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도소에 틈만 나면 자기 몸을
자해하는 죄수가 있었다. 어느 날에는 자기 혀를 면도칼로 잘라냈다. 황급히
달려온 교도관과 의사가 왜 그랬느냐고 물었더니, 꿰매기 어려운 부분이라서 골탕을 좀 먹어보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완악함은 그런 것이다. 싸라르는 '고집하다, 거역하다, 배역하다'의 뜻이 있다. 꺾이지
않는 고집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 돌이킬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목을 맸다. 들은 말씀이 부족하거나, 직접 본 기적이나, 자신의 손으로 행한 이적이 적지 않을 것이나 고집은 그처럼 강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말씀하셨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48:4) 그 고집은 포로로 잡혀가고,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좀처럼 꺾일 줄 몰랐다. 숨 쉴 만
하면 다시 고갤 들었다.
이 고집은 미련한 청년을 꾀던 음녀의
특징이었다. "떠들며 완악하며"(잠7:11) 고집은 신념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원수의 영향 아래 있다는 증거다.
모든 것을 잃는 길로 가면서도 돌이킬 줄 모른다. 절대 길들지 않은 짐승 같다.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욥39:9)
대나무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휘었다가도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상처를 입으면 다르다. 힘을 가하면 더욱 꺾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고집은 상처를 받아야
한다. 꼿꼿한 상태 그대로는 전혀 쓸모가 없으며 상처를 받아 꺾일수록 유용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체면이 손상되고 무시를 받고 욕을 먹고 창피를 당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고집을 꺾도록 십자가를 허락하신다. 젊어서는 띠 띠고 다닌 베드로였지만, 늙어서는 순히 이끌렸다. 고집에 십자가를 받은 삶이었다.
소가 멍에를 맨 것처럼 십자가를
받은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오해 없이 들으며, 행하시는 일을 바로 분별한다. 주님께 배우는 삶을 산다. 이름은 예뻐도 사랑니는 뽑아낸다. 쓸모가 없고 아픔만 줄 뿐이기 때문이다. 고집이 그렇다.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제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고집이 없으시다. 저항이 없으시다. 말씀도 없으시다.
순히 받으시고 숨을 거두셨다. 순종만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다 이뤄졌다. 그 길을 가는 중인가?
첫댓글 아멘!
내 고집으로 주님의 손길을 거부하고 바뀌기를 거절했습니다. 내것을 주장하는 그 곳에 아직도 집요한 고집이 있음을 봅니다. 내게 주신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배웁니다. 십자가에서 순종하심으로 모든 것을 순히 받으신 주님을 따라 살기 원하오니 주여, 은혜를 내려 주소서.
나의 자존심에 상처가 나고, 마음이 상할 때 내 고집을 꺾는 중인 것을 인식하겠습니다.
나의 자존심과 고집을 치우고 겸손히, 그리고 즉각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간구합니다. 항상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