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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의 도리스 레싱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언제부턴가 딱히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하는 작품들을 굳이 찾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도 아마 아내가 보기 위해서 구입한 책으로, 어느 순간 책을 펼치면서 이 작가의 역량이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손에 잡은 이후 계속 읽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 소설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남성중심적 문화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상황이 절묘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책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는데, 작품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들은 모두 1960년대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남성중심적 관습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잘 드러나 있다고 생각되었다. 아울러 남성들의 허세와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의식을 노출시킴으로써, ‘신사의 나라’라는 명성이 지닌 영국 사회의 허위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파악된다. 예컨대 가장 앞에 수록된 <최종 후보명단에서 하나 빼기>라는 작품에서, 무대 디자이너인 바버라 콜스를 유혹하기 위해 애쓰는 그레이엄 스펜서라는 인물의 형상이 바로 그러한 속물적 남성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레싱의 소설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여성들의 심리와 함께 그들이 처한 상황이 매우 세심하게 형상화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분량이 아주 짧아서 단편이라기보다는 ‘장편(掌篇)’이리고 할 수 있는 <방>이란 작품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당대 여성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작품의 짜임새가 탄탄하다고 느껴져, 개인적으로는 소설 습작을 하려는 이들에게 ‘단편소설의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표제작인 <19호실로 가다>는 도리스 레싱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이해된다. 이 작품서는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서, 결혼 후 가사와 양육이라는 일상에 갇힌 여성이 느끼는 공허감이 잘 드러나 있다. 결혼을 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전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외형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무료하고 공허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원하고 그것을 이루지만, 결국 집에서의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의 틈입으로 ‘모두의 공간’으로 변해버리게 된다. 어느날 장을 보러간다는 핑계로 마련한 시내의 허름한 호텔방 하나를 빌려 마음의 안정을 취하지만, 마침내 그것조차 남편이 알게 되면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심리가 매우 세심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레싱의 소설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외형이 아닌, 여성들이 안고 있는 내면의 상처가 무엇인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왜 레싱의 소설들이 페미니즘의 범주에서 논의될 수 있는지가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즉 남성중심의 문화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현실적 처지가 비교적 정확하게 그려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레싱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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