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삶의 현장을 잘 담아 표현하기
본심에서 네 분의 작품 20여 점이 올라 왔다. 나름대로 얼마나 작품에 혼신을 다했을까 생각하지만 시의 서정성과 완결성에 아쉬움이 든다.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어렵다. 하물며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공감을 얻기란 더 힘들다. 시조의 율격은 물론 형식적 절제미를 요구하며 행간의 여백과 함축성이 필수적이다. 거기다 시어의 현대적 감각, 세련된 이미지의 표현을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글쓰기에서 기본인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우라이어’에서 알려졌다. 이는 단순히 시간이 아닌 노력과 전략적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빠른 입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실력과 내공을 쌓은 다음에 나름의 튼실한 방을 직조해 나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종심까지 남은 투고자는 강영록, 최영기 두 사람이었다. 강영록의 작품은 대체로 자신만의 호흡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력이 돋보이나 앞에서 언급한 띄어쓰기, 맞춤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음보의 율격에서도 세심한 훈련이 필요하다.
최영기의 ⌜감나무 입춘방⌟ 외 2편을 신인상으로 선한다. 동봉한 작품이 모두 고른 수준과 함께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 유연하고 구성이 단단하여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았다. ⌜감나무 입춘방⌟에서 ‘살을 에는 칼바람’에 ‘생가지 꺾어지는 아픔도 참아가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다시 봄이 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행마(行馬)를 묻다⌟에서 ‘한 수 한 수 숨죽이며 살얼음을 걷던 중반’의 모습은 ‘잠 못 든 샛별을 찾아 행마(行馬)를 묻고 있’어 고뇌하는 현대인의 현실 참여적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천국에 산다⌟에서 ‘공시 지옥 뒤로 하고 발을 디딘 알바 천국, ‘오늘은 운이 좋아서 마감 날짜 공짜 김밥’ 등 힘든 청년의 모습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여 독자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러나 리얼한 삶의 현장을 담아 잘 표현하는 능력이 탁월하였음에도 제목에 좀 더 신중을 기해 끝까지 고심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로써 세 편을 당선작으로 선하며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글 잘 쓰는 시인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큰 축하를 드리며 나머지 분들도 머지않아 좋은 글로 다시 마주하길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이승현 김진희(글)
당선작
감나무 입춘방 외 2편
최영기
감나무 입춘방
눈 덮어둔 까치밥도 멧새한테 털린 뒤
헐벗은 맨사둥이 살을 에는 칼바람
동안거 되뇌던 화두 동지 볕에 말린다
아득히 출렁이며 밀려오는 해조음 속
세월의 갈피마다 갈마드는 발자국들
장대비 우레를 맞고 허허벌판 버텼다
해묵은 옹이들도 가슴에 널어두고
생가지 꺾어지는 아픔도 참아가며
파도가 뒤척이는 밤 다시 외는 입춘방
행마(行馬)를 묻다
한수 한수 숨죽이며 살얼음을 걷던 중반
날카로운 승부수에 허망한 역전패로
벼랑 끝 내일 한판에 타이틀이 걸렸다
명치 끝에 꽂혀있는 비수를 뽑아내며
피투성이 시체를 눈물로 헤집을 때
까칠한 자드락비가 가슴을 후려쳤다
밤하늘에 별을 집어 놓아보는 내일 포진
흑별들 실리전에 백별은 팽팽해져
반달도 수를 굴리며 산마루를 서성인다
새도록 진을 쳤다 다시 쌓는 어둑새벽
칠흑 같은 어둠 속 형형한 눈동자는
잠 못 든 샛별을 찾아 행마(行馬)를 묻고 있다
천국에 산다
평일에 네 시간씩 주말은 여덟 시간
공시 지옥 뒤로 하고 발을 디딘 알바 천국
오늘은 운이 좋아서 마감 날짜 공짜 김밥
꿀알바 두 탕으로 로또 대박 행운아요
백수 탈출 효자에다 엄지 척 베프라며
술값을 독박 씌우려 붕 띄우는 장수생들
불쾌지수 폭발하는 비 갠 날 찌는 오후
짝을 찾는 매미들 애처로운 엘레지가
헬조선 쩌는 청춘의 한여름을 찢고 있다
당선소감
최영기
전남 장흥 출생
며칠 전 아침 한강공원 산책길에 갑작스러운 당선통보 전화를 받고 멍한 느낌이었다. 고맙다는 말로 서둘러 통화를 끝내고 벤치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현실 세계로 돌아와 그동안 독학으로 시조를 공부해온 짧지 않은 8년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주위에 시인은 서너명 있었지만 시조 시인을 찾을 수가 없어,이 지엽 시조시인의 현대시조작법과 서너 권의 시조집을 구입해서 읽는 것부터 시작을 시작했다.가끔씩 부끄럽고 유치한 습작을 해보면서,해가 갈수록 시조의 어려움을 절감해야만 했고,어슴푸레하게나마 시조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 불과 3년전쯤부터였다. 중간에 녹색불이 들어온 적도 없지는 않아서,2018년 공무원 문예대전과 2024년 8월 강동문화원 주최 둔촌백일장에서의 입선등,두 번의 동네 입상이,막막했던 어둠 속의 등대처럼 스스로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던 차에 올해 초에 알게 된 ‘시조미학’의 문을 두드려 본 것이,뜻밖에도 신인상이라는 비현실적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아 내공이 한참 부족한 나로서는 내심 열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중에,떠오르는 단어는 ‘늙깍이’라는 단어다.아마도 국어 사전에 늦깎이는 있어도 ‘늙깎이’는 아직 없을 것 같다.7학년의 나이에 시조세계의 새내기라니,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다.요즘 가끔씩 들여다보는 또래끼리 모인 대여섯개 카톡방의 공통 주제는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하게 가는 법등에 대해 여기 저기에서 퍼온 글들로 도배가 되는 중에,하늘로 간 친구들의 소식이 심심찮게 종종 늘어가는 ‘凋落의 시즌’이 되었으니 말이다.
올해도 역시나 빈 손에 헛나이만 느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뒤늦게 무언가 해보겠다고 애쓰는 것을 본 하늘이 가상히 여기셔서,이 가을은 조금이라도 덜 쓸쓸하게 막걸리라도 한잔 하고 건너가라는 분에 넘치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 건지도 모르겠다.
끝으로,아직 덜 익은 졸작을 뽑아주신 한국시조시인협회와 시조미학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큰 절을 올리며,더욱 정진하라는 채찍으로 알고,짧게 남은 시간이나마 시조공부에 더 노력할 것임을 새삼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