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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존중하는 사회사업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책들, 2009)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이름 없는 지식인 화자 ‘두목’과 자유분방한 노동자 ‘조르바’의 만남과 동행을 그린 작품입니다.
책을 사랑하고 사유에 익숙한 ‘두목’은 그리스 크레타 섬에 있는 광산을 매입하고 이곳을 운영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 가운데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노인 조르바를 인부로 고용합니다. 조르바는 정착할 집도, 안정된 미래 계획도 없이 한평생 유랑하며 살아온 인물입니다. 음악과 춤, 술과 사랑을 즐기며 자기 욕망과 감정에 충실합니다.
광산 개발은 여러 번 좌절됩니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들과 자연재해로 두목의 계획은 번번이 무너집니다. 그 과정에서 두목은 조르바의 삶의 태도와 실패 앞에서도 이를 긍정하는 자세를 가까이에서 지켜봅니다. 처음에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였던 두 사람은 점차 대등한 동행자로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치는 관계로 변화합니다.
소설 마지막에서 두목은 조르바와 함께 춤추며, 계획과 이성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삶의 감각을 비로소 받아들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렇게 두 사람을 비교하며 이성과 욕망, 계획과 충동, 사유와 삶의 대비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입니다.
지원 대상자 ‘조르바 어르신’
조르바를 지금 사회사업 현장에서 만난다면, 그는 가장 먼저 ‘지원 대상’으로 분류될 인물입니다.
‘65세, 집 없이 떠돌아 다님. 안정적인 수입도 없음. 미래를 대비하려는 계획조차 세우지 않음.’
우리 기준으로 보면 그는 무주택 홀몸 어르신이며, 돌봄과 주거, 소득 영역에서 모두 위험군에 속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조르바를 결핍된 존재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조르바 삶에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동시에 넘치는 것도 분명합니다. 게다가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를 조절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나침반으로 삼습니다.
욕망을 살아내는 사람, 욕망을 억제하는 사람
조르바를 고용한 ‘두목’은 정반대 인물입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 욕망을 관리하고, 이성으로 삶을 설계하려 애를 씁니다. 조르바 눈에 그런 두목은 늘 머뭇거리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자기 속 욕망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실행하지 못하는 사람 같습니다. 자유를 동경하지만 이를 향하여 끝내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답답한 존재입니다.
조르바는 그런 두목을 조롱합니다. 삶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내는 일이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사회사업 현장에서도 우리는 종종 당사자의 욕구를 듣기는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조정해야 할 것’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이성과 합리의 시선을 갖춘 ‘두목’과 같은 삶 만이 표준인 사회라면, 조르바의 욕망은 쉽게 이렇게 기록될 수 있습니다. ‘현실 검증력 저하, 장기 계획 부족, 충동성 높음.’ 이처럼 당사자 욕구는 곧바로 평가 대상이 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현실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으로 분류합니다. 사회사업가의 이해를 넘어서는 욕구는 때로는 증상으로, 어느 순간에는 망상으로까지 밀려납니다.
하지만 이는 조르바의 삶을 완전하게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제도’는 지배적 사고 습관의 산물입니다. 삶의 기준이 단일해질수록 우리는 그 기준에서 이탈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불안은 타인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고, 결국 사회 전체를 경직되게 만듭니다.
사회사업은 그 불안의 파도를 낮추는 방파제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 뿐’이라는 조르바의 선언이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존중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꿈꿉니다.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조르바의 춤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는 환대의 문화를 가꾸고 싶습니다.
규범적 욕구와 당사자의 욕구 사이
사회사업은 선의로 시작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안정적인 삶’의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에 들어맞는 안전한 피난처로 당사자를 안내합니다. 그러나 자칫 이런 기준은 당사자에게 정착해야 하고, 대비해야 하며,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요로 바뀔 수 있습니다. 임대주택, 희망통장, 노인일자리는 그런 기준을 구체화한 제안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거와 자본이 인간 삶의 필수 요소라 여기기에, 이 틀에서 합리적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르바에게 이러한 제안은 반드시 ‘도움’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는 조르바 같은 삶의 맥락을 가진 이에게는 생활을 안정시키기보다 오히려 ‘삶의 결’을 바꾸라는 요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조르바에게 중요한 건 안전한 미래가 아니라 오늘 살아있다는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회사업은 중요한 선택 앞에 섭니다. 당사자의 욕망을 ‘교정’할 것인가, 아니면 이를 이해하는 우리 쪽 태도를 점검할 것인가. 욕망이 위험하다는 사실과, 욕망이 틀렸다는 판단은 다릅니다. 사회사업이 자주 놓치는 것은 바로 이 구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울 것인가
조르바를 만난 사회사업가가 이렇게 말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당신의 욕구를 존중합니다.” 이 말은 당사자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욕구를 곧바로 교정하거나 병리화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중요한 건, 다음 질문입니다. 사회사업가는 그렇게 당사자의 욕구를 존중하고 이해하려 애쓰는 가운데, 사회사업가가 당사자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나아가 이를 함께 논의하며 합의에 이릅니다.
욕구 합의. 상황에 따라 당사자의 뜻을 따르기도 하고, 사회사업가의 뜻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회사업가로서) ‘정체성과 명분’, (사회사업가의) ‘처지와 역량’, (사회사업가와 당사자의) ‘관계’를 생각하여 어느 쪽으로 갈지 결정합니다. 사회사업가의 정체성에 맞는 일이면서 명분이 있는가, 처지를 헤아리고 역량을 따져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인가, 당사자에게 적극 제안할 만한 관계인가.
『사례관리 사회사업론』 (김세진, 구슬꿰는실)
사회사업은 당사자의 욕구나 사회사업가의 욕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실천이 아닙니다. 둘 다 극단적입니다. 당사자의 욕구만큼 사회사업가 또한 전문가로서 당사자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안내합니다. 다만 그 제안은 강요가 아니라 선택지로 남겨둡니다. 나아가 끝내 그 제안을 따르지 않는 삶도 실패나 비정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실천 과정을 거쳐 가는 길 위에서 비로소 사회사업 전문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넘어, 조르바의 ‘지역사회’
조르바의 삶을 이해하려면 개인만 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환경, 즉 당사자의 지역사회도 함께 살펴봅니다. 조르바의 삶이 불안정해 보이는 이유는 그의 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삶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 규범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회사업의 질문은 개인에서 사회로 이동합니다. 이 지역사회는 얼마나 다양한 삶을 이해해주는지, ‘정상적인 노년’이라는 기준은 얼마나 엄격한지, 표준에서 벗어난 삶은 관리의 대상인지 혹은 그럼에도 공존해야 하는 이웃인지.
사회사업은 분명 조르바를 바꾸는 일만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당사자의 변화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조르바 같은 삶도 배제하지 않도록 그가 속한 지역사회의 폭을 넓히는 일도 중요합니다.
돕는 사람과 도움받는 사람을 넘어
처음 두목과 조르바는 분명한 주종 관계에서 시작합니다. 두목은 고용주이고, 조르바는 노동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점차 관계가 달라집니다. 두목은 조르바를 통해 삶의 통찰을 얻고, 조르바도 가르치려고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현장에서도 사회사업가가 돕고, 당사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존재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서로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배우고, 자기 기준을 조정하기도 합니다. 당사자 또한 어떤 일에서는 사회사업가에게 제안하고 알려주기도 하면서 자존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관계일 때, 사회사업가는 쉽게 소진되지 않습니다. 다양한 삶을 만나는 과정은 성숙의 바탕을 만들어줍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현장 업무는 소모가 아니라 확장이 됩니다.
이 속에서 사회사업가의 기록은 당사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변화된 사회사업가의 자기고백으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두목이 조르바를 아랫사람으로 보지 않고 친구로, 어른으로, 동료로 만나기 시작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회사업 현장은 당사자와 사회사업가가 만나는 자리가 시작부터 다르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사회사업가 스스로 노력하여 그 자리를 동등하게 만들지 못하면, 두목과 조르바의 환상적인 춤은 가능하지 못합니다.
맺으며, 욕망을 존중하는 사회사업
조르바는 어린 시절, 고치에서 나오는 나비의 성장을 빠르게 하려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습니다. 선한 마음에서 나비의 탈피를 돕고자 했습니다. 나비는 조르바가 불어 넣은 입김 덕에 예정보다 빨리 나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맙니다. 선의로 다가간 일일지라도 당사자에게 묻고 상의하지 않는 일방적 도움은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나비가 스스로 고치를 뚫고 나오는 그 힘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시작입니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건네는 사회사업적 실마리는 분명합니다. 사회사업 역할은 한 사람을 사회적 표준에 맞추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다양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해의 폭을 넓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사업가 또한 돕는 사람에 머무르지 않고 삶을 배우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두목과 조르바의 만남이 서로의 세계를 확장했듯이, 사회사업은 고립된 두 존재가 만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 매력적인 일입니다. 당사자의 욕구를 ‘문제’로 보지 않고 ‘역량’으로 읽어내야 사회사업은 ‘분리와 관리’가 아닌 ‘기회와 참여’를 만드는 일이 됩니다. 규격화된 정상성의 사회에서 조르바와 같은 이들이 소외되지 않게, 그들의 투박한 제안까지도 담아내는 현장을 꿈꿉니다. 그 평등한 만남은 우리를 ‘돕는 사람’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자유를 맛보게 할 겁니다.
오늘 우리가 쓰는 상담 기록 속에서 조르바의 춤사위를 ‘부적응’이 아닌 ‘삶의 의지’로 남기면 좋겠습니다.
※ 욕구와 욕망
욕구(Needs)는 생존과 안녕을 위한 ‘필수적 결핍’에 가깝고, 욕망(Desire)은 그 결핍을 넘어선 ‘주체적인 갈망’에 가깝습니다. 사회사업에서 흔히 말하는 ‘욕구’는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와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충족해야 할 상태 따위를 뜻합니다. 반면 조르바가 보여주는 ‘욕망’은 결핍을 채우는 수준을 넘어,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확장하려는 에너지입니다.
당사자를 ‘배고픈 사람(욕구의 주체)’으로만 보면 우리는 밥을 주는 일에 머뭅니다. 하지만 ‘조르바처럼 자유롭고 싶은 사람(욕망의 주체)’으로 보면 우리는 그와 함께 삶의 의미를 찬찬히 고민하게 됩니다.
사회사업은 흔히 욕구를 ‘관리 가능한 것’으로 봅니다. 반면, 욕망은 ‘통제하기 힘든 것’으로 여겨 두려워합니다. 조르바의 욕망이 ‘즉흥적이고 충동성 높음’으로 기록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욕구는 사회사업의 시작점(생존)이고, 욕망은 사회사업의 지향점(자유)이 될 수 있습니다. 조르바의 욕망은 ‘증상’이 아니라 ‘생의 에너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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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