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주의자
나희덕
벽의 반대말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해변은 무한히 열려 있는 곳이라고
해변은 어디에나 있다고
그러고는 아스팔트 위에 모래를 퍼나르고 나무를 심고 파라솔을 꽂고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데려다 해변을 만들었다 강렬한 태양을 박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완성한 해변에서 사람들은 벽을 잊은 채 누워 있고
파도처럼 어디선가 밀려오고 어디론가 밀려가고
삶이라는 질병에서 잠시 놓여나고
해변에는 벽을 두려워하는 영혼들이 모여들었다
어쩌면 벽을 사랑하는 영혼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내고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의 은밀한 기쁨이라든가
해변의 발코니에서
소금기 가득한 바람 맞으며
새나 구름, 빗방울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 어떤 삶**을
알아차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 벽의 반대말은
집도 방도 문도 창문도 천장도 바닥도 아니다
차라리 해변에서 들려오는 슬픈 노랫소리나
견딜 수 없는 눈동자 같은 것
더이상 어디로도 가지 않으려 할 때 벽은 문득 사라지니까
*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책세상. 45쪽.
** 같은 책. 154쪽.
길고 좁은 방
무슨 냄새일까
무언가 덜 익은 냄새가 물러터진 과육의 냄새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방에서 나는 냄새
다른 세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냄새
어제의 피로와 오늘의 불안이 공기 속에서 몸을 섞는 냄새
책상에 머리를 묻고 있는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묵은 종이처럼 자신에게
습기와 곰팡내가 스며 있다는 것을
길고 좁은 방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길고 좁은 방들이 있지만
옆방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다
기침 소리나 의자 끌리는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
이 방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페인트칠로 덮인 못자국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길고 좁은 방은
표정을 지우고 서서히 사라지기에 좋은 구조다
먼지가 쌓여가는 책들과
바닥 위에 조금씩 늘어나는 얼룩들.
단단한 바닥재는
늪의 수면처럼 어룽거리는 무늬를 지녔다
각자의 흔들림을 감수하여
사람들은 늪에서 굳이 빠져나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흔들림에 쉽게 익숙해지면 안 된다
흰 벽 위에
대여섯 개의 못을 박으려 한다
그림을 걸고 달력을 걸고 수건을 걸고 얼굴을 걸고 마음을 걸고
뭐라도 걸어야 뿌리내릴 수 있다는 듯이
매일 메일로 전송되는 공문들.
출력물이 길고 좁은 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공기청정기는 쉴새없이 돌아간다
제가 빨아들이는 먼지와 냄새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이따금 깜박거리며 위험신호를 보낸다
삶은 조금씩 앏아져가지만
그렇다고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방에서 익혀가야 할 것은
사라짐의 기술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덕구 산전*
청동 밥상 위에는
숟가락과 젓가락 한 쌍
산전에는 까마귀들뿐이네 조릿대 무성한 산길을 헤치고 북받친밭을 지나 이제야 여기 와 무릎 끓고 음복을 하네 오랜만에 무얼 좀 잡수셨는가 담배 한 대 놓아두고 향 피워두고 슬픈 노래도 몇 자락 보태네 듣고 있는가 하늘 가득 몰려든 까마귀 울음소리를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피붙이 잃은 울음소리를
산정에는 검은 돌이지천이네 듣고 있는가 검은 돌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부둥켜안은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사람의 등에 고개를 묻은 사람의 팔을 붙잡고 따라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곁에 주저앉은 사람과 바닥에 쓰러진 사람과 그 품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아앙
젖 보채는 울음소리를
깨진 가마솥 사이로 무성한 고사리들
돌 위에 피어난 푸른 이끼들
흩어진 사기 조각들
녹슨 깡통 속의 빗물에
어린 까마귀들 목을 축이다 날아오르고
그가 다녀갔는지 숟가락 끝에 물기가 묻어 있다
* 제주 조천읍 교래리에 있는 4 ‧ 3항쟁의 전적지로, 인민유격대장 이덕구가 자살 또는 사살 되었다고 추정되는 산전.
매미에 대한 예의
17년 전 매미 수십억 마리가 이 숲에 묻혔다
그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해다
17년의 어둠을
스무 날의 울음과 바꾸려고
매미들은 일제히 깨어나 나무를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무에서 나무로 옮겨 앉을 뿐 멀리 날 수도 없다
울음을 무거운 날개로 삼는 수밖에 없다
저 먹구름 같은 울음이
사랑의 노래라니
땅속에 묻히기 위해 기어오르는 목숨이라니
벌써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매미도 있다
하늘에는 울음소리 자욱하고
땅에는 부서진 날개들이 수북이 쌓여간다
매미들이 돌아왔다
울음 가득한 방문자들 앞에서
인간의 음악은 멈추고
숲에서 백 년 넘게 이어져온 음악제가 문을 닫았다
현(絃)도 건반도 기다려 주고 있다
매미들이 다시 침묵으로 돌아갈 때까지
가능주의자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문학의 숲. 2012. 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