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실 유인 진성 이씨에게 드리는 제문祭故室孺人眞城李氏文
오호라! 나는 그대와 경술년(1910) 동짓달에 혼인했는데 내 나이 겨우 12살이고 그대는 나보다 2살 더 많았네. 우리 둘 다 어려 몽매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신혼의 즐거움을 알았으랴만, 이때는 양가(兩家)에 부모님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 무고하던 시절이었네. 또한 양가 부모님 모두 이미 노년이라 우리 두 사람에게 지극한 사랑과 기대를 한 것이 마땅히 어떠하였던가? 한 해가 지나 그대를 맞이해 본가로 돌아오니, 우리집은 본래 여러 대 자손이 귀하여 어버이는 노쇠한 연세에 첫 경사로 마치 다른 사람은 이런 즐거움 없는 듯 기뻐하셨네. 더구나 그대의 자태는 아름답고 성품은 부드러워 효성과 공경의 도리를 다 잘 하였고 여인이 행하는 여러 가지 일에 있어서도 다 훌륭하였네. 또 가산이 비록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가난하지도 않아서 친척 간에 서로 즐거워하기에 충분하고 노비가 노역을 대신하기에 충분하였네. 부모님의 자애로운 보살핌 아래 때때로 즐거움을 드리면서 세간의 근심과 슬픔이 어떤 일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네.
나는 글공부에 종사하여 어진 스승과 벗을 따라 객지에서 겨울을 보내고 여름을 지나 반이 넘게 외지에서 보내다가 때로 집에 돌아오면 그대는 오래 헤어져 만나지 못함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가만히 서로 면려하는 뜻이 있었네. 나 또한 함부로 나이와 힘을 믿고 장차 좋은 문식(文識)을 수양하고 좋은 사업(事業)을 이루어 위로는 가정의 무거운 기대에 부응하고 아래로는 식구에게 넉넉함을 드리워주어 일생 동안 즐거움을 누릴 계획을 삼았는데, 나 같은 박덕한 사람에게 이러한 생각은 너무 사치스런 것이었네.
하늘이 곧 혹독한 벌을 내려 정사년(1917) 가을에 처음 딸을 낳았는데 나와 그대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실로 낙담을 하였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의 병환으로 한 해 넘도록 시탕(侍湯)을 하였으나 기미년(1919) 겨울 갑자기 부친상을 당하였고, 이해 여름에 장인어른 또한 세상을 떠나셨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어린 나이로 마침내 천하에 외로운 사람이 되어 갑자기 크나큰 일을 당하니 천지가 막막하였네. 남은 화가 사라지지 않아 변고가 거듭 일어나 내가 감옥에 구금되는 액운을 당하여 해를 넘겨 갇혀 있다가 겨우 저승 문을 벗어났지만, 한 해 안에 또 두 번이나 슬픈 일을 당하여 가산 또한 따라서 어려워지게 되었네.
내가 이에 과거를 고쳐 새롭게 할 계책으로 오두막집으로 옮겨 살고 일체 가정일은 오로지 그대에게 맡기고, 신문물로 발을 들어놓아 선성(宣城) 학교에서 한 해, 대구에서 반 년, 공역(公役)에 3년을 보내었네. 이렇게 5, 6년 사이에 또 출산의 일이 순조롭지 못해 해마다 잇달아 잘못되니 차마 길게 언급할 수 없는 점이 있네. 약을 써서 보살피고 하늘에 빌어 피나는 간청을 하여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으나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이것이 나와 그대의 지극한 한이 마음에 남아 일찍이 마음이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던 점일세. 나는 집에 있을 때는 비록 근심을 같이하더라도 곧 밖으로 돌아다녀 오히려 잊어버릴 때가 있었지만, 그대는 딸 하나를 겨우 붙들고서 위로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한편으로는 집안 살림을 다스리며 여러 번 위험한 지경을 겪어 무한한 풍상을 다 겪고 무한한 애간장을 다 태워 다시는 지난날의 고운 용모와 안색이 아니었으니, 처음과 견주어보면 잠깐 사이에 이미 서로 잘못되어버렸네. 따라서 생각해 보면 본디 외롭고 위태한 몸이 이렇듯 자식에 실패를 보고 또 생각지 못한 재앙이 일마다 갑자기 생겨서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도록 하여 부득이 일대 용단을 내려 살림을 싸서 선성(宣城)으로 이사를 하였네.
새로운 우거(寓居)하는 곳에서 생활하며 이후로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바라는 점은 그럭저럭 지내면서 잘 헤쳐나가는 데 있었네. 이해에 딸을 낳고 수년 뒤에는 서방(西坊)에 새로 집을 지으니 온 식구가 다 들어가 지낼 만하였네. 비로소 아들 하나를 안게 되니 이것은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인지라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고 할 만하였네. 그러나 살림은 점차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이르러 빚 독촉하는 이들이 문에 가득하고 위태로움과 욕됨이 날로 심해져서 작년 여름부터는 때로 부엌 연기가 올라오지 않기도 하였으니, 노모를 봉양하고 가족 부양하는 내 처지가 갈수록 더욱 뭐라 이를 말이 없었네. 더구나 가을에 들어서고부터는 노모가 자리에 눕게 되어 달이 넘도록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겨울에 이르러서야 약간 차도가 있었네. 나는 동서로 분주하게 골몰하며 살아갈 방도를 극력 강구했지만 곤궁한 계책은 해결되기 어렵고 쉽게 얻어지지 않았네. 이사할 계획을 세웠지만 가옥을 보유할 수 없어 우선 동쪽 이웃 마을의 빈집을 빌려 지내면서 겨울을 지낼 곳으로 삼았네.
섣달 10일에 옛 마을로부터 이곳으로 돌아오니 그대는 이때부터 미미한 병이 있었네. 처음에는 심하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점점 위극한 지경에 이르러 백약이 효력이 없고 4, 5일이 지나 이미 전혀 가망 없는 지경이 되었네. 세모에 날은 춥고 풍우는 밤새 치는데 그대는 정신과 넋이 이미 흩어져서 비록 전혀 알지 못하였으나 병든 노모는 목이 메어 혼절하시고, 큰딸은 어미의 병이 어쩔 수 없는 것을 알아서 울고, 둘째딸은 다만 자고 먹는 것이 불편하다고 울고, 강보에 칭얼대는 어린 것은 젖을 찾아 울어대었네. 쓸쓸한 나그네 신세에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척이 없으니 하룻밤이 마치 한 해를 보내는 듯 길기만 하였네. 이때 내 마음은 바로 하늘에 원통함을 호소하려 하였지만 방법이 없었네. 17일 저녁에 끝내 그대는 눈을 감으니, 하늘이여 신이여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하는가? 죽은 사람은 실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나 산 사람은 장차 어쩌란 말인가? 양가의 팔순 노모는 서산의 해처럼 숨이 곧 끊어질 듯 위태롭고, 무릎 앞의 두 살 된 고아는 양육을 의탁할 곳 없는데 그대의 평소 효성의 마음과 자애의 정으로 차마 이를 버리고 눈을 감았는가?
궁극에 이르면 근본으로 돌아간다 하니, 부득이 짐을 꾸려 옛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네. 명정과 관은 앞에서 먼저 가고 선대의 감실(龕室)은 뒤를 따라 가는데, 노인을 받들고 어린 것을 업고 한편으로는 걷고 한편으로는 통곡하니, 이 같은 광경에 길가는 사람도 눈물을 흘렸네. 모진 바람 사나운 눈보라에 온 산이 슬픔을 머금어 사람으로 하여금 처량하여 목메고 창자가 끊어지게 만드니, 그날 바로 흙을 덮고 예는 이루지 못하였네. 고향 옛터를 돌아보니 다시는 옛날에 살던 곳이 아니고 어느 산 어느 물이나 눈 닿는 곳마다 상심이 되었네. 돌아와 남의 집 곁방에 누웠는데 온방에서 슬픔으로 울부짖으니 이것이 어찌 꿈결 속에서라도 혹 일어날 일인가? 기나긴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이십 년 동안 지나온 일을 가만히 헤아려보니, 첫째도 나의 죄 둘째도 나의 죄였네.
오호라! 덧없는 인생은 모두 물거품 같은 꿈이고, 이 세상은 모두 한바탕 극장과 같다네. 바로 나의 운명이 기구하여 나의 좋은 짝을 빼앗아가서 궁극에 이르게 한 것이었네.
오호라! 삶과 죽음 사이에 그대를 저버림이 많았으니, 무엇 때문에 긴 말을 늘어놓아 유명 간에 심정을 어지럽힐 것이 있겠는가? 내가 그대에게 겉으로는 매우 소원하고 범상한 것 같았지만 내심으로는 좋아하고 복종한 점이 있었네. 우리집에 시집 온 후로 시부모님을 효성으로 봉양하여 일찍이 한 번도 거스르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여러 대 제사를 받드는 일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여 정결함을 다하기에 힘썼고, 허다한 빈객 접대에 싫어하지도 거절하지도 않아서 마땅함을 다하였다네. 도시에 새로 옮겨와 산 이후로 처마를 잇대어 집이 무수히 많아서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많이 보았으나 조금도 부러워하고 좋아하여 시속에 따르는 모습이 없었네. 한 번 선대의 가업이 모두 무너지자 겪은 일이 거의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는데도 일찍이 원망하고 탓하는 말이 없었으며 도리어 나를 위로하고 면려하여 오직 내 몸이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하였네. 오랜 세월 뒤에 쓸 어머니 수의와 아이들 치장에 소용되는 것을 상자 가득 마련해 두어 규모가 정연했고, 의복과 음식의 절도는 비록 세미한 일이기는 하지만 곡진하게 조리가 있었네. 내가 그대에게 얻은 것이 이와 같았는데도 그대로 하여금 춥고 배고픈 근심을 면하지 못하고 중도에 곤욕을 겪게 하였으니, 심하도다 나의 거칠고 자상하지 못함으로 이 천고의 유감을 이루었구려! 한탄한들 어찌 미치겠는가?
오호라! 죽은 사람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급하게 재혼하는 것은 다만 범절 있는 집안에서 허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정과 도리에도 차마 못하는 것이지만 집안 형편을 헤아려 하루도 늦추기를 용납할 수 없었네. 올 여름에 이미 새로운 처를 맞이하여 집에 들이게 되었으니, 인간 세상의 슬픔과 즐거움이 번갈아 섞이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인가? 이 모두가 죽은 사람은 원통하고, 목숨 붙어있는 사람은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것일세.
다행히도 남겨진 어린 아이가 무탈하여 잘 자라 아장아장 걸으며 잘 놀아 어미젖을 잃은 모습이 없으니, 아마 이는 그대가 저승에서 가만히 도와 그러한 것이리라. 그대가 이 세상에 산 자취가 이 아이에게 있고 우리집의 명맥도 이 아이에게 있으니, 그대는 시종 가만히 도와주어서 박상(剝上)의 한 과실로 하여금 남겨두고 먹지 않는 보답이 훗날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네.
오호라! 만약 십여 년이 지난다면 어린 아이들이 장차 차례로 시집 장가를 갈 것인데 황천에서 그대를 일으켜 세울 수 없으니, 나 홀로 이런 일을 맞이함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내 가슴에 못질을 하는 듯하니, 한 목숨 끊어지기 전에 어찌 바랄 만한 날이 있겠는가?
그대를 장사지낸 땅은 우선 아직은 안장(安葬)했다고 할 수 없지만 지난 달 의절(儀節)을 임시로 행하였고, 정신을 수습하기를 기다려 한 자리를 구하여 다시 안장할 계획이네.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사이, 이날이 문득 돌아오니 변변치 못한 제전(祭奠)이 모두 정과 예에 합당치 않으나, 혼령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어찌 고요히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유명(幽明) 간에는 서로 간격이 없다는 말에 따라 말을 다하고자 하니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네. 적절히 안배할 겨를이 없어 이처럼 그치니, 어둡지 않은 혼령은 혹 다하지 못한 말을 묵묵히 알리라.
선성(宣城) :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禮安面)의 옛 이름이다.
박상(剝上)의……보답 : 《주역》의 〈박괘(剝卦)〉는 아래 다섯 음효(陰爻) 위에 하나의 양효(陽爻)가 있는 형상이다. 이 양효를 석과(碩果)에 비유하여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양이 다하지 않고 다음 〈복괘(復卦)〉의 첫 양효로 변하여 다시 이어지는 원리를 말한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