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초 녹음의 사색(思索)
나이가 들어가니 잠자는 패턴이 들쭉날쭉 이다.
새벽 3시에 잠이 깨었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3시 30분에 자전거를 끌고 조심스럽게 대문을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시가지에는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았다.
남강 둔치를 따라 새롭게 조성한 자전거 길을 달리면 저절로 신이난다.
일찍 나왔기에 거리를 늘여 불티 남강정(南江亭)까지 갔다.
네 시 반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의 흔적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돌려 진양교 방향으로 향했다. 신무림제지 앞 남강 변에 새로 조성한 운동기구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벤치에 앉았다.
본능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어 들었다.
음악이 저장된 어플리케이션을 여니 내장 메모리에 ‘Call’이라는 낯선 배너가 떴다.
작동을 시켰더니 주약동에 사는 여동생과 지난해에 고인이 되신 백형(伯兄)과의 대화였다.
대화내용의 길이는 고작 7초인데 내용은 이렇다.
“힘이 들면 안 됩니다.”
“흠 아, 어쩌겠노.”
“예, 알았습니다. 오빠.”
“흐흐흐”
“예”
분명히 녹음된 이 말 앞에 주고받은 말이 있었을 텐데 그것은 녹음되지 않았다.
나는 앞부분의 말을 듣지 않았어도 어떤 말이 오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7초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옛 추억을 소환하기에는 충분했다.
백형(伯兄)과 나는 74년이란 시간을 공유하면서 혈연의 정을 이었고 동생과 나는 72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동생과 백형(伯兄)과는 71년의 정을 공유한 셈이다.
정이란 개별적인 관계로 깊고 얕음이 결정되는 것이기에 같은 시간을 공유해도 정의 깊이는 천차만별이다.
대체로 정은 어려운 시기를 힘들게 같이 보내면서 난간을 극복할수록 깊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라.
7초의 녹음을 청취를 하는 순간 나는 과거의 추억 속을 헤매고 있었다.
해방과 6ㆍ25이후 어려웠던 유년시절, 10여명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희생한 부모님과 형님 모습, 숨죽이며 절제했던 나의 학창시절, 장성한 이후 형제자매들이 정을 이어가기 위해 교감했던 사연들이 흑백 영화 필름처럼 스쳐갔다.
백형(伯兄)과 자매들은 힘든 일을 함께하며 맺어진 특별한 정분이 있다.
과거에는 밭에서 수확하는 농산물의 수입과 논에서 생산하는 수확물의 수입을 비교하면 소득의 차이가 심했다. 논에서 생산하는 벼 수확의 소득이 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 소득보다 훨씬 높았다.
우리 국민의 주식은 쌀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쌀의 수확량이 국민이 필요로 하는 소비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요즈음처럼 부족한 물품을 수입할 수 있는 경제 형편도 아니었다.
부족한 부분은 절약하거나 배를 주리면서 극복했다.
‘보릿고개’나 ‘춘궁기’라는 말은 당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낸 말의 대명사다.
이런 연유로 인해 각 가정에서는 가능하면 밭을 논으로 만들어 벼의 재배 면적을 넓히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도 800여 평의 밭을 논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밭을 논으로 만들려면 수리시설의 물을 끌어 올수 있도록 높이를 낮춰야 하는데 그 높이가 1m 전후다.
남강댐이 조성되기 전이라 파낸 흙은 강둑에 내다 버렸는데 흙을 운송해 버린 거리가 100m ∼ 150m정도는 족하였다.
장비라고는 고작 리어커와 삽이다.
그 일 대부분을 백형(伯兄)과 자매들이 했다.
봄철이 가까워지면 리어커가 지나가는 길바닥이 얼었다 녹는데 길에 있던 흙이 리어커 바퀴에 붙는다. 그렇게 되면 힘은 더 많이 소모된다. 그렇다고 간식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 삶은 고구마정도가 간식이었던 것이다.
형님과 자매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면서 더욱 정이 깊어졌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람의 정은 어려운 일을 함께 극복할수록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애틋해 지기 때문이다.
주약동 자매는 형님이 몸져누웠을 때 시간만 나면 장어국을 끓여 와서 드시게 했던 일도 따지고 보면 어려운 시기를 함께 보냈던 애틋함 때문이었으리라.
7초의 녹음이 나를 숙연해지게 함은 나이 때문이리라.
나이가 드니 예사로운 작은 일도 감성을 더해 크게 울림으로 되돌아온다.
나만의 현상은 아니겠지?
아마 부산 중형(仲兄)의 기일이 다가오니 신의 섭리가 우연을 가장해 ‘Call’을 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일이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