속에서 게바라는 혁명에 무관심한 대중에게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가엾은 볼리비아의 일개 병사를 쏘아야 한다는 인간적 고뇌를 조용히 내뱉기도 했다. 혁명의 대지 위에서 만난 삶에 찌든 농민들의 표정과 공허한 눈빛, 그리고 돈 몇 푼 때문에 게릴라 대원을 밀고하는 농민의 모습도 담아냈다. 또한 점점 상황이 나빠지면서 1967년 8월 29일 절망적인 논조로 기술했듯이, 정부군의 헬리콥터가 머리 위를 날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샌들을 신고 해발 2000미터 이상의 울창한 산악지대를 이동해야 하는 고통, 배고픔보다 더 괴로운 갈증,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천식, 정신착란 증세까지 겪는 악전고투의 상황을 생생하게 남겼다. (Taibo II: 535, 539)
1967년 5월부터 볼리비아 정부의 공세는 거세어졌다. 계엄령을 실시하고 게릴라 소탕작전을 강력하게 펼쳤던 것이다. 또한 쿠바의 선례와는 달리 산악지대의 원주민 농민들을 규합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게바라의 투쟁 전선에는 다시금 실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니 이번에는 더 큰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바라는 힘겨운 교전 끝에 미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군에게 체포된 뒤 곧 처형당했다. 1967년 10월 9일 오전 바예그란데(라파스에서 남동쪽으로 765km 지점) 군기지 부근 벽촌에서 진이 빠진 채 누워있던 이 혁명가는 총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볼리비아 정부는 관보를 통해 게바라가 게릴라 부대와 볼리비아 군 유격대가 벌인 치열한 교전 중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게바라의 시신을 확인한 영국의 맨체스터 가디언 지 기자 리처드 고트는 그의 피살에 미 중앙정보국 요원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보도했다. (McLaren: 5) 게바라의 죽음이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한 볼리비아 군은 그의 시신을 감췄고 화장했다는 허위보도와 함께 그의 잘린 두 손을 증거물로 공개했다.
이렇듯 쓸쓸하게 ?우리 시대 가장 완벽한 인간?은 혁명의 순교자 대열에 동참했다. 약 열흘 뒤 55,000명에 달하는 미국의 젊은이들은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모여 미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분노하며 조용히 머리를 숙인 채 게바라의 죽음을 애도했다. (Ryan: 162) 공식 추모행사가 전혀 없었던 모스크바에서 유일하게 열린 게바라 추도집회는 미국대사관 앞 파트리스 루뭄바 대학교에서 몇몇 라틴아메리카 출신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었다.
IV. 체 게바라의 환생
1. 하나의 전설: 불굴의 혁명가에서 모든 저항운동의 기수로
생전에 이미 세계적인 이목을 끈 ?살아있는 전설,? ?부패할 수 없는? 불굴의 혁명투사 게바라는 피살된 후 반제국주의 투쟁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Dorfman: 112) 나아가 다소간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넘어 모든 억압당한 자들과 저항세력의 희망과 신념의 상징이 되었다. 기존질서에 대한 청년층의 저항이 전 세계에 걸쳐 위세를 떨치던 1968년뿐만 아니라 그의 유해가 발견된 1997년에도 게바라는 투쟁의 현장 어느 곳에서나 가장 추앙 받는 인물이었다. 저항 세대는 게바라를 통해 제도화, 규격화에 대한 온갖 염증과 불만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병을 앓고 있었지만 영광스런 지위를 마다하고 낮은 곳에서 고귀한 이상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했던 그의 면면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성자와 같은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게바라의 시신이 공개되었을 때, 그의 눈은 투명하게 빛나고 자줏빛 입술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머금은 듯 보였다. 그 신비로운 얼굴에 매료된 바예그란데 여인들은 행운의 부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몰래 그의 머리카락을 뽑아내기도 했다. (Anderson: 742)
영웅적인 게릴라 전사?의 피살은 순교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특히 피살된 지 정확히 30년이 지나 1997년 6월말 바예그란데에서 발견된 그의 유해가 10월 ?혁명의 조국? 쿠바로 송환되었을 때 게바라는 다시 한번 우리 앞에 환생했다. 그의 환생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원기를 회복한 반공주의적 교화와 각종 신자유주의 축하연에 맞서 강력한 저항의 원천을 제공했다. 세계 질서의 수호자들이 자신 있게 상징적 승리를 선언하려 해도, 그들은 늘 게바라의 빛을 머금은 새벽 놀에 뜨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McLaren: 6-7) 카스트로는 회고록을 통해 게바라를 실패자로 보는 논리를 공박했다. ?체는 스스로 이 혁명에 참여한 병사라고 생각했다. 생존 여부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볼리비아의 투쟁 결과 체의 사상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런 단순한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위대한 혁명의 선구자들 역시 자신의 필생 과업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노라고 말할 것이다.? (McLaren: 1)
저항과 자유의 상징 게바라는 문화적 성상(聖像)으로서도 여전히 전 세계인에게 다양한 영감을 선사하고 있다. 별 계급장이 달린 검은 베레모를 쓴 게바라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멋진 ?1960년대의 반항적 혁명아?로서 심지어 제임스 딘과 동급의 대중스타, 패션 모델로 변신하기도 했다. (고영일, 287) 1990년대 명성을 떨친 미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레이지 어갠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리더 잭 데 라 로차(Zack de la Rocha)는 게바라의 모습이 새겨진 문양을 활용한 바 있다. (이원태: 244-245) 특히 1997년 서거 30주년을 정점으로 먼 나라까지 확산된 ?체 게바라 붐?은 머그컵, 스와치 시계, 티셔츠, 문신 가릴 것 없이 각종 게바라 상품을 등장시켰으며 잘 생긴 외모뿐 아니라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hasta la victoria para siempre!)?라는 그의 표어마저 상품화 과정에 밀어 넣었다. 게바라는 또한 감독 알란 파커(Alan Parker)를 통해 대형 뮤지컬 영화 <<에비타>>1996)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 에비타(마돈나 연기)는 영화 초반 조연 체 게바라(안토니오 반데라스 연기)의 해설을 통해 관객에게 소개된다.
2. 게바라의 유산과 식지 않는 인기의 비결
방랑자, 외교관, 게릴라 전사로서 곳곳을 누빈 게바라의 인생역정은 마치 한 편의 서사시를 보는 듯 하다. 1960년대 아메리카의 청년들은 양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거인 게바라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외쳤다. 하지만 한 세대가 흐른 뒤 게바라의 모습은 1960년대 청년들이 원했던 방식으로만 집단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실체적 다양성의 상실과 하나의 이미지로의 환원은 사실 모든 종류의 우상이나 상징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특히 게바라의 경우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를 둘러싼 몇몇 신화는 ?인간 체 게바라를 삼켜버렸다.? (Dorfman: 112) 신화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게바라의 존재를 옮기려면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더불어 실체의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게바라는 자유와 저항의 사도, 잘못된 길로 빠져든 반란자, 번뜩이는 지성을 갖춘 게릴라 철학자, 풍차를 향해 창을 겨누는 시인 전사, 폭력을 일삼는 보복의 천사, 변장한 대량 살인자, 광적인 테러리스트라는 한마디로 뭉뚱그릴 수 없는 상반되고도 복잡한 평가를 받아왔다. 급진좌파에게 게바라는 완벽한 게릴라 전사이자 만능의 성자였던 반면, 우파에겐 모든 죄인의 화신이다. (McLaren: 7) 일방적인 정치적 해석은 물론이거니와 게릴라 전사의 이미지를 통해 게바라를 바라보는 것은 그의 인생이 드러내는 전면적 특질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게바라는 게릴라 전술을 넘어서 다양한 사회적 환경에 적용될 수 있는 정치?사상적 유산을 남겼다. (Petras, 9) 특히 무장투쟁의 가능성이 크게 의문시되는 오늘날 우리는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게바라 붐이나 신드롬은 게바라를 혁명투쟁의 표상에서 저항문화의 초상으로 코드(code)를 변경시키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과연 이미지의 확대인가? 축소인가? 또는 ?두 번 죽이기?인가? 게바라의 상품화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의 역학관계나 강압과 종속으로 점철된 역사적 맥락은 도외시된 채 무늬만 채택하는 ?정신 없는 모방, 운동 없는 유행?의 양상을 띠고 있다. (강정석: 363) 그의 이론과 실천의 양태가 더 이상 실효성을 거두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게바라 개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고영일, 288) 그렇다면 고전적 의미의 혁명과는 거리가 먼 시대에 한 때 과격한 혁명가가 무장해제를 당한 셈인가? 그리하여 게바라는 가끔 그의 사고나 생활방식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집단의 수호성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 치카노(Chicano: 멕시코 계 미국인) 운동을 계급운동이 아니라 민족적 요소를 강조하는 부르주아 운동으로 파악하여 비판하기도 했지만, 언젠가 게바라는 그 라틴계 문화운동의 표상이 된 바 있다. 또한 1970년대 중엽 무렵 쿠바에서 동성애는 부르주아적 병폐로 취급되어 척결대상이 되었지만, 오늘날 게바라는 동성애자들의 지기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미지로든 죽은 게바라가 서구사회에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국경을 넘나들면서 많은 이들의 삶에 변화를 촉구하고 결코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며 인간 한계에 도전한 모험가에 대한 동경일까? (Dorfman, 114) 자기희생과 끝없는 대중에 대한 헌신, 부패할 수 없는 윤리적 인간의 표본, 철저한 공직자의 사표 체 게바라. 특히 요즘 현실 어느 구석에서도 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정말 ?불가능한 임무?일지 모른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 이기주의적 생존 전략, 현실론, 불가피론이 가득할 뿐이어서 그 가능성은 더욱 요원하게 느껴진다. 이런 시대에 게바라라는 이상주의의 화신에 주목하는 것은 거듭 원칙을 위반하고 순수를 비방하는 우리 부끄러운 현실주의자들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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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료]
피델에게
지금 이 시간 이런저런 상념이 떠오른다네, 자네를 마리아 안토니아 집에서 처음 만났던 때와 자네가 내게 자네 그룹에 합류하기를 청했을 때, 그리고 우리 여정을 준비하는 동안 느꼈던 팽팽한 긴장감에 대해, 우리 각자의 죽음을 대비해 누구에게 그 소식을 전해야 할 지 미리 말했을 때, 이 가능성은 갑자기 우리 모두에게 현실로 나타났지. 혁명에 동참할 때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라면 우리가 승리할 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현실 말일세. 실제로 수많은 동지들이 혁명에 목숨을 바치지 않았는가.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들이 덜 극적으로 보이네. 우리가 더욱 성숙했기 때문일테지만, 그러나 또한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쿠바 땅에 국한된 쿠바혁명에서 내 몫을 다했다는 느낌이네. 이제 나는 자네와, 동지들과, 그리고 이제는 내 것이기도 한 자네의 인민들과 작별하려 하네. 나는 내가 점하고 있는 당의 직책과 장관직과 사령관의 직위, 그리고 쿠바 시민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네. 이제 나와 쿠바를 잇는 어떤 법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네. 오직 공문서 따위로는 파괴될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관계만이 남을 것이네.
내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건대, 나는 지금까지 정직하게 또 한결같이 혁명을 공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 다만 한가지 내 잘못이라면 마에스트라 산악지대를 누비던 시절 처음부터 자네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고, 자네의 지도자적 자질과 혁명가적 기질을 좀 더 빨리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 나는 경이로운 세월을 살았고, 자네 곁에서 카리브해의 위기(1962년 10월 미사일 위기)라는 슬프고도 찬란한 시절을 우리 인민들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끼네. 이런 경우 어떤 국가원수도 자네만큼 명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을 것이네. 보고, 생각하고, 위험과 원칙을 헤아리는 자네를 주저 없이 따른 것이 나 역시 자랑스럽네. 이제 세상의 다른 나라들이 내 미력한 힘이나마 요청하는군.
쿠바의 영도자로 남을 자네의 책임 때문에 자네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그 과업을 이제 나는 떠맡고자 하네. 우리가 작별할 시간이 온 게지.
나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 속에 떠난다는 걸 이해해 주게. 나는 여기에 건축자로서 내가 지닌 가장 순수한 희망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 놓고 가네. 나를 아들로 받아준 인민의 곁을 떠나네. 작별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일 게야. 새로운 전장에서 자네가 내게 심어준 믿음을 간직하겠네. 우리 인민의 혁명 의식과 가장 고결한 의무를 완수한다는 가슴 떨리는 기쁨을 간직하겠네.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그곳에 이들이 모두 함께 할 것이네. 이것이 내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해 주겠지.
다시 말하거니와 나는 쿠바에 대한 모든 책임을 벗고, 오직 쿠바의 모범을 기억하겠네. 그래서 다른 하늘 아래 내 최후의 시간이 도래한다면, 내 마지막 생각은 쿠바 인민들에게, 특히 자네에게 향할 걸세. 자네의 가르침과 모범에 감사하네.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을 충실하게 간직하려 노력하겠네. 나는 늘 우리 혁명의 대외 정책과 동일시되곤 했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언제나 쿠바 혁명가로서 책임을 느끼면서 행동할 것이네. 나는 내 아이들과 아내에게 어떤 물질적 기반도 남겨주지 않았지만, 이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는 않네. 그들이 생활하고 교육받는 데 필요한 경비를 국가가 충분히 제공하리라는 걸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세.
자네에게, 그리고 인민들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그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를 어찌 필설로 다하겠는가.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는다는 게 별 뜻 없을 것 같군.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 조국이냐 죽음이냐!
내 모든 혁명적 열기로 자네를 얼싸안으며
체
1965년 4월에 발송된 편지
Ernesto ?Che? Guevara, trans. by Victoria Ortiz, Reminiscences of the Cuban
Revolutionary War,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68, pp. 284-285.
출처, 다블, 천마를탄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