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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학(sociology , 社會學)이란...
사회학(社會學)은 사회적 관계의 성격·원인·결과 및 개인과 집단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의 한 분야이다.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풍습·구조·제도에 대한 연구와, 그것들을 서로 결합시키거나 약화시키는 제세력·집단·조직에 대한 참여가 개인의 행동과 성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사회학은 부분적으로든 보편적으로든 사회의 기본적 성격 그리고 지속성을 유지하거나 변동을 일으키는 사회적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생활이다. 따라서 제도화된 사회적 형식은 인간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 형식들이 어떤 식으로 수립·발전·상호작용하고 소멸되어가는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의 과제이다. 그 구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가족이다. 그밖에 동류집단, 공동체, 경제 및 정치 질서, 다양한 자발적 집단, 교회나 군대와 같은 특수집단 등도 사회학의 주요탐구영역에 속한다.
< 역사초기의 주요사회학파 >
사회에 대한 분석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서구 합리주의 전통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근대의 과학적 분석이 출현한 것은 18~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초기 사회학자들은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방향을 정립하는 과정에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른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사회학도 원래는 근대 철학의 일부로서, 생물학과 진화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초기의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유기체와 생물학적 유기체 간의 공통성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으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시도했다(사회진화론), 오귀스트 콩트가 '소시올로지'(sociologie)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1838년이었으나, 그뒤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사회학은 독자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사회학이 고유한 영역을 가지는 학문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사회학적 주제의 고유한 성격, 심리학이나 생물학과 구별되는 위상, 인간 행동을 일반화할 수 있는 분야 등을 규정해야만 했다. 19세기말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개인간의 다양한 상호작용으로부터 각 개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속성, 즉 '사회적 사실'(social facts:집단적인 감정, 풍습, 제도, 민족 등)이 생긴다고 했는데, 이는 개인적인 심리학 수준이 아니라 사회학적 수준에서의 연구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사회 각 부문의 상호관계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서 개인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개인의 행동에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현대의 주요사회학파 >
초기에 찰스 H.쿨리가 이룩한 이론적 체계화에 뒤이어 피티림 A.소로킨, 톨콧 파슨스, 로버트 머턴, 에버트 C.휴 등은 사회조직의 성격과 그것이 개인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거대한 사회체계와 국가, 사회 등에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을 체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슨스는 사회체계에 대해 더욱 분석적인 방법으로 접근했는데, 이는 각각의 체계가 생존하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기능적 필수조건')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즉 각 사회체계가 작동하는 데 요구되는 표준화되고 안정적인 구조의 성격과 환경에 대한 관계, 경계의 설정, 구성원의 충원과 통제 등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다. 머턴이나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사회구조를 분류하고 그 기능의 차이에 관해 탐구했다(구조기능주의). 이러한 구조·기능주의적 분석과 연관된 주제와 연구방법은 한때 일반적인 과학적 분석방법과 동일시되거나, 적어도 사회조직의 성격에 대한 과학적 연구방법으로 인정될 정도로 영향력을 얻었다.
한편 사회학자들은 오랫동안 19세기의 본능주의적인 심리학이나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실험적이었던 웟슨의 고전적 행동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의 '상징적 상호작용론'이라는 이론은 현대 미국 사회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로 발전하게 되었다. J.마크 볼드윈과 윌리엄 제임스 외에도 존 듀이, 조지 H.미드, 쿨리 등이 사회심리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들은 정신과 자아는 인간 유기체의 고유한 소양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생겨나며, 사회적 과정 즉 개인간의 사회적 의사소통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했다(자기), 미드나 다른 학자들에 의해 발전된 자아개념은 개인간의 상호과정이나 사회적 과정의 측면들을 내면화한 것이다.
즉 자아개념은 심상과 상징의 형태로 존재하며,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지각을 통해 각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조직화된다. 부정확하고 유동적이며 불특정한 자아라는 개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동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 즉 개인은 자신의 자아에 대한 기존의, 혹은 앞으로 기대되는 상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계급의 분화와 계급간의 갈등은 경제적 요인에서 비롯되며, 정치체계는 대부분 그러한 사회적 분화의 산물이라는 경제적 결정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들' 가운데서 다시 등장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것이 C.라이트 밀스의 '권력 엘리트' 이론이다.
밀스에 따르면 권력 엘리트는 자본주의적 경제·군사 체계에 따라 통합된 집단인 군산(軍産)복합체를 형성하여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임의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카를 만하임은 계급갈등에 대립되는 관점을 정립했다. 그는 계급간의 균열을 경제적 이해에 입각한 합리적 인식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인 산출물이자 사상의 분할로 보았다. 만하임은 이러한 갈등이 해결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결정론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지식사회학'이라는 이념과 행동 간의 관계를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자극시키는 데 기여했다.
< 현대 사회학의 방법적 고찰개요 >
19세기 사회학에는 체계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었는데, 이후 점차 검증가능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연구에서, 공식적으로 등재된 출생률·사망률·범죄율·자살률 등의 통계적 자료들을 이용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지식의 진보에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이러한 접근법이 기존의 관념들을 지지하는 데 활용되는 것으로 그쳤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사회학적 방법에 있어서 상당히 진일보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W. I. 토머스의 〈방법론 노트Methodological Note〉나 플로리안 즈나니에츠키의 〈유럽과 미국의 폴란드 농민 Polish Peasant in Europe and America〉 등의 저작은 바로 그러한 성장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한편 1920년대에 시카고대학교에서는 로버트 E. 파크의 고무하에 버제스와 그 동료들이 거대도시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귀납적인 방법이 이용되었기 때문에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가설이 세워졌다. 이러한 시도는 실질적인 결과라는 측면과 함께 방법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통계학 >
초기의 사회학자들은 가치의 상관관계를 통계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으로 이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칼 피어슨의 '상호관계 계수'는 지속변수 간의 인과관계를 측정하기 위해 시도된 것으로서, 이 방법은 변수간의 연관성이 필연적이지 않아도 그 연관의 정도를 밝혀주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포함해 요인 분석 등 여러 종류의 통계적 방법이 사회학의 모든 분야에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 실험 >
한때 사회학적 연구에서는 부적합한 것으로까지 여겨졌던 실험적 방법은 심리학자들에 의해 개인과 집단에 대한 연구에 적용되기 시작하여 상당한 진척을 보게 되었다.
1930년대 무렵 K. 레빈과 동료 심리학자들이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방법을 고안했다. 그뒤 사회학자들이 이들의 전례를 모방하여 수많은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다. 이후 하버드대학교의 로버트 F. 베일스가 소규모의 인공집단에 대해 체계적 관찰을 실시한 결과 유용한 결과들을 산출해낼 수 있었다.
< 자료수집 >
자료수집은 본질적으로 비체계적인 관찰에서부터 특수한 방법을 통한 정교한 측정에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자료수집에 관련된 문제에는 가장 적절한 용어의 사용, 측정되는 단위의 정의, 사용해야 할 분류법의 선정 등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자료수집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질문법이나 면담법, 소시오메트리(sociometry) 등이 있다.
< 현대 사회학의 위상 >
대학에 최초로 사회학과가 설치된 것은 1892년 시카고대학교의 앨비언 스몰에 의해서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서구 문명의 전통 속에서 사회학적 주제는 독자적인 학문 영역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19세기에 사회과학의 주제들은 도덕철학의 영향하에서 논의되는 데 불과했다. 심지어 콩트가 1838년 처음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이후에도 사회학의 주제는 계속해서 다른 학문과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졌다. 전문적인 사회학자가 나타나게 된 것은 각 대학에 사회학과가 설치되고나서부터였다.
현대의 사회학은 그 연구분야가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학문과의 연관성도 증대되었으며 계속해서 연구분야가 세분화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사회학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이 증대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현대 사회학은 이에 대한 적절한 치유책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한국의 사회학 ***
한국의 사회학은 토착학문이라기보다는 서유럽으로부터 이식된 학문이며, 일반적으로 해방 이후 각 대학의 사회학과에 기초를 두고 발달한 제도권 사회학을 말한다.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학은 일본 교육체계의 유제로서 프랑스·독일 등의 서유럽 사회학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적·사변적 사회학이었다.
1950년대 이래 실증주의적이고 행동과학적인 미국 사회학이 주류를 형성했고, 그결과 사실 탐구를 위한 사회조사가 널리 행해지면서 산업화 시기의 정책결정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 사회학의 무비판적 추종경향이 비판되고 한국의 역사적 사실과 한국사회의 총체적 해명을 위한 이론적 틀이 모색되면서, 1970년대 중반 이래 한국적 사회학이 모색되고 있다. 이러한 모색의 연장선 위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마르크스주의와 한국사회의 현실을 접합시키려는 새로운 시도가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내용 >
19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지적 운동의 열매로, 콩트(Comte, A.)와 스펜서(Spencer, H.)에 의하여 개척되었다.
사회는 단순히 개인의 총합이라는 개체주의적 접근을 비판하고, 인간과 사회를 사변적으로만 이해하는 비과학적인 태도를 거부하며, 사회의 질서와 변동에 대하여 이론적 관심을 보인 것이 사회학의 지적 전통이었다. 우리 나라에 사회학이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였다.
서양문물의 도입과정이 주로 그러했듯이 사회학도 한편으로는 중국대륙을 통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중국에서는 스펜서의 『사회학(Study of Sociology)』에서 ‘Sociology’를 군학(群學)으로 옮겨 쓴 것이 1903년이었는데, 우리에게는 1909년 장지연(張志淵)의 『만국사물기원역사(萬國事物紀原歷史)』에 의해 그 말이 소개되었다.
그는 여기서 콩트와 스펜서에 의해 성립된 ‘군학’을 소개하였다. 일본에서는 군학이 아니라 ‘사회학’으로 옮겼고, 이 학문은 최초의 신소설을 쓴 이인직(李人稙)이 1906년 월간잡지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에 연재, 소개하였다. 그는 여기서 사회학의 정의와 종류, 사회 이론의 중요성, 스펜서의 진화론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얼마가지 않아 군학이라는 낱말 대신에 사회학이라는 낱말이 통용되었다. 사회학은 1910년대 우리나라의 선각적 지식인들에게 비교사회적 관심을 주었으며, 사회의 진보와 진화의 맥락에서 민족과 국가들 사이의 다툼을 냉엄히 주목하게 하는 민족 각성의 이론적 도구를 제공하였다.
구한말에 들어온 사회학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3단계의 전개과정을 밟아왔다. 첫째는 일제강점기의 도입단계이며, 둘째는 광복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정착단계이며, 셋째는 1970년 이후의 확장단계이다.
(1) 도입단계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자 모든 학문적 활동이 침체되고 좌절되었다. 그러나 사회학을 소개하려는 작업 자체의 맥박은 끊어지지 않았다. 1912년 정광조(鄭廣朝)는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에 사회학에 관한 글을 2회에 걸쳐 실었다.
여기서 그는 사회학의 창건자 콩트, 교섭작용, 교섭작용 속의 인간, 교섭관계로서의 조직, 분업이나 협력과 같은 사회의 특성, 가족, 학교, 국가, 그 밖의 집단을 포괄하는 사회의 범위, 사회유기체설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다.
1915년 잡지 『공도(公道)』에 필자가 밝혀지지 않은 「스펜서의 사회사상」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스펜서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있다. 3·1운동 이후 활발한 지적 활동이 펼쳐진 1920년대는 대학수준에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출판지면도 넓어졌다.
따라서 사회학에 대한 소개의 글도 보다 빈번하게 나타났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최정순(崔珵淳)은 졸업하던 해인 1920년 『학지광(學之光)』에 사회진보의 개념과 이론을 다룬 「사회생장(社會生長)의 사회학적 원리(社會學的原理)」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발전을 위한 상호협력과 협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 뒤 1926년 고영환(高永煥)은 퇴니스(Tonnies, F.)가 1924년 이탈리아 사회학협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사회의 변화와 사상의 변천」이라는 제목으로 『시종(時鐘)』 창간호에 소개였다. 이 밖에도 사회학과 관련된 글들이 잡지와 신문에 많이 실었다.
1930년대는 사회학의 도입통로가 일본이라는 이차적인 중간지점을 거치지 않고, 유럽과 미국으로 직접 이어지는 본격적 도입시기였다. 이 시기는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이 저서를 펴내고 고등교육기관에서 사회학 강의를 널리 개설했던 시기였다. 대표적인 경우는 다음과 같다.
1930년 『근대사회학』을 출판한 김현준(金賢準)은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보성전문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그는 독일 사회학을 소개하는 한편, 우리 사회의 짜임새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1933년 『사회학개론』을 내놓은 한치진(韓稚振)은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가르치며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는 당시의 미국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을 소개하면서 우리 사회의 개혁과 개조를 지향하는 지적 지향성을 보여주었다.
이어 같은 해 『사회과강의(社會科講義)』를 펴낸 공진항(孔鎭恒)은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주로 천도교기관을 통하여 천도교사상과 사회학을 이어보기도 하며, 사회 실체를 강조하는 프랑스의 사회학 이론을 소개하였다.
뒤이어 하경덕(河敬德)이 1930년에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부터 10여년 간 연희전문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3·1운동 이전에 이미 원한경(元漢慶, Underwood, H. H.)에 의해 심리학과 더불어 사회학 강의가 시작된 곳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사회학 강의가 이루어진 것은 하경덕에 이르러서였다.
그의 학위논문 「사회법칙─사회학적 일반화의 타당성 연구 Social Law─A Study of the Validity of Sociological Generalization」이 1930년 미국에서 출판되었을 만큼 그는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리고 강의안인 『사회학촬요(社會學撮要)』를 발간하여 연희전문학교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사회학을 보급,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컸다.
이와 같이, 1930년대는 훈련된 인적 자원이 비교적 풍부했고, 이들에 의한 사회학의 도입이 활발하였다. 사회학의 정통적 관심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량·개조가 이론적으로 논의되었던 넓은 의미의 ‘사회학적’ 시대였다.
(2) 정착단계
1930년대를 채 넘기기도 전에 식민지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어 새로운 학문운동은 시들어버렸다. 사회적 여건만 허락했다면 쉽게 정착될 수 있었을 사회학은 끝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사회학의 정착은 먼저 제도적인 수준에서 나타났다. 식민지 교육기관이 정리되고 국립대학교가 세워지자, 1946년 이상백(李相佰)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하였다.
뒤이어 1954년 경북대학교에, 1958년 이화여자대학교에, 1963년 고려대학교에 각각 사회학과가 설치되었다. 서울대학교의 교수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람들로 충원되었기 때문에, 광복 후 얼마 동안은 1930년대의 활기찬 다양성에서 다소 후퇴한 듯이 보일 만큼 일본 학계를 통하여 도입된 사회학이 연구분위기를 주도하였다.
제도적 거점은 있었으나 학문적 수준의 도약이나 사회학이론과 방법의 폭넓은 다양성을 보여주지는 못하였다. 1950년으로부터 몇 년 동안은 6·25전쟁으로 피폐된 상황과 혼란 속에서 사회학의 발전이 무척 더뎠던 시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학연구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는 우리나라 사회학의 연구지향성을 규정하는 구조적 조건이 되었다. 사회학자가 미국에 다녀오는 통로가 넓어지자 일본식이거나 일본을 통해 전수되었던 사회학은 곧 미국식이거나 미국을 통한 사회학연구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마구 쏟아져나온 사회조사방법에 의한 연구가 이러한 새로운 학문 분위기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어느 한 대학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풍미했다 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사회학은 사회조사연구요, 사회조사연구는 사회학이라는 느낌마저 줄 정도였다. 사회조사방법에 의하여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는 데 기여한 사회학자들은 고황경(高凰京)·이만갑(李萬甲)·이해영(李海英)·이효재(李効再)·홍승직(洪承稷) 등이다.
가족·농촌·도시·가치관·태도·계층·인구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사회조사방법은 편리하고도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당시 주목을 끌고 있던 미국의 구조·기능분석론이 소개되고 파슨스(Parsons,T.)와 머턴(Merton,R.)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개는 이론에 대한 검토나 비판적 이해보다는 단순한 도입과 소개에 머물러 있었으며, 우리 사회의 인식에 의미 있는 이론적 접합이나 적용의 시도는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거기에다가 이러한 이론적 작업이 자체적으로 시도되기도 전에 기능주의이론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있던 갈등이론 등도 함께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황성모(黃性模)만이 미국식 사회학에 대비되는 외로운 대안자였을 뿐이다. 사회학의 연구지향성이 미국식 조사방법에 의해 지배된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그 연구의 질적 가치가 어떠하든 연구의 양적 증대를 가져온 시대였다.
그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학이 대학교의 독립된 학과로 제도화됨에 따라 사회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터전을 확보했기 때문이었으며, 연구생산자의 재생산과정이 제도적으로 정착된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행적인 이론과 방법에 크게 좌우됨이 없이 몇몇 사회학자들은 필생의 연구과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최재석(崔在錫)의 한국가족연구로 그는 현지연구와 역사연구를 곁들여 꾸준히 연구성과를 발표하였다.
(3) 확장단계
1970년대 이후의 사회학연구는 몇 가지 점에서 두드러진 확장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첫째, 몇몇 대학에 한정되어 있던 사회학과가 주요사립대학교와 지방의 국립대학교에서 개설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말까지 4개 대학에 지나지 않던 사회학과가 1988년 현재 31개 대학으로 확장되는 제도적 성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학과의 증설은 단순한 제도적 정착의 계속이 아니라, 사회학의 위치와 존재양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사회학에 대한 관심의 통로가 넓어진 것이며, 사회과학에서 차지하는 사회학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이며, 사회학도의 활동영역을 넓힌 것이기도 하다. 특히 독립된 사회학과가 거의 모든 대학에 설치되는 확장과정은 이제까지 한두개의 사회학과가 주도했던 사회학의 무대를 확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확장된 신설학과의 교수진이 기존의 한두 대학에 의해 대부분 충원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활동무대는 이들 한두 대학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고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이처럼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는 주요 대학에 사회학과가 창설되는 제도적 확장의 단계였던 것이다.
둘째, 제도적 확장은 연구의 확장을 가져왔다. 사회조사방법으로 훈련된 사회학자들은 국내외의 연구비를 얻어 인구·산아제한 및 산업화에 따른 농촌과 도시의 문제 등과 관련된 상당한 수의 연구물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종전의 연구경향을 답습, 계승하는 것이었다. 내용면에서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킨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관심의 표명과, 사회학이론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의 관심이었다.
몇몇 사회학자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가족제도의 역사, 사회지배층과 계층 일반, 독립협회를 비롯한 근대의 사회사상으로부터 일제시대의 사회상, 근대의 사회변동과 사회운동, 심지어는 조선시대의 종교와 사상 등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 새로운 연구경향으로 주목되고 있다.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온 최재석·김영모(金泳謨)·신용하(愼鏞廈), 그 밖에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정재식(鄭載植)과 박영신(朴永信)은 사회학과 역사연구를 접합시키려는 연구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사회학이론에 대한 관심도 확장되었다. 사회조사방법이 주도하던 시대에는 사회학이론은 주변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미국이론의 약식소개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수준의 관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사회조사방법의 테두리 속에서 훈련받지 않은 몇몇 사회학자들이 외국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돌아오면서부터, 이차적인 자료에 바탕하여 논의하던 사회학이론의 주요 내용을 직접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한편, 이론의 관심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벌써부터 베버(Weber, M.)에 관심을 두어왔던 이순구(李舜求)와 더불어 베버·뒤르켐(Durkheim, E.)·파슨스, 그 밖의 유럽 사회이론의 연구에 단순한 소개 이상의 관심을 보이는 사회학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셋째, 연구인의 숫자와 영역이 확장되면서 사회학연구의 출판도 확장되었다. 1964년부터 한국사회학회지로서 『한국사회학』이 발간되어왔다. 그러나 사회학자들 사이의 학문적 의사소통이나 사회학연구의 관심을 자극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은 그다지 크지는 못하였다.
1970년대부터 전문·비전문가가 번역한 외국문헌이 수많은 출판사에 의하여 계속 발간되고 있는 것이 사회학의 확장에 보다 크게 기여하고 있는듯하며, 뒤바꾸어 그것은 사회학의 확장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사회학자가 쓴 교과서 수준 이상의 단행본이 상당수 출판되었던 것도 특기할만하다. 그 중 특히 김경동(金璟東)과 한완상(韓完相)의 글들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사회학이라는 이름을 표지에 적고 있지 않은 여러 정기간행물에서도 사회학적 글을 간간이 실었다. 그 가운데 사회학에 관한 한 『현상과 인식』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인문·사회 과학분야를 망라하는 순수학술논문만을 싣는 계간지로 1977년 봄 이후 70편 이상의 사회학적인 글을 실었다. 특히, 베버의 죽음 60돌을 기념하는 학술모임에서의 발표내용 모두를 1980년 겨울호에 싣고 있다는 것은 특별히 기록해둘 만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사회학은 제도·연구·발표의 수준에서 확장되어왔으며, 그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였던 이전의 단계에 비하여 다양화, 다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비판적 사회학의 성장과 맑스주의의 도입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서 미국, 유럽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한완상을 비롯하여 이 시기에 새로 미국이나 서구에서 귀국한 일단의 학자들이 미국과 유럽에서 새로 형성된 비주류의 연구방법과 비판적 경향의 사회학 이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도입하였고, 이것은 붐을 이루면서 수용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에는 미국의 인도주의 사회학, 밀즈를 비롯한 급진사회학,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적인 경향의 유입은 한국 사회학에 여러 가지 반성을 불러일으켰으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0~1990년대에는 산업사회학, 노동사회학 연구가 두드러지면서 그러한 반성 가운데에는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외국에서 발달한 사회학이론을 무비판적으로 한국에 적용해왔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사실상 체제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 대표적으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외국 이론을 한국적 풍토에 맞도록 개조하고 토착화시켜야 하며, 정치권력으로부터 학문적 자율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 새로운 학문 경향을 통해서는 체제를 비판하는 경향과 맑스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경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80년대 초반, 1970년대까지 국가정책의 기조를 이루었고 주류 사회학의 기본사각을 이루었던 ‘근대화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종속이론’ 혹은 ‘제3세계론’이 김진균 등의 학자에 의해 적극적으로 유입되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이론은 근대화론과 근대화정책이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을 저해하고 선진국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비판적인 경향은 198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서관모를 비롯한 이른바 ‘소장학자’들에 의해 ‘서구 맑스주의’ 이론을 유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다시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급진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사회의 변동과 발전을 자본주의적 발전 혹은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된 상태에서의 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한국의 주류 사회학에 도전을 가하며 커다란 새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5) 사회학적 관심의 다원화
이상과 같이 한국의 사회학은 광복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으면서 변천해왔으며, 오늘날 여러 가지의 연구 경향들로 다변화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계급론, 산업사회학, 한국사회론, 사회운동론, 민족사회학, 노동사회학, 여성사회학, 정치사회학, 문화사회학 등과 같은 것들이 새로운 관심영역들로 대두되어 발달하고 있으며, 그 반면에 인구, 가족, 도시, 농촌, 사회심리, 이론, 연구방법론, 지식사회학 등에 대한 관심은 퇴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경향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한층 더 가속화되어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이것과 관련된 사회학 이론, 시민운동, 비정부단체(NGO), 비영리단체(NPO)에 관한 연구, 정치사회학 및 지역사회학 연구, 그리고 정보화, 문화, 성, 환경, 세계화와 관련된 관심과 연구분야는 활성화된 반면, 계급론에 기반한 변혁이론과 방법에 대한 탐구는 퇴조하고 있다.
*** 사회학 학문분야 ***
사회유기체설, 사회물리학, 심리학적 사회학, 이해사회학, 형식사회학, 문화사회학, 예술사회학, 음악사회학, 사회심리학, 문화인류학, 철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
*** 사회학의 내일 ***
사회학이라는 새 학문이 한말에 도입, 소개되고, 그것이 광복 이후 독립된 학과로 대학 속에 정착되어가다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여러 수준에서 몇 단계의 확장과정을 밟아오면서 우리나라 사회학은 상당히 성장하였다.
양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사회학연구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단계적 성장을 인정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사회학의 주요특징을 이루고 있었던 초기적인 ‘수입’의 형식을 띤 글이 지금까지도 많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다.
1930년대의 사회학과 오늘의 사회학은 이 점에서 그 유형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사회조사연구가 주도해온 한국사회학의 단조로운 연구방법에 어떤 대안이나 수준상의 큰 발전이 없이 그 연구유형을 지켜오고 있는 것도 오늘의 연구상황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우리 사회학이 짊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학이 들어온 지 100년이 넘어선 우리 사회학이 자주적이면서도 보편적인 발전을 이룩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 사회학은 앞으로 이론 자체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를 펼칠 필요가 있다. 사회조사연구가 오랫동안 사회학의 흐름을 주도해오면서 연구의 양적 생산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상대적인 무시나 몰이해를 가져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론에 대한 인식과 이론과의 관련성이 간과(看過)된 채, 조사방법이라는 간편한 도구에 내맡겨져온 연구경향은 조사방법과 방법론을 혼란시켰다. 그런가 하면, 사회학이론에의 도전을 경시하는 몰이론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엇이 경험적인 것이며, 과학적 지식의 생산은 무엇이며, 개념의 경험적 준거는 또 무엇인가 하는 물음 등이 바로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방법론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을 제외한 방법은 방법론상의 큰 문제를 안고 있으며, 그것은 결코 사회학 자체의 이론적 발전을 이룩하게 해 주지 못할 것이다. 이론 자체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깊이를 더할 때, 양적 정착과 확장 위에서 질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의 사회학연구는 이론과 역사적 경험세계 사이에 보다 긴밀한 관련성을 세워야 한다. 바깥 사회학의 이론과 방법을 계속 받아들이되,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더 깊이 캐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것을 역사적 경험세계와 변증법적으로 이어놓아야 한다.
오늘의 사회학연구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여 역사적 경험내용으로 돌아가 몰두하는 하나의 주요흐름이 생긴 것은 바깥 사회학을 단순히 소개하거나 복사하는 식의 일을 능사로 삼는 오늘의 우리 사회학에 실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소개나 도입에 머무르는 일을 극복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론과의 접합이 없는 단순한 역사적 경험 내용의 서술 자체도 극복하여야 한다. 이것은 몰사회학적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이 명백히 사회학적이라고 할 수 있을 때 그 특유의 기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사회학됨’을 잃어버린다면 그것다운 기여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다시 말해서 사회학은 역사적 경험 내용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사변적 학문이거나 형이상학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 우리 사회학은 세계성과 독자성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학문은 범세계화하고 있다. 이론·방법론·방법에 관련된 논의의 기준과 평가는 세계라는 맥락에서 가늠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학문은 어차피 세계라는 무대 위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사회학은 폐쇄적 학문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나라의 사회학에 한정되거나 어느 한 흐름에 고착되지 않고, 여러 나라의 사회학과 여러 흐름 모두에 대하여 범세계적인 관심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학은 모든 흐름에 대하여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사회학은 모름지기 ‘우리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비판적인 눈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에 대한 우리다운 눈은 비판적 성찰과정을 동반한다. 우리 사회학이 세워야 할 독자성이란 다름아닌 우리 문제에 대한 우리다운 문제제기와 해명을 뜻한다.
세계 속의 우리 사회, 우리 사회 속의 세계에 대한 학문적 표출이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학인 것이다. 이론 자체에 대한 연구, 이론과 역사 현실과의 관련성, 세계성과 독자성의 조화, 이러한 과제의 학문적 실천만이 초보적인 도입·소개의 수준을 돌파할 수 있게 하고, 오늘날의 정착·확산의 조건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