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13)
#산적 두목이 된 남자
과거에 낙방해 낙향하다가
산적에게 붙잡힌 지서방
병든 두목 대신 산적 두목이 되어
악행 일삼는 무림사 승려들에게
보물함을 바치며
술잔치를 벌였는데…....
과거에 낙방해 피골이 상접한 지 서방이 낙향하다가
또 낭패를 당한다. 고린내 나는 버선을 쑤셔 넣은 단봇짐
하나 달랑 메고 솔티재를 넘다가 시퍼런 칼을 든 산적
둘을 만난 것이다.
단봇짐을 펴던 산적이 코를 막고 지 서방 목에 칼을 갖다
댔다.
지 서방이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과…과거에 낙방하고 노…
노잣돈이 떨어져 두끼나 굶었소이다.”
“과거를 봤다?” 산적 둘은 지 서방을 데리고 토끼길을 따라
돌아돌아 산채로 갔다. 낙락장송에 둘러싸인 산채엔
크고 작은 움막집이 여럿이고 텁석부리 산적들과 함께
아녀자들도 보였다.
두목 앞에 끌려간 지 서방은 첫눈에 두목의 몸이 성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관군 연락병으로부터 탈취한 문서,
감영에서 빼돌린 산적토벌계획서 등을 지 서방이 차근차근
읽어주자 비스듬히 누운 두목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문서를 하나하나 읽던 지 서방이 아주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무림사 주지가 사또에게 보내는 밀서였다.
자기가 산적을 토벌해줄 테니 대신 자운사를 박살 내
무림사의 말사(末寺)로 만드는 걸 눈감아 달라는 요지였다. 무림사 주지의 악행은 지 서방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터였다.
첩을 다섯이나 둔 무림사 주지승은 나라가 위급할 때를
대비한다며 사적으로 승병을 60여명이나 양성하고 있었다. 승병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염주를 목에
걸었지만 모두가 무술을 익힌 왈패들이었다.
저잣거리로 나가 가게 앞에서 엉터리 염불을 외고는
돈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았다. 그러니 무림사 승려들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돌면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왈패 때때중들은 주막에서 술을 퍼마시고는 다른 가게
문을 도끼로 부수기 일쑤였다.
지 서방이 산적들과 술잔을 나누며 얘기를 들어보니 모두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 주인에게 새경을 떼인 머슴,
딸을 사또의 노리개로 빼앗긴 농사꾼, 마누라가 지주에게
겁탈당한 소작인….
어느 날, 지 서방이 두목을 찾아갔다.
“나으리, 제게 우리 산채를 살려낼 그럴듯한 복안이
있습니다.”
두목이 껄껄 웃었다. “우리 산채라, 자네도 이제 산적이
된 건가?”
두목과 지 서방은 단둘이 반나절이나 밀담을 나눴다.
며칠 후 두목이 중간조장들을 불러 모았다.
“오늘부터 이 산채의 두목은 지 서방이다.
지 서방의 명을 거역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두목은 각혈을 하다 숨을 거두었다.
장례를 치르고 지 서방은 중간조장들에게 선언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길손들의 단봇짐이나 터는 좀도둑이
아니다.”
지 서방은 의관을 깨끗이 차려입고 창고에서 비단
보자기에 싼 보물함을 꺼내 중간조장 두명을 데리고
산채를 떠났다.
나루터 객줏집에 지 서방이 나타나 주인과 밀담을 나눴다.
이튿날, 지 서방과 두 중간조장은 무림사를 찾아가
주지승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사님, 소인이 이번에 나루터 주막을 사들였습니다.
앞으로 잘 봐주십시오.” 그러고는 들고 온 보물함을 바쳤다.
산채 공격 계획을 세우고 온종일 무술훈련을 하던
60여명의 중들을 주막으로 초청해 더덕주· 산딸기주·
송이주·머루주 단지를 열고 쇠고기산적을 산더미처럼
올렸다. 초저녁부터 벌어진 술판은 삼경이 돼서야 파했다.
기습작전은 너무나 쉬웠다. 승방이며 대웅전에 곯아떨어진
때때중들의 발목 인대를 하나씩 끊어 놓고,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주지승의 목을 땄다.
산채로 돌아왔을 때는 아직도 날이 새지 않았다.
지 서방은 무림사에서 털어 온 그 많은 돈을 골고루
나눠주었다.
“대처로 나가 잘들 사시오.”
산채의 불길이 하늘 높이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