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이 초청한 시인_ 이정은 신작시>
밖은 장마입니다
이정은
주인공은 독자가 누군지 알까요
등줄기 땀이 바닥으로 모여도
땀방울은 흐르는 동안 증발될 수 있어
순환이론 책이 펼쳐져 있는걸요
땀방울은 다시 떨어져
수증기를 두려워해서
의미 없이 부푼 이야기를 떨구려 하는데
도서관의 존재를 DNA가 증명할까
가설을 읽어요
안경을 밀착해도
왜 상징일 수밖에 없을까요
도서관 입장에서는 독서가 노동인걸
바닷물에 가라앉는 몰디브를 읽고 투표하기 망설여지는 정치를 읽고 표절을 표절한 논문을 읽고 철탑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를 읽고 배추밭을 갈아엎는 농부를 읽고 젠더를 고독사를 거꾸로 읽어 비상구가 사라져
어지러워
빗줄기가 그치지 않아
종이꽃에 매일 물을 줄까
관념이나 상상을 피울까
노동은 왜 이리 집요할까요
논리는 편리하고 의문은 견고해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아
당신은 도서관에 있다고 믿습니까
생기가 일지 않아도 종이꽃에 DNA는 살아있고
젖은 것들에 대한 열람은 마감하는데
땀일까요 밖은 장마입니다
우산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시편이 초청한 시인_ 이정은 대표시>
다섯 개의 물의 장면
이정은
1
11월, 시침은 어디로 가고 없을까
카라꽃 조화를 11년째 키우고 있어요
물 없는 화병에서 꽃대는 올라오고
하얀 꽃잎은 향기를 뿜은 듯 버성기네요
속아주어야겠어요, 꽃이고 싶어하잖아요
빈 화병에 물을 줍니다
찰랑찰랑 아파트 지하 수면실로 타고 내려가요
보일러 아저씨 잠이 깨요
달력 한 장 젖어요
2
양수리 두물머리
검푸른 물의 흐름이 엉켜있어요
마른 장작 타는 체취, 당신을 불러들인 건 나의 실수였습니다
목으로 넘어가는 와인 한잔이 나의 독주이기를
같이했던 시간들은 윤슬처럼 흩어집니다
물의 카페에서 멀어질 때까지
3
어쩌지, 양수가 흘러내려
생명 다한 꺼져가는 촛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녹아 굳어버린 촛농들을
무덤 삼아 수그러드는
작은 호흡
물의 끝은 여기까지
인큐베이터 안이 추워
4
어느 시인과 사랑을 했어요
더 이상 뭘 원하시는 거죠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몰라요*
5
구피의 유영이 당신의 눈동자를 흐리게 하지요
몰려다니다가도 삐진 양 꼬리치며 돌아서는
구피의 번식력이 안방을 휘젓고 있죠
앉아 있을 장소조차 없이 불어난 구피 종자들
쏟아진 물난리에 익사를 조심하세요
물의 장면, 되돌이표를 그려 넣을까요
* 김종삼의 시 <民間人>에서 가져왔으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스무몇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水深을 모른다
이정은 시인
2022년 《뉴스 N 제주》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