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 사흘
方 旻
요사이 신문과 인터넷에선 ‘사흘’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넘친다. ‘사흘’에서 앞의 ‘사’와 한자 ‘사(四)’가 발음이 같으니 의미도 동일하게 착각한 데서 오는 혼란이다. 이와 더불어 순우리말이냐, 한자어냐를 두고도 여러 말과 의견이 헷갈린다. 이는 우리말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그에 따른 교육 혼란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이런 문제가 앞으로 계속 일어날 거란 점에서 상당히 심각하고 우려할 바가 적지 않다.
심지어 한국에서 구독자 수 1위와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조선일보 글에서도 우리말에 대한 무지를 보이고 있으니 마구잡이 글로 어지러운 인터넷 공간의 혼돈은 차라리 사소한 문제이리라. 조선일보 7월23일자 A34면, “萬物相”에 보면 “시각 읽는 법은 더 특이해서 시(時)는 우리말로 분(分)은 한자어로 읽는다.”라고 썼는데, 같은 신문 7월25일자 “魚友야담”에서도 “일이삼사는 중국어고, 하나둘셋넷은 한국어죠.”라고 나온다. 유명 신문에서 칼럼 맡아 경력이 상당한 기자도 이런 정도니 일반인의 한국어 인식 수준을 놓고 뭐라 하는 것은 오히려 가볍다 못해 우스울 지경이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전문가도 많이 헷갈리는 것 중 하나가 한국어와 한글, 우리말에 대한 인식 부족과 오류다. 한국어 또는 우리말은 한국인인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잠자리에서 깨어나서부터 다시 그 자리에 들 때까지 혹은 꿈자리에서도 쓰는 말이 한국어인 우리말이다. 이 우리말을 순우리말과 다른 어떤 것으로 나누는 자체가 문제 출발이다. 일단 우리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말, 그냥 소리가 아니라 뜻을 가진 말은 모두 넓게 보아 우리말, 한국어다. 이것은 이 한반도 땅에 조상이 살면서부터 지금까지 이어 써온 말이다. 이 역사가 반만년이던 그보다 더 오래고 짧든 긴 역사를 자랑한다. 한민족이 어디서부터 왔느냐는 설이 여럿인 것처럼 우리말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였냐는 것도 여러 설이 있다. 하나씩 그것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고 있다는 현실을 보다 중시해야한다.
티브이방송 자막에서 보면, 인물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표기하는 것을 종종 본다. 예컨대 “계란‘이라 말했는데, 자막엔 ”달걀“로 바꾸는 식이다. 자막을 다는 사람은 아마도 ’달걀”은 순우리말이고, “계란”은 한자어라서 우리말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그리한 것으로 추측한다. 여기서 문제는 “계란”도 엄연히 국어사전에 오른 한국어, 우리말이란 거다. 또 순우리말만 진짜 우리말이란 폐쇄 언어관 또는 한자로 쓰는 말이 우리말이 아니라는 오해다. 앞의 신문 칼럼에서 “일이삼사”는 중국어, 또는 한자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일이삼사”는 중국어가 아닌 한국어, 우리말이다. 우리만 ‘일이삼사’로 발음한다. 중국인은 이 글자를 우리와 다르게 ‘이얼싼쓰’, 일본인은 ‘이찌니상시’로 발음한다. 즉 ‘一二三四’를 한자로 쓰든 ‘일이삼사’ 한글로 쓰든 이렇게 발음하는 것은 세계에서 우리 한국인뿐이다. 즉 ‘일이삼사’는 한국어이지 “魚友야담”에서 쓴 것처럼 중국어가 아니란 말이다.
말은 뜻과 소리로 이루어진다. 한국어는 한국 사람이 발음하는 뜻을 가진 소리다. 새 소리나 물소리 피아노 소리는 그냥 소리이지 말이 아니다. 새가 짖는 것도 나름 뜻이 있지만 사람이 알 수 있는 뜻은 아니(전문가는 뜻을 구별한다고도 하지만)라서 말이라 볼 수 없다. 우리 조상이 살아온 이 땅에서 수천 년 동안 우리말은 사라진 말, 새로 생긴 말, 외국에서 들어온 말, 소리가 변하거나 뜻인 바뀐 말 등이 어우러져 있고, 그 중에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이 중국에서 한자와 함께 온 한자어다. 일상에서 쓰는 우리말의 2/3 정도는 아쉽지만 한자로 된 말(사전에 올라온 말의 대략 수치)이다. 그 다음이 순우리말이라 부르는 고유어이고 그 다음이 서양에서 들어온 외래어다. 우리 것을 강조하여 순우리말을 귀하게 여기고 이것을 살려 자주 쓰자는 방향엔 동의하지만 이를 잘못 알고 사용하는 것을 보면 제발 제대로 알고 썼으면 좋겠다.
이와 관련한 것엔 한글을 그릇되게 인식하고 이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글, 곧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당대 학자들과 창제하는 데 주도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이 아닌 글자, 문자다. 즉 1443년 이전 우리에겐 우리말을 표기할 문자가 없었고(한자를 들여와 썼고), 1446년에 백성에게 이를 알렸지만 한글은 오랜 동안 우리 문자 생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개화기에 ‘독립신문’에서 한글의 문자 주도화를 시도했고, 우여곡절 끝에 근 한 세기를 지나 바야흐로 21세기에 우리말에서 문자 표기 주도권을 차지했다. 줄잡아 수천 년 이 땅에서 유지한 한자의 문자 표기 주도권을 잃어 가는 과정에 한글과 한자의 혼용과 병용, 한글 전용 문제가 오랫동안 학자와 일반인의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어찌 하였든 이제는 이 흐름을 바꿀 수는 없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말이 바로 순우리말이란 용어다. 주로 한글전용론자들이 만들고 주도하여 쓰면서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순(純)우리말’을 인정하면 이에 속하지 않는 우리말은 자연스레 ‘잡(雜)우리말’이 된다는 점이다. 즉 고유어는 순정한 말이고, 고유어를 뺀 나머지 한자어와 외래어는 잡된 우리말이 되는 셈이다. 문제는 우리가 일상에서든 책과 인터넷이든 순우리말보다 대략 ‘잡우리말’을 많이 자주 쓴다는 데 있다. 우리 한국인은 다문화 한국인의 증가로 순수 혈통 한국인이 점차 줄어드는 것과 견주어 보자면 마찬가지로 사라져가는 순우리말을 어떻게 다루어야 좋은가. 대한민국 국민도 앞으로는 점차 순 혈통 한국인이 줄어드는 추세로 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제 한국인 구성의 순혈을 따지는 게 별 의미가 없어져간다는 의미다. 우리말과 함께 깊이 따져보고 생각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자어도 당연히 ‘잡된 우리말’일지언정 국어사전에 올라있는 당당한 한국어다. 한국 국적을 얻은 다문화 한국인을 ‘순한국인’과 달리 ‘잡한국인’으로 나누어 인종차별해선 안되듯 한자어도 순우리말이 아니라고 차등 대우해서야 되겠는가. 이를 마땅히 인정하고 한자어를 한자로 쓰든(혼용과 병용), 한글로 표기하든 상관없이 우리말로 대우해야 한다. 한글은 우리말을 표기하는 가장 좋은 표기 체계의 하나일 뿐이지 유일한 것은 아니다. 한국을 ‘Hankook’. 한글을 ‘Hangeul’이라 쓴다면 이건 한국어인가 영어인가? 또 ‘코리아’, ‘코리안 알파벳’은 영어인가 한국어인가?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한글로 표기하는 말은 한국어인가? 여권에 영문 이름을 표기했다고 미국인이 아니듯, 한국어를 한자로 쓰든 로마자로 쓰든 우리가 알아듣고 말한다면 그건 당연 한국어다. 우리말과 한글 문자는 상관성이 깊지만 필연 관계는 아니다. 요즘 점차 많이 듣고 쓰는 ‘해피하세요’도 머잖아 우리말로 대접받을 거다. 이를 ‘happy하세요’로 쓰는 문제를 두고 또 언젠간 논쟁이 일어날 만하다.
논의를 앞으로 돌려보자.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서로 어울려 섞이며 살아가야만 한다. 산업도 마찬가지고 인간 삶과 말도 동일하다. 왜 영어가 세계어가 되고 가장 많은 어휘를 자랑하는가. 끊임없이 외국어를 받아 들여와 자국어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달리 그동안 거꾸로 갔다. 한자어는 우리말, 또는 순우리말이 아니니 표기든 말로든 쓰지 말고 고유어만 높이 받들어 써야만 한다고 구박하며 밀어내고 스스로 한반도 속에 웅크리는 언어 정책과 실천 운동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한자어를 하나씩 밀어낸 자리에 고유어 대신 국적 불명의 외국어, 이상한 조합 언어가 난장판을 벌이고 있다. 품위 있는 말은 사라지고 막말 속어와 비어와 난잡한 말이 특히 인터넷에선 주도권을 잡더니 점차 하나둘 신문 방송과 책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 과정에 일어난 것이 바로 결코 웃을 수 없는 서글픈 ‘사흘’ 논쟁이 아닌가.
우리말 어휘가 풍부하고 품격 있는 언어가 되어 반듯한 문자 생활하는 진정한 문화한국이 되기 위해선 더 이상 순우리말만을 강조하거나 편향된 인식으로 한자어 우리말을 홀대해선 안 된다. ‘아버지’, ‘아빠’ ‘부친’, ‘춘부장’이란 말의 용도가 서로 다르다. 이 중 어느 말만의 편파 사용은 스스로 표현과 인식을 축소하여 삶의 지평을 협소하게 할 따름이다. 문인과 기자에겐 더더욱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제 티브이 방송 자막에서 ‘달걀’만이 아닌 ‘계란’도 볼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기다린다.
첫댓글 선생님 글은 언제나 흥미롭게 읽습니다. 저도 순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거든요. 티브이에 계란이라 말해도 자막은 달걀로 고쳐 나오는 것을 보면 우습기도 했어요. '너무 좋았어요'는 '정말 좋았어요'로 바뀌고요. 한국어에 교통정리가 확실히 필요하지만 이게 과연 정리가 될까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순우리말을 너무 남발?하는 문장들을 대하면 차라리 읽는데 방해가 되더군요. 백미에 현미나 콩이 지나치면 부담스럽듯이요. 씹기도 힘들고 밥맛도 떨어지잖아요. 몸에 좋은지는 알지만. 제가 생각해온 한국어에 선생님 덕분에 새바람이 불겠습니다. 귀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