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할배부터 지방의 전세버스, 벚꽃팅 대학생까지 몰려들어
[도유진의 ‘그 시절, 서울’ 13]
이상 고온 현상으로 여러 꽃이 계절을 잃고 한꺼번에 피었다.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3월 중순에 이미 매화와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이 동시에 꽃을 피워 시간의 흐름을 헷갈리게 했다. 벚꽃 축제를 개최하는 전국의 지자체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상 기온으로 인해 급히 축제 일정을 앞당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서울에서는 평년보다 무려 2주일이나 일찍 벚꽃이 피었다. 벚꽃 하면 진해의 벚꽃놀이를 떠올리지만, 서울에서는 여의도를 손꼽는다. 그렇지만 여의도가 벚꽃놀이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어느 정도 연식이 있는 이들은 ‘벚꽃놀이는 창경원’이라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창경원 케이블카와 놀이기구
놀이기구에 한눈팔다 미아 되다
새집으로 이사한 그해 봄,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창경원으로 벚꽃놀이를 갔다. 벚꽃 축제가 한창인 일요일 오후 창경궁은 사람으로 붐볐다. 동물원과 식물원에 케이블카를 비롯해 각종 놀이기구까지 있는 데다 밤 벚꽃놀이가 유명했기에 벚꽃축제 기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부모님은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내게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뒤에서 쫓아가던 나는 놀이기구에 빠져 한눈을 팔다가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미아가 된 것이다. 창경원 나뭇가지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끊임없이 잃어버린 아이를 찾거나, 일행을 찾는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가족과 헤어져 혼자가 되었지만, 집이 가까웠기에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며 가족을 찾던 나는 결국 혼자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텅 빈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집 앞 골목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하면서 놀았다. 좁은 골목길에서 하는 동네 축구는 정확한 룰이 없었다. 우리 팀이 골을 넣고 돌아서서 오는데, 상대팀이 뒤에서 갑작스레 우리 골대를 향해 슛을 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몸을 돌려 공을 차려는 순간, 균형을 잡지 못하고 공을 밟고 올라섰다가 바로 넘어지고 말았다. 보도블록 위에서 넘어진 나는 아픈 팔을 부여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우리 가족이 창경궁에서 돌아왔다. 나를 찾기 위해 방송까지 하면서 걱정했는데, 혼자 집에 와 있으니 부모님이 화가 나실 만도 했다. 어쨌든 나로 인해 그날 우리 가족의 나들이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다쳤다고 하면 더 혼날 것 같아서 ‘팔이 아프다’는 소리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른쪽 팔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사실대로 말하고, 엄마와 함께 돈암동에 있던 접골원으로 갔다. X-ray를 찍은 결과 오른쪽 팔이 부러져 있었다. 즉시 깁스한 나는 그날부터 한 달 동안 왼손잡이가 되어야 했다. 왼손으로 숙제를 해야 했기에 시간은 오래 걸렸고, 글씨는 삐뚤삐뚤했다. 깁스를 푸는 날까지 갑갑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창경원 벚꽃놀이 인파와 식물원
할매·할배부터 전세버스, 벚꽃팅 대학생까지 몰려들어
창경원은 혜화국민학교에서 가까웠기에 1학년 때 소풍 가던 장소였다. 소풍날, 학년별로 정해진 장소를 향해 줄지어 걸어갔다. 고학년이 되어서는 버스를 타고 우이동 솔밭까지 멀리 가기도 했지만, 저학년들은 학교에서 가까운 고궁이 소풍 장소였다. 학교 근처에 있는 소풍 가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창경원이었으니, 내겐 그리 새로울 것 없던 곳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창경원을 찾은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대학 시절 집은 명륜동이었다. 나에게는 전혀 새롭지 않았던 창경원이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 동기들이며 선후배들에게 ‘창경원 벚꽃놀이’는 꼭 한 번 가봐야 할 행사였다.
당시 ‘창경궁 벚꽃놀이’가 시작되면, 종로4가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창경원 정문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차량과 인파가 몰려들어 난리였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할아버지부터 아이들 손을 잡고 온 엄마·아빠, 그리고 지방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온 아줌마·아저씨들로 창경원은 늘 만원(滿員)이었다. 여기에 데이트하는 연인들은 물론이고, ‘벚꽃팅(벚꽃놀이 미팅)’으로 짝을 만든 대학생들까지 몰려들었다. 봄이면 늘 신문기사의 중심에 있던 창경원 벚꽃놀이는 1983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공원 아닌 궁으로 제 모습 찾는 중
지금은 창경궁(昌慶宮)이라는 제 이름을 찾았지만, 오랫동안 창경원(昌慶苑)이라 불리며 궁이 아니라 공원이었다. 일제는 강제병합 전인 1907년부터 창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내는 등 훼손·변형하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일반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궁(宮)의 지위를 격하시켰다. 1911년에는 박물관 건물을 짓고, 이름마저 궁(宮)이 아닌 공원(나라 동산)을 뜻하는 창경원(昌慶苑)으로 격을 낮춰 불렀다.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공원으로 변형되고 지위가 격하된 창경궁은 이후 1983년까지 오랫동안 공원 역할을 했다.
1983년 10월, 창경원에 있던 동물과 식물의 서울대공원 이전을 시작으로 창경궁을 되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12월 30일에는 본래의 이름인 창경궁으로 되돌렸다. 버스정류장 명칭도 창경궁으로 바뀌었지만, 이후에도 한참 동안 우리 입에서는 창경원이라는 명칭이 더 쉽게 튀어나왔다.
공간적으로는 일제가 공원으로 만들면서 설치한 건축물을 헐어버리고,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는 등 예전 궁궐 모습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벚꽃놀이로 사람을 끌어 모았던 벚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 원래 궁궐에 있던 나무로 바꿔 심었다. 이때 창경궁의 벚나무 가운데 일부는 여의도 윤중로에 옮겨 심어졌고, 이후 여의도가 창경원의 뒤를 이어 서울 벚꽃놀이의 중심이 되었다.
창경궁의 제 모습 찾기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1932년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 언덕을 끊고 만들었던 ‘종묘관통선’을 지하화하고, 위쪽에 연결 통로를 만들었다. 궁궐담장길이라는 이름의 길은 종묘의 서쪽 담장인 서순라길과 이어져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어렵사리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도유진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껏 서울에 사는, 기자 경력을 지닌 작가이다. 어려서 문(門, 사대문) 안에 있는 학교를 다녔고, 부모님 덕분에 47년을 종로구의 오래된 한옥에서 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 굳게 믿으며,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지난 시간을 글로 풀어내어 ‘그 시절’을 공유하고자 한다. 『언어조련사의 변명』 등 다수의 동인지와 『그리운 자작나무』 『어린왕자』(역서), 『도이치 시문학의 이해』(공저), 『4차 산업혁명』 『한양의 물길을 걷다』 등의 책을 펴냈다.